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넨호프 호텔의 9층 라운지는 아침에는 조식, 이후에는 티룸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그렇게 하라고 권한 것은 클레어였다. 고작해야 9층이지만, 이 시대에는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충분히 스카이라운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의도가 맞아 들어가 손님이 항상 있었다. 오늘은, 오늘따라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들어서자마자 클레어는 누가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인지 알 수 있었다. 한눈에 확 들어왔다.
옷차림도 화려하고 곁에 시중인이 셋이나 늘어서 있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포스가 있었다.
‘와, 관상.’
관상학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로 그린 듯이 악랄한 시어머니 상이었다.
주기적으로 커뮤에서 사진을 올려놓고 ‘이 남편인데 이 시어머니, 결혼한다 vs 안 한다’라는 제목으로 핫플레이스가 될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화려한 미인이었을 테고, 지금도 미인은 미인이었다. 원래 아침드라마에서는 악녀가 제일 예쁜 법이다.
클레어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라운지의 시선이 좌아악, 클레어에게 따라붙었다.
루이자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클레어는 그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는 것을 보았다.
루이자의 눈이 품평하듯이 클레어를 훑었다. 클레어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위빙 상단의 주인임에도 클레어는 정작 화려한 원단의 옷을 즐기지 않았다. 일할 때는 더더욱. 한국인은 모름지기 무채색이다.
머리에도, 목에도, 귀에도 보석 같은 것은 달지 않았다. 돈이 없거나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힘줄 때나 걸치는 것이었다.
루이자의 입초리가 슬쩍 비웃음으로 물들었다. 상대가 너무 시시했다. 제법 예쁘장하긴 하지만, 루이자의 기준으로는 평범했다.
그러나 클레어를 훑어본 눈이 손에 닿았을 때는 경직했다.
클레어는 약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얼핏 봐도 오묘한 색의 품위 있는 사파이어 반지였다.
루이자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자네가 델포드 남작 영애인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영애가 아니라 남작입니다.”
“흥, 고작 남작 따위가 뭐 별거라고. 그것도 남방 아렌 출신이.”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남작 영애 따위가 자신의 방문에 감읍하며 맨발로 달려 나오지는 못할망정, 지배인 따위를 시켜 감히 자신을 막다니.
[이 엘리베이터는 10층 객실 전용입니다.]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면서 말이다.
누가 누구를 기다리느냐 하는 것은 사교계의 아주 중요한 서열 다툼 중 하나였다. 자신을 여기에서 15분이나 기다리게 한 것부터가 클레어는 참을 수 없는 무례를 저지른 것이다.
심지어 응접실에 모신 것도 아니라 이렇게 평민들이 숱하게 오가는 장소에서 기다리라니.
있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루이자는 결혼한 후로는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앉아서 차 따윌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결혼하면 어차피 남편에게 돌아갈 작위가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루이자는 코웃음을 쳤다.
“제때에 제대로 된 상속자를 만들었다면 직접 물려받을 일이 없었을 것을. 적령기에 혼사도 치르지 못한 걸 부끄러워하지는 못할망정, 뭐 그리 내놓을 만한 일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지 모르겠군. 영애의 부모님이 불쌍해.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까?”
클레어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녀는 스스로 남작으로 불리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건 당연한 거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녀에게 물려준 것이었고, 그녀가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녀의 부모님은 맏딸을 괴짜라고 생각했지만, 상식에서 어긋나는 부끄러운 못난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똑똑하고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여겨 주었다.
클레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이 이상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 수 없었다.
루이자가 아이를 내놓으라며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다. 반대가 폭풍처럼 몰아닥쳐 에리히도 같이 닥쳐 주면 좋을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루이자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러자 루이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앉으라고 허락하지 않았네. 무례하군, 영애는.”
“대부인께서 저를 찾아오셨으니, 당연히 제가 주인이고 대부인이 객이지요.”
클레어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루이자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너, 진짜 싸가지가 없구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아, 진짜.
드라마의 레퍼토리가 늘 비슷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런 인간들은 도무지 창의성이 없었다.
“고귀하신 대부인께서 절 만나러 오신 데에는 아주 중요한 용건이 있으실 텐데, 그것부터 말씀하세요.”
“하.”
루이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내뱉었다.
“하긴, 혼전에 부끄럼도 모르고 몸을 더럽혀 자식까지 가진 천한 것에게 내가 뭘 바랄까?”
“그 말씀을 하시는 게 용건이신가요?”
배알이 뒤틀렸지만, 클레어는 참을 인 자를 마음속으로 하나 더 그렸다.
루이자가 여유로운 태도로 손짓했다. 하녀가 얼른 앞으로 나와 클레어 앞에 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요?
클레어는 의아하게 루이자를 바라보았다. 루이자가 오만하게 턱을 들고 그녀를 깔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사생아 같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클라우제너의 후계자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내 아들의 잘못이 없지 않으니 양육비는 적당히 챙겨 주겠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조용히 델포드에서 잘 키우도록 해.”
루이자가 계속 말했다.
“그런 시골구석이라면 아이도 상처받는 일 없겠지. 뭐 한다고 수도까지 올라와서 일을 시끄럽게 만드나?”
“…….”
클레어는 기가 막혀 잠시 말을 이루지 못했다.
확인해 보지도 않고 사생아 운운하는 건가.
그건 그렇다 치고, 쓸데없는 생각? 시골구석? 델포드가 어떤 곳인지 알긴 하는 건가?
뭐, 그렇다. 이곳 로텐부르크에서 보면 목화밭과 공장밖에 없는 시골이었다.
그러나 그 시골의 생산량을 못 이겨서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금고에 빨대를 꽂아 벨프 후작가로 연결해 놓은 장본인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이 사람, 내가 누군지 모르나?’
클레어는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들어 있는 것은 보석이 박힌 황실의 기념주화로, 5천 골드 정도의 값어치였다.
“아무리 계약금이라도 너무 약소하네요.”
“뭐?”
계약금이라니. 이 정도 돈이라면 시골 영애쯤은 충분히 떼어 내고도 남으리라 생각했던 루이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계약금 아니에요? 설마 이거 받고 떨어져라, 그런 말씀이세요?”
“양육비로 주는 거다.”
“아이 키우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고작 이걸로.”
클레어는 빈정거렸다.
“그리고, 이거 양육비가 아니라 뇌물이잖아요? 에리히 선배와 결혼하지 말란 의미로 주는 거 아니신가요?”
“뭐? 뇌물?”
“그러면 적어도 제가 공작 부인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의 세 배 정돈 일시불로 주셔야죠. 지위와 명예도 포기하고, 사생아를 낳은 미혼모로 남는 건데.”
“뭣!”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의 자리를 돈으로 환산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보지 못한 루이자가 경악한 소리를 냈다.
“올해 대부인께서 친정에 퍼다 주신 돈이 적어도 1천만 골드는 넘으실 것 같은데……. 걸치신 것을 보면 품위 유지비만으로도 5백만 골드 정도는 쓰고 계시겠죠?”
프라흐 상단에서 복사되는 돈을 생각해서 클레어는 추정치를 말했다. 이것도 꽤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었다.
그녀는 무심결에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루이자가 뒷목 잡고 넘어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1년에 1천5백만 골드는 쓰실 수 있다는 건데, 결혼 생활을 10년만 유지해도 1억 5천만이잖아요. 최소 5억 골드 정도는 되어야 수지가 맞겠는데요.”
“너……! 너, 이 무슨, 감히……!”
루이자가 호흡곤란을 일으킬 정도로 분노했다.
라운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은 전부 아닌 척 자기 잔만 쳐다보고 있거나, 서로 바라보지만 말없이 눈으로만 대화하거나, 먼 산을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신문 기사가 이걸로 뒤덮이겠다.
하지만 어차피 엿 된 거, 혼자 당할 수 있겠는가. 욱하는 것은 클레어의 나쁜 성미였다.
그녀는 다정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붉으락푸르락하는 루이자에게 말했다.
“저런, 대부인. 고혈압이 있으신가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이런 천한 것! 감히 클라우제너의 내실을 돈으로 계산해?! 너 따위, 아렌 남작 따위가, 감히 클라우제너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안 될 건 또 뭐겠어요? 에리히 선배가 5년도 넘게 저를 기다렸다는데.”
클레어는 다른 자리에서 에리히를 친근한 호칭으로 부른 일이 없었다. 에리히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좀 문제가 달랐다. 이왕 루이자의 복장을 뒤집은 거, 아주 창자를 꺼낸 다음 뒤집어서 다시 넣어 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대부인을 이렇게 뵙고 나니,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요.”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살림이 그렇게 큰데 대부인께서는 이렇게 친정 걱정에 여념이 없으시니, 에리히 선배가 계속 맡아 달라고 부탁드리지 못하고 저를 찾으시는 거지요.”
루이자는 분노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감히!”
그녀가 찻물을 뿌릴 기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건 아니겠지? 클레어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손목을 잡아 비틀면 큰일 날까? 피해자가 되는 게 낫겠다는 판단 같은 것에 앞서, 불행하게도 그녀의 운동 능력은 별 볼 일 없었다.
그때였다.
“그 손 가만두십시오, 어머니.”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자신의 말을 어기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루이자가 깜짝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그게 클레어에게 튀기 전에 에리히가 성큼 다가와 찻잔을 쳐 냈다.
“꺅!”
찻잔이 오히려 루이자 쪽으로 나동그라져서,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이모!”
에리히의 한 팔에 안겨 있던 엘리엇이 펄쩍 뛰듯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