10화
4. 클라우제너의 후계자
클라우제너 공작저에는 천고가 높은 유리온실이 있다. 선대 클라우제너 공작이 나이 차 나는 계처를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루이자는 딱히 식물을 키우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일광욕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온실만은 몹시 좋아하고 아꼈다. 맑고 큰 판유리와 가벼운 합금 철골로 세워진 유리온실은 그 자체가 기술의 결정체이고 호화였다.
루이자는 이 온실에 사람을 초대하여 티파티를 여는 것이 취미였다.
그날도 10여 명의 귀부인이 모여 있었다. 에리히가 이넨호프 호텔에 방문한 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반지 새로 장만하셨나 봐요.”
“저렇게 진하고 깨끗한 그린 다이아몬드라니.”
“거의 엄지손가락만 하네요?”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루이자는 은은한 웃음을 띠었다.
그녀가 이런 칭찬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 귀부인들은 더욱 호들갑을 떨어 주었다.
“선물 받으신 건가요?”
“남편 없는 여자가 누구한테서 이런 호화로운 목걸이를 선물 받겠는가? 운이 좋게도 아들이 용돈을 넉넉하게 주니, 이런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것이지.”
루이자가 웃으면서 목에 건 에메랄드 목걸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것도 그린 다이아몬드의 컬러에 맞춰 새로 장만한 것이다.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새로 맞춘 드레스는 장식 하나 없지만, 얇은 나비 날개처럼 오묘한 빛을 내는 옷감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대부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이런 차림새를 할 수 있겠는가? 황후조차 쉽지 않을 것이었다.
주위에서 가벼운 경탄성이 흘렀다.
“이 옷감은 위빙 상단의 것이지요? 요즘 거기의 장인들이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공장제 말고 수제 무늬 옷감은 주문하면 두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더라고요. 기다리기 힘들어서…….”
“쉿.”
눈치 없는 누군가가 신나서 말하다가 팔꿈치를 꼬집히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굴렸다.
루이자는 갑작스럽게 불쾌해져서 살랑살랑 부치고 있던 부채를 탁 내려놓았다. 속이 뒤집어졌다 .
[조금만 더 도와 다오, 루이자. 이제 곧 밤베르크 지역에서 그 눈엣가시 같은 위빙 상단을 쫓아낼 수 있어.]
[그렇게 말씀하신 게 벌써 2년이 넘었어요. 제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해 드릴 수는 없다고요.]
[나라고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편하겠니? 아니면 차라리 공작에게 부탁해 주면…….]
[안 돼요! 그건 돈을 부탁하는 것보다 더 곤란한 일이에요. 에리히는 절대 영지 경영에 힘을 써 달라는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요.]
[어머니의 부탁인데도 그러겠니?]
[오라버니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에리히는 정에 호소한다고 통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루이자는 그 망할 놈의 위빙 상단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터졌다.
배후에 귀족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고작해야 아렌의 하급 귀족일 텐데. 에리히의 눈치만 보이지 않았다면 벌써 작살을 내서 쫓아냈을 것이다.
“어머님, 위빙 상단에서 무슨 불쾌한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꽃처럼 고운 슈나이더 백작 영애 이리스가 루이자의 곁으로 다가앉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어머님께 선택받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도 모르고, 어리석네요. 옷감보다도 그걸 선택한 어머님의 안목을 믿고 다들 따라 하는 건데.”
“맞는 말씀이에요.”
“정말요. 이렇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면서 어떻게 저희가 욕심을 안 내겠어요.”
“반의반이라도 따라가려면 두 달 기다리기라도 해야죠.”
“아름답고 세련되신 건 대부인이신데, 감히 상단 따위가 콧대를 세우니까 어이없을 수밖에 없죠.”
루이자의 속이 답답한 것은 단순히 옷감 때문이 아니었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자연히 좋아졌다. 하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짐짓 무심한 태도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이리스가 생글거리고 웃으면서 접시에서 작은 과일 모양으로 만들어진 설탕과자 하나를 집어 루이자의 입 앞까지 가져갔다.
“하나 드세요. 아까 먹어 보니까 모양이랑 똑같은 맛이 나서 깜짝 놀랐어요.”
“흠.”
루이자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먹었다. 체중 조절을 위해서 단것은 잘 먹지 않지만, 이렇게 조르는데 먹어 주지 않을 수도 없다.
사실 이리스가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백작가의 딸 아닌가.
하지만 지금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이리스 슈나이더의 이름을 댈 게 틀림없었다.
루이자는 이리스가 비록 한창때의 자신만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미모와 명성을 지닌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지금 사교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영애가 자신에게 매달리며 아양을 떠는 것은 그녀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슈나이더 백작가라면 나름 뼈대 있는 귀족이긴 하지. 모친 쪽이 몰락 귀족이라 좀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에리히와 신분이 맞는 신붓감은 없다. 이종사촌인 베티나 공녀가 있지만, 사촌 간의 결혼은 지양하는 추세였다.
이러나저러나 귀천 상혼이라면, 이리스도 나쁘지 않았다. 아름답고 정숙하다는 평판은 고귀한 혈통만큼이나 가치가 있었고, 슈나이더 백작가는 선대부터 클라우제너 공작가와 교분을 맺어 온 곳이기도 했다.
‘어차피 내가 결정해야 할 테니까. 에리히는 여자 같은 것엔 관심도 없고.’
몇 년 전에 애인이 있나 잠깐 의심이 들었던 때는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뿐이었다.
그녀가 결정해도 에리히는 딱히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해서 후계자를 남기는 것은 귀족의 책무니까.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내실을 남에게 넘기는 것은 눈물 나게 분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대부인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할 때였다.
‘얘라면 내 말도 잘 듣고, 약간 멍청하고, 감히 백작의 딸 주제에 나한테 덤비지도 않을 거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리스를 새삼 평가하는데,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화제를 돌려 말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예요. 아들이라는 게 키워 봐야 속이나 썩이는 법인데, 클라우제너 공작님께서는 대부인께 아끼는 게 없으니 얼마나 기쁘세요.”
“이제 결혼해서 후사만 튼튼히 해 주시면 완벽하죠.”
“요즘 젊은 남자들, 연애다 뭐다 해서 무희니 가수니 하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는 일도 천지인데, 공작님은 자식이 생겼는데도…….”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를 말하던 슈페 자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이자가 얼어붙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어머……. 모르셨어요? 온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한데……?”
“자식…… 이라고 했나?”
루이자는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그녀는 정말로 까맣게 몰랐다. 이넨호프 호텔에 묵고 있는 아렌의 귀부인이 데리고 있는 아이가 클라우제너 공작과 판박이라든가, 그녀를 만나러 간 공작이 시뻘건 얼굴로 씩씩대며 나왔다는 소문이 벌써 돌 만큼 돌았다.
하지만 아무도 루이자에게 직접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신문도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가십을 함부로 떠들지 않았다.
“아……. 제가 말실수를…….”
슈페 자작 부인이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전 그저…… 공작님이 사생아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셨다고 생각해서…….”
“잠깐 실례하겠네.”
루이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생아라고? 그럴 리가 없었다.
손님들에게 들리지 않을 온실까지 서둘러 빠져나와 루이자는 사람을 불렀다.
“마리아! 마리아!”
“부르셨어요, 대부인?”
온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충성스러운 루이자의 시녀가 재빨리 다가왔다.
철썩!
루이자는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마리아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두 번 뺨을 맞고, 양 볼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루이자는 허억허억 숨을 몰아쉬었다.
“에리히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게 무슨 소리야? 넌 몰랐어?”
“소문은 들었습니다, 대부인. 하지만 공작님께서 그러실 리가…….”
철썩!
루이자는 마리아의 뺨을 한 대 더 후려쳤다. 마리아의 뺨에 반지에 긁힌 상처가 생겼다.
“잡소리 말고 가서 사정 알아 와.”
“네, 대부인.”
마리아가 허리를 굽힌 채로 서둘러 물러갔다. 속이 상한 루이자는 홱 돌아섰다.
소문에 대해서, 에리히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가 제정신일 수 있겠는가? 제게 자식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클레어는 항상 그를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냉정하고 침착하다고 자부한 이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생 몸에 익힌 예절이나 품위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더 그를 미치게 하는 건, 그렇게 이성을 내던지고 행동하고서도 후회한 적이 한 번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5년 전 일은 진짜로 실수였어.’
온당하지 못한 일이었다.
클레어가 허튼소리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일단 비서 하나를 델포드 영지로 보냈다. 하지만 소식이 돌아올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뭘 좋아하지?”
그가 묻는 말에 파벨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제 아들은 다섯 살 때 놋쇠로 만든 병정 인형을 그렇게 좋아했답니다, 공작님.”
“그런가.”
그는 파벨에게 적당한 것을 골라 사 오게 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그렇게 아랫사람을 시켜서 사 온 물건을 주는 건 가족으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윗사람으로서 하사품을 내려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로텐부르크에서 제일 괜찮은 장난감 가게가 어디지?”
“백조 여왕의 둥지라고 하는 곳인데, 이름은 그렇지만 남자아이들 장난감도 아주 많습니다. 동화 속 왕국처럼 꾸며 놓았거든요.”
“그럼 거기로 가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파벨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가게의 문 위에 커다란 백조 조각이 있었다. 마치 날개를 펴고 감싸 안은 것처럼 보였다. 에리히는 감수성이 모자란 사람이었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이 백조의 왕국 속으로 들어갈지 알 것 같았다.
가게 바깥쪽부터 화단이 잘 꾸며져 있더니, 안에도 그랬다. 곧바로 상점이 있는 게 아니라 안쪽에도, 어른 가슴께까지 오는 나무와 장식들로 미로를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이 와글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파벨이 살짝 눈치를 보았지만, 에리히는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쫓아내라고 요구할 만큼 막되지 않았다.
뒤쪽에서 뛰어들어 온 아이들이 다다다 달리다가 에리히의 긴 다리에 걸렸다.
“앗!”
“조심해라.”
에리히는 넘어지지 않게 아이들을 잡아 주고 고개를 들었다가, 나무 사이에 옹크리고 앉아 있는 금발 머리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