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생각지도 못한 우연에 에리히는 잠깐 얼었다. 엘리엇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앗!”
엘리엇이 두 손으로 제 입을 꾹 틀어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럴 때 아이에게 어떤 반응을 해 줘야 하는지 몰라 에리히는 갈등했다. 파벨이 무례함을 무릅쓰고 그의 팔을 잡으며 자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제스처를 취했다.
모르는 척해 주라는 의미인 듯했다. 에리히는 그를 따라 입술에 쉿, 하고 검지를 가져다 대며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이 진지한 얼굴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에리히가 마주 끄덕여 주자 활짝 웃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클레어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
에리히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진지한 얼굴이 몹시 사랑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후우…….”
클레어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엘리엇이 빤히 보이련만, 짐짓 모르는 체 말을 걸었다.
“저희 엘리엇 못 보셨어요?”
“……못 봤는데.”
“얘가 참 어디로 갔지? 안 보이네에.”
에리히의 시선이 다시 엘리엇과 마주쳤다. 엘리엇은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듯 웃는 얼굴로 몸을 배배 틀었다.
클레어가 슬쩍 몸을 틀어 다른 쪽으로 가며 소리쳤다.
“엘리엇? 어딨니?”
그녀가 가게 안쪽으로 사라지자마자 엘리엇이 화단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까르르 웃음을 손바닥 안에 감추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숨바꼭질 중이니?”
“네. 아저씨는 이모의 친구죠?”
저번에 만난 것을 기억하는 듯 엘리엇이 물었다.
친구라니. 에리히는 기묘한 소리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와 대등할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친족 아니면 합종연횡할 대상뿐이었다. 황자라든가, 다른 공작가의 남자들이라든가.
클레어를 친구라는 범주에 넣을 생각은 더더욱 해 본 일이 없었다. 후배라서가 아니라 그녀는 항상…….
하지만 지금 아이에게 말할 만한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에리히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친구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는데.”
엘리엇이 슬그머니 에리히의 눈치를 보았다. 자기가 거짓말을 하게 했다고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에리히는 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연하게 서 있었다. 그건 대단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되나? 목소리는 얼마나 부드럽게 내야 하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 머릿속이 바쁘다 못해 하얗게 물들었다. 영지의 광산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혼란했다.
그는 결국 몸을 낮추지도 않고 고개만 숙인 채 다소 무뚝뚝하게까지 들리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친구를 숨겨 주는 일은 괜찮을까?”
“음……. 나쁜 짓을 숨겨 주는 것은 안 돼요.”
“숨바꼭질할 때는?”
그러자 엘리엇이 배시시 웃었다.
“아저씨는 제 친구가 아닌데요?”
“친구가 되면 되지.”
“어른은 아이와 친구가 되지 않아요.”
엘리엇이 말해 놓고, 주먹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절 위해서 이모를 배신했으니까 한 번만 믿어 드릴게요.”
그 조그만 주먹에 에리히는 ‘어쩌라는 걸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가 곧 뭘 하자는 건지 깨달았다.
에리히는 단언컨대 평생 그런 짓을 해 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이라고 해서 아이에게 다정한 얼굴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에는 더더욱.
사촌, 육촌까지 범위를 넓히면 또래 남자의 수도 꽤 늘어나지만, 모두 로멜 귀족이다. 이런 식의 스킨십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른은 아이와 친구가 되지 않는다던 아이가 손을 내밀었는데, 여기서 기품을 지켜 봐야 뭐 하겠는가.
그는 몸을 구부려 아이의 작은 주먹에 자기 주먹을 톡 갖다 댔다. 보드라운 감촉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엘리엇이 다시 까르르 웃다가 얼른 화단 사이로 숨었다. 저쪽까지 갔던 클레어가 돌아왔다.
“아직도 여기 있었어요?”
“음.”
클레어가 에리히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장난감 가게에까지 행차하다니. 이 오해를 대체 어떻게 풀어 줘야 좋은가. 그리고 세상의 오해는 대체 또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렇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가 몸을 허락한 적이 있는 남자가 아이 이야기를 듣고 도망가거나 부정하는 종류의 쓰레기도, 체면치레로 돈과 서류 몇 장을 던져 주고 끝내는 사람도 아니라, 책임을 지겠다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고 있기까지 하니까.
그 아이가 본인 아이가 아니라서 그렇지.
클레어는 한숨을 조금 내쉬고 이 숨바꼭질을 끝내기로 했다.
엘리엇의 동글동글한 머리는 아까부터 잘 보였다. 이 가게는 아이들이 놀기 좋게 꾸며 놓았지만, 어른이 시야에서 놓치는 일 없도록 아이가 숨을 만한 시설은 대부분 가슴 높이에 머물렀다.
“찾았다, 엘리엇!”
“악!”
클레어가 왁 소리를 지르자 엘리엇이 기겁하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리히는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뭘 하기 전에 엘리엇이 팔짝 뛰어 일어났다.
“에이, 도망갈걸.”
살짝 자신 쪽을 쳐다보는 눈길에 에리히는 괜히 미안해졌다.
하지만 엘리엇은 원망 같은 걸 하지는 않았다. 클레어가 둘을 번갈아 보며 어이없는 듯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뭐예요?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친구를 배신하면 안 되니까.”
에리히의 무뚝뚝한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엘리엇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요. 저 진짜 아저씨를 믿기로 했어요.”
“…….”
“이모, 이번엔 아저씨도 끼워 줄래!”
“장난감은 안 사고 숨바꼭질만 하다가 가려고?”
“앗. 안 돼!”
엘리엇이 깜짝 놀라 클레어의 치맛자락에 달라붙었다. 클레어가 짐짓 지갑을 꺼내 흔들었다.
“마사랑 가서 제일 갖고 싶은 거 딱 두 개만 골라 오렴. 30골드 안에서.”
“30골드는 너무…….”
너무 싼 거 아니냐고 말하려는 에리히의 말을 클레어가 손짓으로 막았다. 엘리엇이 눈을 반짝 빛냈다.
“진짜? 두 개?”
“네가 직접 더해서 잘 계산해야 해. 할 수 있지?”
“응!”
엘리엇이 신나서 뛰어갔다.
엘리엇을 시야에 둔 채로 근처에서 맴돌고 있다가 클레어를 따라온 마사가 그 뒤를 따라갔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턱을 조금 치켜들고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엇을 상대해 줘서 고마워요. 저 애는 남자 어른이 자기를 진지하게 대해 주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당연한 일이야.”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지난번에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하면, 가방으로 선배의 턱주가리를 날리고 제국의 반역자가 되어 끌려가는 쪽을 택할 거예요.”
“…….”
에리히는 클레어가 바라는 대로 입을 다물었다.
“저쪽에서 어른들에게 차를 주던데, 마실래요?”
“그러지.”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가 앞장서서 걸었다. 에리히는 천천히 그 뒤를 따르다가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옆으로 갔다. 클레어는 별말 하지 않고 말했다.
“이런 데는 어쩐 일이에요? 제발 엘리엇 선물 사러 온 거라는 말만 빼고.”
“……그러면 할 수 있는 말이 없군. 지난번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다면 더더욱.”
“하아…….”
클레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히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클레어가 선수를 쳤다.
“오늘은 제발, 안 싸우고 싶어요. 그러니까 좀 넘어가면 안 돼요? 여기서 싸우면 소문이 또 더 커질 텐데, 나는 엘리엇을 데리고 교회에 갔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에 돌아가면 일까지 해야 한단 말이에요.”
“일정이 길군.”
“선배야말로 바쁠 텐데, 여기까지는 뭐 하러 왔어요?”
“네가 금지한 이야기인데.”
“아, 그렇죠. 질문은 아니었어요.”
클레어가 고개를 저었다.
가게 한쪽 구석에서 차를 긴 물잔에 담아 나누어 주고 있었다. 테이블도, 의자도 없었지만 지친 어른들은 각자 차를 들고 한숨 돌리고 있었다.
에리히 쪽으로 시선이 몰려왔다. 이 장난감 가게는 워낙 큰 데다가 아이들이 놀기 좋기 때문에 부자나 귀족 손님이 오는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었지만, 에리히 같은 외모의 남자는 보기 드물었다.
에리히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창가 쪽으로 향했다. 딱히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위압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비워 주었다.
클레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아니, 선배랑 있으면 편하다 싶어서요. 여러 가지로.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가.”
“아, 선배 자체가 편하다는 말은 아니니까요.”
“넌 항상 쓸데없는 소리가 한마디 더 많아.”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진실은 중요한 거니까요.”
“넌 오해하게 말한 적이 없어.”
“그런가요? 도무지 감당 못 할 오해에 인생이 휘청거릴 지경인데요?”
에리히는 눈썹만 찡그린 채로 대꾸하지 않고 찻잔을 입에 댔다. 찻물은 혀가 썩을 만큼 달았고 향도 나빠서, 뜨겁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력이 났다.
그는 한 모금을 마시고 구름처럼 솜덩이가 매달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게가 특이하군. 내가 상상한 장난감 가게가 아닌데.”
“마음에 들어요?”
“내가 마음에 들고 말고 할 일은 아니지. 아이들이 좋아하겠다는 뜻이야. 하지만 이래서야 장사가 되나?”
“잘되겠죠. 사람 봐요.”
“수익이 나느냐고 묻는 거야. 이 장식에, 아이 보는 경비원에, 비용이 상당히 들 텐데. 그냥 놀고만 가는 손님도 많을 것 같고.”
클레어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에 에리히는 승리감을 느꼈다.
“내 가게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