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63)

17화

6. 이 남자들 왜 이래

클라우제너 저택은 일견 조용했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랬다.

저택의 주인보다 소문이 먼저 귀가했다. 공작가의 사람들에게는 아이 소식보다 청혼 소식이 더 충격적이었다.

에리히는 이제 곧 나이 서른이 될 남자였다. 실수로든 뭐로든 생긴 아이가 어디서 드러나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평민들도 드나드는 호텔 라운지에서, 아렌 지역 남작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인장 반지를 빼서 청혼했다는 것은 확실히 경악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 반지는 가문의 공식적인 인장이다.

편지 한 장을 보내기 위해 심부름꾼이 말을 타고 달리던 시대에는 발신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세공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복제 가능하기에 그보다 중요성이 덜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문의 모든 문서에서 가주의 서명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인장 반지에 들어가는 완전한 가문의 문장은 가주만이 사용 가능했다. 가주가 죽으면 녹이는 것이 관례였다.

에리히의 인장 반지는 7년 전, 그가 클라우제너 공작의 작위를 계승할 때에 만들어졌다. 그 뒤로 한 번도 그의 새끼손가락을 벗어난 일이 없었다.

그것을 낀 공작 부인이 들어온다. 그건 상대가 남작가 출신이라는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

고용인들에게 그 사실 자체가 큰일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랫사람이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에리히는 고작해야 고용인들이 자신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용납하는 성격이 아니다.

권할 수 있는 건 그날의 점심을 새고기로 할 것인가, 소고기로 할 것인가 정도였다.

문제는 대부인이었다.

“마리아! 마리아!”

두려움에 사로잡힌 내실의 공기를 뚫고 들어가며 루이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녀 마리아가 달려 나왔다.

“대부인, 오늘 외출은…… 꺅!”

루이자가 그녀에게 모자를 집어 던지고, 이어서 구두와 팔찌를 벗어 던졌다. 그다음에는 복도의 협탁에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마리아가 웅크리고 앉아 굴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멀찍이 둘러싸고 있던 하녀들은 달아나거나 마리아처럼 같이 무릎을 꿇었다.

“너! 내가 그 사생아라는 애새끼 이야기 알아 오라고 했어, 안 했어?!”

“죄송합니다!”

마리아는 겉으로 알 수 있는 사연까지는 모두 알아내어 루이자에게 이미 알렸다.

아이가 델포드 남작가의 도련님이라는 것.

클레어가 아카데미 시절 에리히와 같은 지도 교수에게 총애를 받아 같은 연구실에 드나들었다는 것과 델포드 남작의 작위를 직접 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둘 다 여자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 이상 사적인 관계에 대해서 알아내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사 부탁한 것을 듣지 않고, 신문을 보고 격분해서 뛰쳐나간 것은 루이자였다.

“그 델포드 남작 영애라는 년, 대체 뭐 하는 년이야? 어떻게 내가 쓰는 돈의 액수를 알아? 네가 장부 유출시킨 거 아니야?”

“아니에요, 대부인! 제가 어떻게 감히!”

“아니면, 너야?”

루이자가 활활 불타는 눈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몸종을 노려보았다. 몸종이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저 같은 게 마님께서 쓰시는 금전의 내역서를 알고 있겠어요? 마님, 마님! 용서해 주세요!”

“그럼 누구야!”

수치스럽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돈 몇 푼에 자신이 클라우제너 공작가를 망칠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는 시선들이나, 나름대로 큰마음 먹고 준비해 간 주머니를 계약금 수준이라고 비웃음당한 것도.

에리히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연스럽게 명령한 것도.

감히 자신에게 눈 똑바로 뜨고 대드는 그 건방진 계집애 그 자체도!

루이자가 분해서 눈물을 터뜨리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가신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로군요, 루이자 님.”

“아.”

복도로 나온 것은 고동색 고수머리를 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는 요한 크로지크라는 이름으로, 크로지크 백작가의 삼남이었다.

크로지크 백작가는 제국의 지배 가문 중 하나인 에른스트 공작가의 친척이었으며, 비록 방계였지만 품위는 충분했다.

루이자는 이 아름다운 청년과 남편에게 말하기 어려운 종류의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루이자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하며 귀족적인 최고의 조언자였다.

정부는 아니었다. 선을 넘은 적은 없었으니까.

루이자는 그저 그의 아름다움과 친절함에서 기쁨을 느끼고, 싸늘한 양아들에게 하기 어려운 상담을 하고, 대화를 즐길 뿐이었다.

루이자는 이것저것 엉망으로 집어 던지고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불현듯 부끄러워졌다.

“와 있었어?”

“오후의 소문과 함께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신문 기사에 하도 억측과 헛된 소리가 많아서, 마음이 상하셨을까 봐 달려왔습니다. 이미 외출하셨더군요.”

“부끄럽네.”

루이자는 머리를 다듬듯이 쓸어 올리며 말했다.

하녀가 서둘러 그녀에게 슬리퍼를 가져다주었다. 루이자는 거기에 발을 꿰었다.

요한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팔을 내밀었다. 루이자는 얌전히 그 팔을 잡고 내실의 투왈렛 룸 쪽으로 향했다.

요한이 말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심려가 크시겠군요.”

“말이 안 되잖아. 남작 영애라니, 그것도 남방 아렌 출신이라니. 거기에다가 그 에리히가.”

“아카데미 동기들은 다들 납득할 겁니다.”

“그래?”

루이자는 깜짝 놀라 요한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스물여덟 살이니, 에리히와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에 다녔을 것이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소문 정도는 들었죠. 클라우제너 공작님은 워낙 항상 대단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델포드 남작 영애는, 그 당시에 그녀 자신이 유명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작님과 대화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죠.”

클라우제너의 소공작이 복도에까지 들리게 언성을 높였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백발백중 상대가 델포드 남작 영애였다.

‘그러고 보니 안색 하나 안 변하고 맞서고 있었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외에는 신경 쓸 만한 부분이 없었다.

클레어는 성적은 보통, 평판도 보통. 놀랄 만큼 모든 게 보통이었다. 괴짜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도 친한 사람들끼리나 하는 이야기고, 어째서 에리히가 그렇게 그녀에게 자주 말을 거는지 아무도 몰랐다.

요한은 최근에 다시 그 이름을 듣고는 에리히의 안목에 놀란 바가 있었다.

“그녀는 위빙 상단의 주인입니다.”

“뭐?”

루이자가 눈을 크게 떴다.

요한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일개 남작가에서 그 정도 부를 일궈 낸 것이 대단했지만, 그뿐이다.

루이자나 벨프 후작가와 새 공작 부인이 싸우게 되리라는 것도 그의 주인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봤자 공작가 내부의 싸움에 불과하다.

요한의 주인이 마음 쓰는 것은 델포드 남작이 아렌 귀족이라는 점이었다.

3대 전, 북방 로멜 제국과 남방 아렌 왕국이 국혼에 의하여 병합할 때에 생겨난 계승법에 따라, 황위 계승권은 로멜과 아렌의 결합에 의해 태어난 자손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된다.

에리히 클라우제너는 제4위 황위 계승권자였다. 그의 생모는 2황녀였다.

선황후 헨리에타 아렌 소생의 황태자가 시해된 이래, 제1위 황위 계승권자는 황제의 손윗누이 빅토리아 대공이었으나, 그녀는 미혼이고 이미 연로하다.

그다음은 현 황후 에른스트 공녀의 소생 리누스 황자였지만, 로멜과 아렌의 결합이라는 조건에 어긋나서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 에른스트 공작가는 전통 있는 로멜의 대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만일에 에리히가 델포드 남작과 결혼한다면, 그 아이는 상당히 높은 순위의 계승권을 갖게 될 것이다.

귀천 상혼이 우선인지, 계승법이 우선인지 논란이 되리라. 직계가 우선인지, 계승법이 우선인지도.

‘황후 폐하께서 심려가 크시겠군.’

요한은 내심으로 생각했다.

루이자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의 주인은 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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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넨호프 호텔의 3층에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을 만들어 준 공작 각하의 마차가 당도했을 때, 지배인은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 나갔다.

모든 일이 지금 당장 호텔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자들은 기러기 떼처럼 덤벼들었고, 종업원들 입단속을 하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호텔 이름이 자주 오르내릴 기회는 흔치 않았다. 돈다발을 줘도 못 할 광고였다.

하물며 거기에 클라우제너 공작과 함께 엮여 이름이 오르다니.

“어서 오십시오, 각하.”

지배인은 손수 마차 문을 열고 고개를 땅에 닿도록 숙였다. 에리히는 마차에서 내렸다.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델포드 남작이 뭐라고 하지는 않던가?”

“이넨호프 호텔은 델포드 남작가 소유는 아닙니다, 각하. 물론 남작님께서는 저희 호텔의 가장 귀한 손님이시지요.”

지배인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이넨호프 호텔은 위빙 상단에게서 적지 않은 투자를 받고 있었고, 클레어에게 충성스러웠다. 일개 호텔 지배인 따위가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을 가로막는 것에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클라우제너 공작님 본인은 달랐다. 그를 막으라고 특별히 지시가 내려온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결혼하시면 남작님의 부군.’

장난감을 수레째로 실어 나르며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그가 왜 거절하겠는가?

공작님께서 아드님을 위해 하는 부탁이다. 호텔 지배인은 망설이지 않고 넓은 응접실 하나를 투자했다.

“이 호텔에서 5년 이상 근속한 직원 중에서도 입 무거운 사람만 골라, 항상 한 명 이상이 아이들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수고했네.”

에리히는 가볍게 치하하고 지배인이 안내하는 대로 3층으로 향했다.

와글와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지배인이 문을 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거의 열댓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내가 바로 이 산채의 두목이다!”

엘리엇이 나무로 만들어진 장난감 성 위에서 칼을 들고 소리쳤다.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를 발견한 엘리엇이 신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저씨다!”

아이가 장난감 칼을 거침없이 던져 버리고 그에게 달려와 두 팔을 벌렸다.

선물의 효과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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