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63)

16화

‘대특종!’

라운지에 죽치고 앉아 클라우제너 공작의 후계자라는 아이에 대해서 뭐 하나라도 캘 게 없을까 궁리하고 있던 기자들의 손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오늘 신문에 기사가 났으니, 차분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루이자가 가만있지 않을 줄 알았다. 그걸 기대하고 공작저에서부터 몰래 따라온 자도 있었다.

루이자가 호텔 라운지로 안내되었을 때부터 뭐가 됐든 하나 터지겠구나 했다. 근데 거기에 공작이 난입하더니, 심지어 똑 닮은 금발 머리 사내아이를 안고 있다?

문제는 이제 헤드라인뿐이었다.

《공작 대부인, 후계를 돈으로 사려 하다!》

《공작 대부인, 돈으로 뭐든 해결?》

《아내냐, 어머니냐?》

물론, 벌어진 사태보다 대화 내용에 주목한 기자도 있었다.

《계모는 계모일 뿐인가?》

《아들의 돈을 도둑질한 어머니》

《클라우제너에서 계모의 친정으로 흘러 나가는 금은보화》

어느 것이든 특종이었다.

라운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사각사각 펜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어찌나 맹렬한지 무슨 아카데미의 시험 치는 교실 같았다.

에리히는 그런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원래부터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익숙하기도 했다.

그가 나직하게 말하는 소리가 라운지에 울렸다.

“제가 손 그냥 두시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어…… 어…….”

루이자가 당황한 소리를 냈다. 클레어가 그에게 다가서며 큰 소리를 냈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예요? 손 괜찮아요? 여기 찬물 좀 갖다 줘요!”

그녀가 소리쳤다. 에리히가 말했다.

“별일이군. 네가 날 그렇게 신경 쓰다니.”

“손이 빨갛잖아요!”

“델 만큼 뜨겁진 않았다.”

에리히가 그녀에게 손을 보여 주고, 엘리엇을 넘겨주었다. 놀란 엘리엇은 울기 직전이었다.

클레어는 엘리엇을 받아 안았다. 뒤늦게야 호텔 종업원이 찬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고맙군.”

에리히는 짤막하게 말하고 대야에 손을 담갔다.

루이자의 하녀들에게도 타월이 건네졌다. 루이자는 찻물이 옷자락에 튄 정도였기에 하녀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닦아 냈다. 그래도 값비싼 드레스에 얼룩이 생기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루이자는 충격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리히가 설마 자신에게 그럴 줄은 몰랐다.

친하지는 않아도, 항상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해 왔으니까. 설마 찻잔을 자신 쪽으로 쳐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시에, 클레어의 말을 들었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루이자는 자신이 얼마나 돈을 쓰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원래부터 쓰는 돈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성미가 못 되었다. 몸에 걸친 것의 금액, 그중에서도 각별히 자랑할 만큼 값진 것이나 기억했다.

하지만 그녀가 듣기에도 수천만 골드는 금액이 컸다. 에리히는 이미 무용한 사업에 돈을 댈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에리히가 그녀를 바라보고 냉한 목소리를 냈다.

“제 사생활에 굳이 관심 갖지 마시라는 말씀을 이미 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 그렇지만, 나는 네 어머니 아니니. 의붓어머니라고 해서 그렇게 무시하는 거니? 다른 문제도 아니고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후계자가 달려 있는 혼사인데 어떻게!”

말하다 보니 억울해져서 루이자는 언성을 높였다.

에리히가 클레어에게 눈짓했다. 아이가 들을 만한 대화가 아니었다.

클레어는 어쩔 줄 모르는 엘리엇을 지배인에게 부탁해서 위층으로 데리고 올라가게 했다.

에리히의 마음으로는 그녀까지 이 자리를 떠났으면 싶었지만, 클레어는 눈짓 몇 번으로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루이자를 바라보았다.

“후계자가 달려 있다면, 더더욱 어머니가 관여하실 바가 못 됩니다.”

“뭐?”

“전 제 아이와 여자를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그런 무책임한 남자가 아닙니다. 클레어가 받아들여 준다면, 당장에라도 결혼할 생각입니다.”

잠시 펜 소리까지 멈췄다가, 곧 종이를 찢을 기세로 맹렬하게 사사사삭 소리가 났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루이자가 반발하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에리히가 그 전에 대야에서 손을 빼서 가볍게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루이자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이기는 하지만, 어머니 노릇도 에리히의 허락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공개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숨을 죽였다. 이제 펜 소리도 나지 않았다. 클라우제너 공작의 위엄 앞에서 펜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업원이 한 박자 늦게야 황급히 수건을 내밀었다. 에리히는 그것으로 손을 닦고 나서 클레어에게 내밀어 보였다.

클레어는 그 손을 잡아서 뒤집어 보았다. 붉은 기가 거의 가신 것으로 보아 화상은 아니었다.

“다행이긴 한데, 안 그래도 됐어요.”

“내 집안사람이 네게 해를 끼치려 한 것이니,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지. 미안하다.”

그 말에 몇 사람이 흡, 소리를 냈다. 에리히 클라우제너는 그렇게 쉽게 사과를 입에 담을 위치가 아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여긴 또 무슨 일이냐든가, 그놈의 책임 참 많기도 하다는 비난이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고마워요. 맞아도 어차피 옷에 튈 거라서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넌 꼭 한마디가 더 많아.”

그녀가 손을 빼려는데, 에리히가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잡아 버렸다.

클레어는 눈을 굴렸다. 이제 퇴각할 때인데.

“이 손 좀 놔줄래요? 그리고 여기서 아이 이야기는 하면 안 돼요.”

그녀는 발끝을 조금 들고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사람의 귀가 이렇게 많은 곳이다. 오늘은 무조건 호외가 뜬다.

이미 나온 신문 기사만으로도 이미 타격이 컸다. 엘리엇이 상처받을지도 몰랐다. 그나마 아직 신문은 어려워서 못 읽으니 다행이지.

입적이고 뭐고 일단 중지하고 델포드로 돌아가, 소문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나도 그 정돈 알아.”

에리히도 대뜸 ‘내가 네 아빠다’라고 들이댈 작정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충격을 줄 수는 없으니까.

클레어가 아이를 데리고 손에서 빠져나가려 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그녀가 바라는 대로 처사할 작정이었다.

클레어가 다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 좀 놔요. 나 이제 그만 올라가 봐야겠어요. 오늘 일은…… 흑.”

에리히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바닥에 키스했다. 깜짝 놀란 클레어의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갔다.

“뭐 하는 거예요?”

클레어가 낮은 목소리로 화를 내며 다시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손을 다시 뒤집어 보고는 약지에 끼인 반지를 보았다.

그는 그 반지를 빼냈다.

“뭐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클레어도 큰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는 반지를 한 번 앞뒤로 뒤집어 보고는 물었다.

“아끼는 건가?”

“선배랑은 상관없잖아요.”

“왼손 약지에 낀 반지인데 왜 상관이 없어?”

에리히는 클레어가 장신구를 잘 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 아끼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것을 던져 버리는 대신에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고, 대신 자기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클라우제너 가문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인장 반지를 뺐다.

클레어는 도주를 고려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뒤돌아서 내빼기 전에 에리히가 다시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생각해 보니 정작 중요한 절차를 빼먹었군.”

“잠깐, 선배, 하지 마요.”

“왜? 안 될 것도 없다며? 못 할 게 없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나?”

“지금 웃어요?!”

클레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리히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준비한 반지가 없군. 이걸로 참아.”

“인장 반지가 더 심각하죠!”

클레어는 힘껏 손을 빼냈지만, 에리히의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거절은 네 맘이지만, 구혼은 내 마음이지. 나와 결혼해 주겠어?”

그가 클라우제너 가문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인장 반지를 클레어의 약지에 끼웠다.

“와아아!”

누가 시작한 건지, 환호성이 울렸다.

“축하드립니다!”

“허락하세요! 허락하세요!”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런 순간을 목격하다니!”

라운지가 한순간에 무슨 결혼식장이라도 된 것처럼 기쁨의 비명으로 뒤덮였다.

특종 호외를 누구보다도 빨리 내보내기 위해 기자들이 질풍처럼 뛰쳐나갔다.

“축하드립니다, 델포드 남작님!”

이건 확실히 아는 목소리였다. 호텔 지배인이었다.

클레어는 어지러워서 고개를 털었다. 그야 청혼 자체는 남자 마음이었다. 날을 잡고 나서 이벤트 프러포즈를 하는 세상이 아니니까.

“돌았어, 진짜.”

클레어는 휘청거렸다. 에리히가 일어서서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감으며 말했다.

“이왕 결혼할 거라면, 내가 매달렸다는 소문을 크게 내는 게 낫지.”

“선배가 매달린 거 맞거든요? 인장 반지로 구혼이라니, 미쳤어요? 사람들 다 쳐다보고 있는 거 알면서?”

“무슨 소리. 네가 먼저 한 일에 쐐기를 박은 것뿐이다. 내가 청혼 안 했다고 소문이 덜 나거나, 더 좋은 방향으로 날 리도 없고?”

그건 사실이었다.

에리히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비록 5년 전에 실수는 했을지언정…… 생각 없이 이러는 것도 아니고. 이걸 준 건 진짜야.”

그가 헐렁해서 클레어의 약지에서 빠지려는 반지를 도로 끼워 넣으며 손등에 키스했다.

“클라우제너를 통째로 가져. 기꺼이 네게 주지.”

“내가 열 받아서 가문을 조각조각 내서 팔아치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네가 그럴 리가. 일단 손에 들어온 건 아끼는 성격이잖아.”

에리히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기 드문 다정한 웃음에 클레어는 잠깐 이성을 놓을 뻔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입술이 다가왔다. 클레어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불행하게도 에리히는 아주 키스를 잘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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