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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263)

13화

어른들은 귀를 쫑긋 세울지언정 예의를 지켜, 직접 입 밖에 내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다.

아이들이 그게 무슨 대단히 신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엘리엇을 따라 입을 모았다.

“뽀뽀한다!!”

“뽀뽀했대요!”

클레어는 새빨개져서 에리히를 밀쳐 냈다. 에리히는 남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거 점잖은 분들이 공공장소에서 무슨 짓입니까?”

엘리엇을 목말 태워 온 로저가 툭 던졌다. 그 뒤에서 엘리엇을 따라갔던 파벨과 마사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쪽팔려서 살 수가 없었다.

“안 했어.”

“아니야, 내가 봤어!”

엘리엇이 소리쳤다. 그리고 로저의 어깨에서 내려오려고 버둥거렸다.

클레어가 뒤로 가서 안아 내리려는데 에리히가 그녀보다 먼저 손을 뻗어 엘리엇을 가볍게 들어 내렸다. 안아 준다기보다는 로저에게서 떼어 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살짝 바닥에 내려놓으려 하자 엘리엇이 발을 버둥거리며 허공에 휘저었다.

“조심.”

“앗!”

엘리엇은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달려와 클레어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우리 이모야!”

에리히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엘리엇이 클레어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비볐다.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을 안아 들었다.

“어이구, 무거워.”

엘리엇이 클레어의 볼에 뽀뽀했다. 클레어는 풀어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정색했다.

로저가 피식거렸다.

“이모님 결혼하시면 싫으십니까?”

“그건 아닌데에…….”

엘리엇이 투정을 부렸다. 클레어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귀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자신이 누구 때문에 결혼 계약서까지 검토 중인 건데.

“이모는 엘리엇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진짠데.”

“저번엔 엄마를 제일 좋아한댔어.”

“아, 그건 그렇지. 그럼 산 사람 중에서 제일 좋아.”

“나도 엄마 말고 이모가 제일 좋아.”

엘리엇이 포옥 안겼다.

클레어는 숨을 흡 들이켜고 그 자리를 떠났다. 찜찜함을 느꼈지만, 사실 여기에서 에리히와 뭔가 달리 더 할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엘리엇 앞에서는 더더욱.

에리히와 로저가 나란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클레어는 휴게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다고 사람의 시선을 다 피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아이들의 놀리는 소리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저기요, 선배.”

이제 그만 좀 가라고 말하려는데, 에리히가 로저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자는 누군가?”

평소의 에리히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타인은 대부분 눈 아래에 스쳐 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클레어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인식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

하지만 이 젊고 훤칠한 남자가 신경 쓰였다.

고용인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옷치레는 허술하지만 옷감이 고급품이었고, 활달하고 생동감 있는 태도에도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엘리엇과 친해 보였다. 당연한 것처럼 엘리엇을 목말 태우고 오고, 클레어가 아이를 내려 주려는 모습이 어찌 보면 가족처럼 보이지 않는 바도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클레어가 의아하게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에리히가 평민인 게 분명한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클라우제너 공작에게 비빌 기회가 생겼는데도 로저가 입 다물고 있는 게 더 놀라웠다.

“이쪽은 위빙 상단주예요.”

로저에게는 굳이 소개하지 않았다. 사업을 크게 한다는 사람이 클라우제너 공작의 얼굴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로저가 없는 모자도 다시 벗을 만큼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로저 카슨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흠.”

에리히는 말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아 주었다. 고작해야 상단주라니, 신경 쓸 만한 상대가 아닌데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위빙 상단주는 꽤 수완가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젊은 사람인 줄 몰랐군.”

“아마 좋은 평판을 들으셨다면 저희 아버지 이야기일 겁니다. 저야 뭐, 남작님 심부름꾼이죠. 남작님이 절 선택해 주신 걸 그저 인생의 대운으로 알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로저가 실실 웃었다. 에리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역시나 이 남자가 거슬렸다.

클레어가 물었다.

“그런데 로저, 여긴 어쩐 일이야? 무슨 급한 용건이라도 있어?”

“아, 그게 말이죠.”

그가 고개를 숙여 클레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밤베르크시 소매점 대표가 찾아왔습니다.”

“음…….”

클레어는 눈을 흘겼다.

확실히 에리히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밤베르크시는 클라우제너 공작령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벨프 후작가와의 분쟁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저의 이 태도는 이상했다. 원래 귓속말 같은 것을 하는 위인이 아니었을뿐더러, 그럴 만큼 급한 소식도 아니었다.

로저가 말했다.

“남작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은 건 아닙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한번 만나긴 해야겠군. 내일……?”

“남작님이 부르시기만 하면 언제든 달려갈 겁니다. 호텔로 갈까요?”

“그래.”

“알겠습니다.”

로저가 흘끔 에리히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왜 이러나 싶었다. 로저가 때때로 그녀에게 결혼 상대로 자기는 어떠냐는 헛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클레어는 그것을 아첨과 농담이 섞인 장난 이상으로 들은 적이 없었다.

이익에 밝은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기에서 로저가 제일 아첨해야 할 것은 에리히였다. 손이라도 비벼서 밤베르크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클레어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에리히에게 그렇게 아쉬운 소리를 하느니 혀를 칵 깨물고 말 테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시선을 주자, 에리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로저를.

‘뭐야. 지금 이거 진지하게 시비 걸린 거야? 진짜로?’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녀는 하, 하고 한숨소리를 냈다. 그것을 잘못 받아들인 에리히의 입매가 더 굳었다.

“무슨 일인가?”

“사업 이야기예요. 남 앞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클레어는 딱 잘라 대답했다. 에리히에게 청탁 같은 걸 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고, 그 비슷하게 들릴 만한 여지가 있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모! 이모오!”

기다림이 한계에 도달한 엘리엇이 클레어의 허리를 껴안고 떼를 썼다.

“나 장난감!”

“아.”

클레어는 약속 상대가 아이라고 해서 쉽게 잊거나 무시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만 딴 데에 정신이 너무 많이 팔렸다.

“다 골랐어?”

“저기 있는 거!”

엘리엇이 클레어를 질질 잡아끌었다. 이럴 때만은 힘이 셌다. 클레어는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마음을 담아 에리히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못 알아듣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들을 뒤따라왔다.

엘리엇이 커다란 요새 모형 가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거! 산적놀이!”

“아니, 전쟁놀이가 아니라요?”

그들 뒤를 슬슬 따라온 로저가 물었다. 엘리엇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산적놀이 할 거야!”

“엘리엇, 이모가 아까 뭐라고 했지?”

“장난감…… 두 개…….”

클레어의 목소리에서 거절을 느끼고 엘리엇이 시무룩해졌다.

“이거 한 갠데…… 나 이거만 있으면 되는데…….”

“얼마까지 된댔어?”

“30골드…….”

“우리 엘리엇, 몇까지 셀 수 있어?”

엘리엇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치만 이건 로저 아저씨가 선물해 준댔는데…… 이모가 사 주는 거랑 다른데…….”

말꼬리에 이미 울먹임이 섞이고 있었다. 클레어는 공연히 아이를 부추겨 놓았다고 로저를 노려보았다.

로저가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했다.

“몰랐습니다. 갖고 싶다고 하셔서…….”

“함부로 뭐 사다 안기지 말랬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비싼 것도 아닌데…….”

로저가 웅얼거렸다. 에리히가 끼어들었다.

“얼마짜린데. 고작해야 아이용 아닌가.”

“파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서 노는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둔 거라고요.”

갖고 싶다고 아무것이나 다 사 줄 순 없었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흑.”

엘리엇이 우는 건지 놀란 건지 모를 소리로 딸꾹질을 했다. 클레어는 엘리엇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물었다.

“이모가 약속은 지킬 거야. 그렇지만 이건 안 돼. 여기서 친구들이랑 같이 놀라고 만들어 둔 거야.”

“이모 미워. 나 저거 아니면 싫어어어!”

“어차피 이거 집에 갖고 가지도 못하지만, 갖고 간다고 해도 여기서 혼자서 놀 거야?”

엘리엇이 울먹거리다가 앵돌아졌다. 혼자서는 전쟁놀이든 산적놀이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한숨을 쉬고 로저에게 눈치를 주었다. 로저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장난감은 나중에 다시 사러 오자.”

클레어는 엘리엇을 안아 올렸다. 그리고 에리히에게 말했다.

“선배도요.”

“나도? 뭘?”

“엘리엇한테 함부로 과한 선물 하고 그러지 말라고요. 나중 가서 남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내가 왜 널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선배는 안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아무 일 안 했는데 클라우제너를 노린 사기꾼 취급 당하기는 싫거든요.”

클레어는 에리히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는, 눈물범벅이 되어 떼쓰는 엘리엇을 안고 장난감 가게를 떠났다.

뒤에 남은 에리히는 잠깐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서 있었다. 파벨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공작님, 돌아가시겠습니까?”

“파벨, 점장을 불러와.”

“예?”

생각을 마친 에리히가 하는 말에 파벨이 깜짝 놀랐다. 에리히는 요새 모형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가게의 장난감을 전부 사야겠어.”

“아이고, 공작님. 조금 전에 숙녀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시고서…….”

“엘리엇에게 무턱대고 주진 않을 테니까 교육적인 걱정은 됐네. 지금 가게에 들어와 있는 아이들에게 갖고 싶다는 걸 전부 하나씩 주고, 이넨호프 호텔의 지배인을 불러와.”

에리히는 말했다.

엘리엇의 환심을 사야겠다. 적어도 로저 카슨이라는 저놈보다는 더.

클레어가 말한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일단 공작 부인으로 만들고 나면 전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텐데. 사죄하러 네 발로 기어올 것이다.

소문은 이미 날 대로 났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그는 로텐부르크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신문사 앞에서 키스해서, 소문을 2백 배 정도 부풀릴 용의도 있었다. 포위섬멸전은 가장 확실한 승리전술이다.

클레어 상대로는 그것도 안심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저 로저 카슨이라는 놈에 대해서 좀 알아봐.”

“예.”

파벨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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