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렇게 남들이 생각지도 못할 발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너 말고 또 있을까?”
그리고 그걸 실행해 버리는 사람도.
에리히는 그게 늘 놀라웠다.
클레어는 언제나 자기에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는 듯이 말하고, 나서서 먼저 일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뭔가를 시작했을 때에는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실패하는 일도 없었다. 자기가 이루어 낸 것마저 조소하는 일이 잦아서 그렇지.
이번에도 클레어가 불편한 얼굴로 대꾸했다.
“손님을 빨리 내보내는 게 아니라 붙들어 두려는 시도를 하는 건 제가 처음이 아닐 텐데요.”
“아이들은 다르지. 직접 지갑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잖나. 사실 장난감을 사 준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닐 텐데.”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일곱 살만 되어도 일을 시켰다. 부모에게 가게가 있거나 갈 땅이 있다면 집안 일을 돕는 게 당연했다.
양이나 소를 치는 것은 으레 아이들의 일이었다. 도시에 산다면 신문을 팔거나 사환 노릇이라도 하는 게 보통이었고, 공장에서도 일고여덟 살짜리 아이를 썼다.
어려서 아직 놀 나이라도 굳이 장난감 같은 것을 사 줄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 갖고 놀 것이 천지로 널렸는데.
클레어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데까지 아이를 데려오는 사람은 부자잖아요. 오래 있으면, 돈을 쓰게 마련이죠.”
“흠.”
“사실 지금으로서는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에요.”
클레어가 쌈박하게 인정했다.
“그냥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보는 거죠. 성공하는 것도 있고, 실패하는 것도 있지만요. 이건 실패에 가까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유지하고 있어요.”
“그렇군.”
“꼭 부모가 사 주지 않아도…… 도제나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돈을 저축해서 사러 오는 일도 있거든요.”
보물을 사러 오듯이 말이다. 그래서 클레어는 조금 더 높은 연령대의 장난감도 만들게 했다.
나뭇가지 하나, 돌 몇 개로 풀을 찧어서도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게 아이들이라지만, 조카가 있고 보니 그런 게 또 안타까웠다.
에리히가 말했다.
“넌 도박사 기질이 있어.”
“이게 무슨 도박사예요? 가게 하나인데.”
“이 가게 하나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야.”
“아.”
클레어가 짧게 탄성을 냈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며 불편한 듯이 시선을 돌렸다.
“위빙 상단이 제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보고가 들어오니까. 내 영지에서도 꽤 잘되는 것 같던데.”
에리히도 시선을 돌려 창밖으로 길바닥을 노려보았다. 지난 5년 동안, 위빙 상단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있다는 것은 몰랐으면서.
위빙 상단이 아니라 차라리 델포드 영지를 지켜봐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아, 생각해 보니 그쪽에서 분쟁이 있죠.”
클레어가 벨프 후작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로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는 에리히가 그런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알고는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운이 좋았어요.”
“운만으로 위빙 상단 같은 걸 만들 순 없지.”
“그러면, 상상력도 좋았다는 것으로 하죠.”
클레어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진짜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미래의 형태를 알고 있었다.
로멜-아렌 제국이 그녀가 전생에 살던 세상과 일치하는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와 기후 특성이 달랐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똑같다. 어떤 기술 뒤에 무엇이 올지, 물자가 풍부해지면 사람이 무엇을 바라게 될지는 비슷한 법이다.
클레어는 산업혁명의 진행에 대해서 어렴풋한 지식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결과물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무엇에 도전할지 고르기만 하면 되었다. 성공을 믿고 망설임 없이 쥔 패를 던질 수 있었다.
예산을 짜고 투자금을 모으고 레버리지를 일으키는 일 같은 것도 클레어에게는 그렇게 새롭고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세상에서 살아 봤으니까.
‘도박사가 아니라 치터지.’
물론 이곳이라고 해서 경제 구조가 단순하다거나 돈 벌기가 쉬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클레어는 귀족이었다. 비록 남방 아렌의 하급 귀족이라면 사교계의 바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갈취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웠고, 행위는 선해되고, 룰은 호의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조차도 클레어에게는 부당한 편법으로 여겨졌지만 말이다.
고작해야 아렌의 여남작인 자신에게도 이렇다면, 로멜의 대귀족들은 얼마나 편리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평민들에게는 얼마나 불공정한 세상일까.
그 둘에게는 나라도, 법도,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조차도 완전히 다르다. 클레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또 뭔가 나한테 화가 났군.”
에리히가 말했다. 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아뇨. 선배한테 화가 난 게 아니고, 그냥 세상사에 가끔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요.”
“…….”
“잘도 안다니까. 저 방금 티 하나도 안 냈는데.”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좀 신기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닐 수도 있었다. 에리히는 그녀를 그냥 아무것도 아닌 하급 귀족으로 보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같은 교수의 연구실에 오가는 하급생으로만 여기고 목례나 건네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클레어도 그냥 높으신 분으로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 인맥으로 잡아 보려고 애썼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아무 사이 아니지만.’
클레어는 생각의 끝에 그런 쐐기를 박았다.
에리히가 중얼거렸다.
“그건…….”
“그건……?”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에 잠기느라 조금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놓쳤던 것이다.
에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네 눈동자가 그럴 때에는 달구어진 강철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그냥 말을 입안에서 굴려 삼켰다.
“아무튼.”
그가 말을 돌렸다. 원래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있던 터라,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주의를 돌리는 힘이 있었다.
“난 네가 태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식이 들려서 놀랐지.”
“그러게요. 저도 이렇게 열심히 살 예정은 없었는데, 키워야 할 애가 있으니까요. 우유 버프라고 해야 하나.”
5년 전 그날 밤, 엘리사가 피 묻은 옷을 입고 새파랗게 겁에 질려 왔을 때, 가질 수 있는 힘을 전부 갖겠다고 결심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전 달리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요. 딱히 대귀족인 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라도 있어야죠.”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어졌다. 클레어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차를 비웠다. 에리히와 소리 지르지 않고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눈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모처럼 기분이 좋았지만, 반대로 에리히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한테 연락해 볼 생각은 안 해 봤나?”
“그거 완전히 착각이라니까요.”
클레어는 답답해졌다. 그렇다고 사정을 전부 밝힐 수도 없었다.
‘선배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에리히는 황실과 관계가 가까운 사람이다. 황제가 그의 외삼촌이고, 황후와는 인척이었다. 제국의 지배 가문들은 모두 긴밀한 혼맥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가 황후와 친하든 아니든, 위험 구역에 너무 가까웠다.
그게 아니라도 클레어는 그를 공연한 일에 끌어들일 수 없었다. 엘리사와 엘리엇을 지키는 것은 그녀의 책임이지,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엘리엇에 대해 공연한 오해를 하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클레어.”
괜스레 머릿속이 어지러워져서 클레어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에리히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제게 고정시켰다. 어느 틈에 그가 옷자락이 닿을 정도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클레어는 흠칫 놀랐다. 숨결의 온도가 훅 올랐다. 그녀는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엘리엇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아까부터 나직나직하게 말하고 있던 에리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게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인지, 감정을 억누르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 목소리 밑바닥에 깔린 끓는 듯한 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떤 때에 이런 목소리를 내는지 이미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구혼하려던 남자야.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정말로 한 번도 내 생각은 안 한 건가?”
“그게…… 당신이 화낼 일이에요?”
“네게는 정말로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나? 나는 적어도 우리가…….”
에리히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들보다는 서로의 마음에 꽤 많이 닿아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글, 쎄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발음하지 못하고 클레어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물러서면서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 전에 에리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넌 잊은 것 같은데, 나는 너를 원해.”
그는 클레어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뗐다. 그 동작이 너무나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서, 여기가 장난감 가게의 휴게실이 아니라 황궁의 무도회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실수 때문에 적선하듯 결혼해 줄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이제 지긋지긋해요. 도대체 언제까지 이 이야기를 해야 해요?”
클레어는 잠기려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이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잡혀 있는 손바닥의 온도, 허리를 감아 오는 팔.
에리히는 고귀한 신분치고는 단단한 손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것을 떠올리고 소스라쳤다.
“내가 실수라고 말한 건 널 안은 걸 두고 말한 게 아니라, 순서가 틀렸다는 거였어.”
그가 클레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는 입을 벌리고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는 울림 있는 목소리가 거의 클레어의 입술 위에 닿을 지경이었다.
“구혼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그녀가 졸업하고 나면 구혼자 행렬에 이름을 올릴 작정이었는데, 클레어는 졸업장을 챙기자마자 바로 영지로 가 버렸다.
몇 년 만에 수도로 돌아와서 재회한 뒤에는 하룻밤 만에 사람을 허튼 작자로 만들어 놓고 또 도망쳤다.
에리히는 이번까지 멍청하게 넋 놓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기, 선배.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소문나라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텐데. 내가 네 명예를 지켜 주려고 입을 다물어서 얻는 게 뭐지? 남 취급? 자식을 잃는 거?”
“그거 아니라니까요.”
그때 엘리엇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랑 아저씨가 뽀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