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5. 포위 청혼전
한스는 일어서서 모자를 벗고 클레어에게 허리를 꺾었다.
“부디 살펴 주십시오.”
그는 위빙 상단과 거래하는 밤베르크의 포목점주들을 대표해서 왔다.
위빙 상단과 거래하는 밤베르크의 포목점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 벌써 반년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 직전까지는 좋았다. 위빙 상단의 문직물은 단순히 그냥 그것만 잘 팔리는 것이 아니라 포목 자체의 수요를 늘렸다.
밤베르크는 부유한 클라우제너 공작령 중에서도 물자의 흐름이 상당히 빠르고 돈이 많은 도시였다. 소비하는 법을 알게 된 시민들은 점주들의 호주머니를 풍요롭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반년 전, 벨프 후작가의 자산을 운용하는 프라흐 상단이 밤베르크를 타깃으로 삼았다.
문직물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무차별로 공급되었다. 무늬 없는 보통 직물의 가격이 더 비쌀 지경이었다.
손님들은 이왕이면 문직물이 저렴한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보통 직물의 가격은 여기나 거기나 비슷했다.
포목점주들은 나름대로 연합해서 프라흐 상단에게 대항해 보려 했다. 자체적으로 이익률을 낮추고 거의 원가에 가깝게 팔았지만, 프라흐 상단에서 파는 값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어떤 포목점주들은 프라흐 상단에게 굴복하러 가기도 했다. 위빙 상단과 손을 끊고 프라흐 상단에서 직물을 공급받으려 한 것이다.
프라흐 상단은 그것도 거부했다.
[멍청하긴. 그게 될 리가 있나. 이건 아무리 봐도 위빙 상단에서 만드는 문직물이야. 다른 데에서 그걸 사다가 여기다가 싸게 뿌리는 거야.]
[뭐 하러요?]
[우리를 다 죽이려는 거지!]
그런 대화 끝에 포목점주들은 한스를 대표로 하여, 위빙 상단의 진짜 주인에게 하소연하러 온 것이었다.
클레어는 레이스 장갑을 낀 하얀 손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보다 공급가를 더 낮출 순 없네. 지금도 로저가 거의 원가에 가깝게 주고 있는 거야.”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극적으로 낮췄다지만, 그렇다고 땅에서 그냥 파내는 게 아니다. 직공들에게도, 목화 농장의 인부들에게도 적절한 대우를 해 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원가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저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클라우제너의 금고에 빨대를 꽂은 벨프 후작가와 치킨 레이스를 할 수는 없었다. 클라우제너는 진짜로 땅에서 돈을 파내는 곳이니까.
“그리고 자네들에게만 원가 이하로 저렴하게 공급할 수도 없고. 자네들이 싸게 팔면, 그걸 또 다른 상단에서 사다가 다른 지역에 저렴하게 풀어 버리겠지.”
“그건…….”
“지금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네.”
웃기는 꼴이었다.
프라흐 상단은 위빙 상단에서 문직물을 사다가 싸게 풀고, 그게 싸니까 다른 지역의 상단이 또 밤베르크의 프라흐 상점에서 문직물을 사 간다.
사실 클레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루트로 프라흐 상단에서 문직물을 사들이고 있었다.
‘사실 돈이 복사되고 있긴 한데.’
비싸게 판 물건을 싸게 되사다가 다시 비싸게 팔고 있으니까.
프라흐 상단은 자기네 상점에서 나간 물건을 다시 한번 비싸게 되사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단 밤베르크에서 위빙 상단을 쫓아내기만 하면 거기를 거점으로 자기네 상단의 점유율을 점점 높여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아니올시다였다.
세상이 철도 수송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들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한스 같은 소매점주들이 망하지 않도록 배려하긴 해야 했다. 클레어는 안 그래도 이 문제로 골을 썩이고 있었다.
“단순히 가격 경쟁만으로는 안 돼. 생각해 봤는데, 아예 이 기회에 단순히 직물을 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판매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던 때였다.
한스가 몸 둘 바를 모르는 얼굴로 망설이던 끝에 한마디를 여쭈었다.
“공작님께서 중재해 주실 가망은 없는 겁니까?”
“공작님?”
클레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로저가 그녀보다 한발 먼저 한스를 책망했다.
“클라우제너 공작님이 이런 일에 개입하실 분이 아니라는 건 이미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한스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자넨 좀 가만히 있어 보게. 내가 공작령에서 사는데 우리 영주님 성품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뭐시냐…….”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사람이라는 게, 이런 말씀 여쭙기 송구하지만…… 아이 엄마가 부탁하면 어떻게든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클레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관자놀이가 콕콕 쑤셨다.
한스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문에서 보니까 남작님이 그…… 공작님과.”
“하, 하하!”
눈치 빠른 로저가 한스를 붙잡았다.
“생각해 보니 저랑 따로 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깜박했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남작님!”
“어엉? 카슨 씨, 갑자기 이러면…….”
클레어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한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이만 꺼지라는 신호였다.
금세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클레어는 눈을 감은 채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이고, 두야…….’
오전에 신문을 봤을 때부터 불안했었다.
《금발 머리 남자아이의 아버지는 대체 누구인가!》
《특종! 클라우제너 공작의 사생아!》
《아카데미는 연애하는 곳인가?》
헤드라인이 전부 이 꼴이었다.
안에는 삽화까지 있었다. 섬세한 펜화로 남자가 여자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있는데, 주위에 아이들이 우글우글 둘러싸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나마 사진 찍는 데 일곱 시간씩 걸리는 시대라서 안심했었다. 삽화는 부정확했으니까. 제법 특징이 정확하게 잡힌 에리히에 비해 여자 쪽은 용모 특징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대로 또 따로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 무책임한 작자들 같으니.”
언론법과 기자 윤리가 있어도 양심이라곤 없는 새끼들이 천지였는데, 아직 그런 것도 없는 이 시대에 뭘 기대하겠는가.
엘리엇이 아직 신문까지 능숙하게 읽지 못하니 망정이지……. 그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서둘러야 하나.”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서, 임시 집무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서 반지 상자를 꺼냈다. 이것은 그레이가 두고 간 것이었다.
[당신이 이걸 순전히 형식적인 것으로만 여긴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도 결혼은 결혼이니까요.]
그레이는 처음 보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싫지 않다면, 끼어 주십시오. 저는 무척 기쁠 겁니다.]
클레어가 도저히 모를 수 없는 감정이 담긴 얼굴이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반지 상자를 열 생각도 못 하고 받아 두기만 했다.
어차피 결혼을 할 거라면, 그걸 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레이는 좋은 사람이다. 단순히 조건이 클레어에게 딱 맞는 것만이 아니라 아깝다고 생각할 만큼 남자로서도 매력적이었다.
“후우…….”
그녀는 반지 상자를 열어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비춰 보았다. 오렌지핑크색의 사파이어가 불타오르듯이 빨간 섬광을 발했다.
‘결혼을 빨리해 버리면 소문도 빨리 정리될까?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스캔들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될 수도 있고……. 그레이가 꼴사나운 입장이 될지도 모르는데.’
결혼하자마자 오쟁이 진 남자라는 말이 신문 기사로 뜰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아니라도 마음이 답답했다.
[내가 실수라고 말한 건 널 안은 걸 두고 말한 게 아니라, 순서가 틀렸다는 거였어.]
에리히는 그렇게 말했지만, 설령 그랬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녀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 따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 감히 손이 닿지도 않을 높으신 분을 꼬셨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고, 결혼으로 델포드를 클라우제너라고 하는 바다에 던져 넣은 물 한 바가지처럼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부모가 그녀에게 물려준 집이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가문에 특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걸 다른 사람에게 흡수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위로가 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5년 전 일을 질질 끌고 있었다는 것을 클레어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변덕이 아닌 것보다 오히려 골치 아픈 일인데.’
그 생각을 끊으려고 그녀는 상자 안에서 그레이의 반지를 꺼내 끼었다.
“사이즈를 잘도 알았네.”
하긴, 그가 클레어와 결혼할 거라는 걸 델포드 남작가 사람들이 다 아는데, 반지 산다고 하면 다들 협력해 주었을 것이다.
심플한 디자인도, 보석의 크기도 딱 좋았다. 색도 아름다웠고,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착용감도 편안했다.
결혼 생활이 그만큼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런 느낌이 드는 반지였다.
“음…….”
그런데도 마음에 자꾸 불편한 걸리적거림이 생겼다.
‘엘리엇이 너무 눈에 띄었어. 지금 당장 결혼하고 입적하려고 해도 잘될지 어떨지…….’
이게 다 에리히 탓이다. 애초의 계획은, 아무도 델포드 남작가 따위에 관심이 없다는 걸 전제로 세운 것이었으니까.
그때였다.
엘리베이터에 달아 놓은 종소리가 울렸다.
콩콩.
노크 소리에 뒤이어 호텔의 사환이 말했다.
“실례합니다, 델포드 남작님. 아래층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올 사람이 없었기에 클레어는 문을 열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사환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손님이 기다린다고 말할 정도의 평탄한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배인까지 나와서 막느라고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게, 저어……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께서…… 당장 안 나오시면…….”
그 뒷말을 하지 못하고 사환이 우물거렸다.
“하.”
클레어는 기가 막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