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에리히는 자연스럽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엘리엇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아저씨, 고마워요!”
“음…….”
그는 어색한 기분으로 어중간하게 대답했다. 가슴 안쪽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스스로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것이고, 아끼며 양육하리라. 그건 당연한 일이고 의무였지,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친척 조카가 특별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일도 없었다. 사실 아이들은 그를 퍽 어려워했고, 주위에서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로멜 귀족답게 예의를 지키도록 주의를 주곤 했다.
엘리엇이 사랑스러운 것은 저와 클레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허물없이 웃고 태연하게 안겨 드는 천진한 천성 때문일까?
로멜인들은 흔히 아렌인이 경박하고 혈기 넘치며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에리히는 지역에 따른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엇의 이 거침없는 포옹을 받고 있자니, 역시 타고나는 차이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교육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클레어가 설령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어도, 그녀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며 키웠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엘리엇의 순수한 감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게 사 준 것이 아니다.”
에리히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아무렴. 절대 아니다.
클레어는 아이에게 지나친 선물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에리히는 장난감 가게의 물건을 통째로 사서 호텔에 기증했다.
곧, 이것은 모두 엘리엇의 것이 아니라 이넨호프 호텔의 재산이다. 단지 숙박객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일 뿐이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똑같은 장난감 가구들을 모두 한 세트씩 새로 만들어 델포드로 보내라고 말했지만, 그것도 아직 준 것은 아니니까 괜찮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아는 것처럼 엘리엇이 까르르 웃었다.
“알았어요.”
“……클레어가 많이 화내던?”
에리히는 딱히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거렸다.
“화내진 않고 코웃음 쳤어요. ‘허! 흥!’ 이렇게요.”
엘리엇의 흉내는 진짜로 그럴듯했다. 에리히는 크게 웃는 버릇이 없었으므로 미소만 지었다.
“아저씨는 이모 보러 왔죠? 가요.”
“아니야. 나는 널 보러 왔다.”
“거짓말하면 안 돼요.”
엘리엇이 훈계조로 말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사실인데.”
“모두 말하고 있는걸요? 아저씨가 이모를 좋아한다고요.”
“음…….”
에리히는 조금 난처한 기분으로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소문 나라고 한 일이긴 했지만, 아이를 걱정하는 클레어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었다.
엘리엇이 소문의 중심이 되지 않도록 마음 쓰고 있었지만, 솔직히 아이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저씨, 진짜로 우리 이모랑 결혼할 거예요?”
“싫으니?”
지난번에는 자기 이모라고 화를 내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에리히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아저씨 좋아해요.”
에리히의 귀에 그 말은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말과 정확히 동의어였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좋아진 채 말했다.
“다 놀았으면, 아저씨랑 뭔가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이모 보러 가실 거 아니에요?”
“나는 널 보러 온 거라고 했는데?”
엘리엇이 눈을 둥글게 떴다.
“그치만 먹을 거 사 준다고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
“호텔 밖으로만 안 나가면 되지. 아니면, 유모를 불러오면 어떠냐?”
“진짜요? 그럼 저 핫초코 먹어도 돼요?”
“클레어가 금지한 게 아니라면.”
“괜찮아요! 유모가 허락하면 먹을 수 있어요!”
엘리엇이 내려 달라고 버둥거렸다. 빨리 달려가서 유모를 불러올 모양이었다.
“데려다주마.”
에리히는 엘리엇을 한 팔에 안은 채로 말했다. 아무리 호텔 안이라고 하지만,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문을 열자 놀이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호텔 종업원 둘 중 하나가 따라왔다. 엘리엇에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도록 잘 보살피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들은 키가 큰 남자와 마주쳤다.
“아, 그레이다.”
엘리엇이 약간 부끄럼을 타며 말했다.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변호사가 여기에는 무슨 일인가. 클레어를 방문하려는 거라면 3층에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엘리엇에게 용건이 있을 리 없었다. 단순한 법률 고문이라면.
그가 차가운 시선을 던지자 그레이는 감정 없는 묵례로 대응했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아저씨, 나 내려 줘요.”
두 사람이 맞부딪치는 껄끄러운 공기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엘리엇이 다시 온몸으로 내려 달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에리히는 몸을 숙여 엘리엇의 발이 살짝 땅에 닿도록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유모한테 갔다 올게요.”
엘리엇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에리히는 호텔 종업원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시선을 들었다가, 비켜선 그레이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엘리엇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엔 어쩐 일인가?”
에리히가 대치 상태를 먼저 깨고 물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불쾌해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법률 고문은 법률 고문일 뿐이다. 주인의 온갖 비밀에 함께하고, 또 종종 친밀한 사이가 되지만, 그래 봤자 고용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신경 쓰였다. 그레이가 키가 크고 늘씬하며, 능력과 교양과 지성을 겸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매력적인 외모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변호사에게 당연히 필요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는 단순한 법률 고문일까?
경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선대 델포드 남작의 후원으로 학업을 마쳤고, 그 뒤에 쭉 델포드 남작가의 법률 고문이었다는 것도, 수도에 있는 사무실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렇다는 건 클레어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에리히는 클레어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불쾌감을 내리눌렀으나 질문은 위압적인 태도로 하고 말았다. 에리히는 그 사실을 의식하며, 의식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레이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는 감히 에리히와 같은 눈높이를 유지한 채로 되물었다.
“제가 여쭐 말씀입니다. 각하께서는 불한당처럼 행동하고 계시는군요.”
“뭐?”
“일부러 소문을 부추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클레어가 곤란해하리라는 것을 아시면서 말입니다.”
에리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자네는 고용주를 이름으로 부르나?”
“그건 저와 클레어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레이는 미동 하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각하께서 발생시키고 있는 문제는 실질적인 위협이지요.”
“그거야말로 나와 클레어의 개인적인 문제일세.”
“각하께서 신문사에 보도지침을 내리셨는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문제입니까?”
에리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레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신문사 여섯 곳을 방문하여 확인했습니다. 엘리엇 님을 화제의 중심에 올리지 말고, 클레어를 비난하지 않는 선에서 기사를 쓰라고 하셨다고요.”
“보도를 요구한 게 아니라, 과열되어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요구한 것이네.”
“그렇게 철저하게 지침을 지키도록 할 수 있었다면, 쓰지 말라고 요구하실 수도 있었겠지요.”
사실이었기 때문에 에리히는 그레이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클레어의 변호사로서 내게 경고하는 것인가?”
“아니요. 델포드 남작가의 가신으로서, 만일의 경우 엘리엇 님의 후견인이 될 사람으로서 이 모든 문제를 염려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은 그저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레이가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얼마나 대단한 귀족이신지는 알고 있지만, 숙녀의 약점을 공격하여 결혼 승낙을 얻어 내려 하는 자는 신사라고 할 수 없죠.”
그렇게 말하는 그레이의 말씨와 태도는 그 출신 성분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우아하고 침착하며 신사다웠다.
에리히는 그렇게 평정을 지킬 수 없었다. 그레이의 말에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그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그래. 체면 따위를 지키고 신사답게 구느라 놓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
“그래서 몰이사냥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이런 짓을 하십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지, 셔우드? 이건 나와 클레어의 문제야. 클레어가 고소라도 하겠다면 그때 나서. 일개 가신 따위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제 문제이기도 합니다. 숙녀에게 구혼하고서 그 위기를 돌보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뭐?”
“저는 각하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에리히는 그 순간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대신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거기에는 사파이어 반지가 들어 있었다. 돌려주러 온 참이었다.
그게 누구 것인지 이제 그는 알 수 있었다. 클레어가 그것을 약지에 끼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부러 무시했다.
고운 상자에 담아 오게 하려다가 어색해서 그만두었는데, 잘한 일이었다. 딴 놈의 반지 따위를 곱게 포장해 돌려주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보란 듯이 반지를 꺼내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레이의 안색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