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이렇게 섣부른 짓을 하시다니, 셔우드 씨답지 않다 싶어서요. 아래층 라운지 로비에 법률 사무소 사람이 와 있습니다.”
그레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괜찮겠어?”
“내일 편지 드리겠습니다.”
“그래.”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저가 그에게 재킷을 빌려주려 했지만, 그 전에 집사가 다림질된 겉옷을 가지고 왔다.
그레이가 나가고 나자 클레어도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로저가 물었다.
“도련님은 좀 어떠십니까?”
“그냥 놀라서 운 것 같던데. 괜찮아. 그보다, 할 이야기가 더 있어?”
“그냥 좀 되어 가는 상황이 궁금해서요.”
“궁금?”
“남작님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고 싶진 않으니까요.”
“사교계에서 제일 소문에 밝은 인기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남작님은 절 좀 믿으셔야 합니다.”
클레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머금었을 때였다.
호텔 종업원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델포드 남작님. 클라우제너 공작님께서 곧 올라오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로저가 잠깐 뺨을 긁적거리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물러갔다.
혼자가 된 클레어는 전투력을 끌어 올렸다.
7. 결혼 협상
에리히는 짧은 시간에 꽤 정돈된 차림새를 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호텔 측이 급히 마련한 셔츠는 가슴 부분이 약간 끼어 단추를 하나 풀었고, 그것 때문에 타이는 느슨하게 매어져 있었다. 베스트는 허리가 조금 남았다.
언제나 단정하고 깔끔하게 넘기고 있는 금발도 젖어서 빛깔이 진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에리히가 전투적인 태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았다.
“도망은 가지 않았군.”
“뭐라고요? 여긴 내 숙소예요. 내가 도망을 왜 가요?”
클레어는 발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뭐라고 이야기를 시작할지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었는데, 전부 한순간에 날아가고 뱃속에서 전투력이 솟구쳤다.
“선배야말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엘리엇은 괜찮나?”
“그거 말고요. 사과할 마음은 없어요?”
에리히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사과할 게 없는데? 나는 널 얻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했을 테니까.”
“뭐요?”
클레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에리히는 그레이가 말한 ‘몰이사냥을 했다’라는 말에 대해 부연한 것이지만, 그 대화를 모르는 클레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주먹을 휘두른 걸 사과하란 말이에요!”
“그건 확실히 미안하군. 엘리엇을 겁줄 작정은 아니었어.”
에리히가 팔짱을 풀고 퍽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지. 엘리엇에게도 나중에 따로 사과하고.”
“나한테 하라는 게 아니었어요. 피해자가 따로 있잖아요.”
“호텔 측에도 적절한 보상을 하기로 했어.”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면서 그러는 거죠?”
“델포드의 법률 고문에게는 사과 안 해. 네 명민한 지성은 어디로 간 거야, 클레어? 상황을 잘 이해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상황을 이해 못 했다고요?”
“주먹을 먼저 휘두른 건 그놈이야.”
“말도 안 돼. 그레이가 얼마나 점잖은 사람인데. 보나 마나 선배가 먼저 그러도록 시비를 걸었겠죠.”
“그게 바로 네가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증거지. 여자 하나에 구혼자가 둘. 주먹질하는 것에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에리히가 몸을 숙여 클레어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짚었다.
그의 몸 아래 갇힌 듯한 자세가 된 클레어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물 냄새와 비누 냄새가 그의 체취와 섞여 코를 간질였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긴장과 열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진정하려고 심호흡하려 했지만, 그랬다가는 숨결이 섞일 만큼 얼굴이 가까웠다.
클레어는 들키지 않게 호흡을 고르고, 그의 눈에 띄지 않을 것을 믿고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그리고 평정을 지키며 말했다.
“그레이는 피해자예요. 안 그래도 내 계획 때문에 결혼하자고 했다가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하게 됐으니, 내가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라고요.”
“진짜로 그놈이 순수하게 네 계획에 장단 맞추느라 반지를 줬다고 생각한 거면 순진한 거지.”
“…….”
클레어는 할 말이 없었다.
에리히는 그녀의 위에서 비켜날 생각도 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나와 결혼할 결심은 굳힌 모양이로군.”
“좋아서 하자는 거 아니니까 착각 말아 줄래요?”
“…….”
“지금 키스하면 죽여 버릴 거야.”
에리히의 몸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클레어는 그의 입술에 검지를 대고 밀어냈다.
“그 전에 우리, 마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지 않아요?”
“무슨 이야기?”
“델포드에 조사원을 보냈을 거 아니에요. 아직도 안 돌아왔어요?”
그 말에 에리히의 상체가 쓱 뒤로 밀려났다. 그러나 여전히 클레어의 의자 팔걸이에 짚은 손은 치우지 않았다.
클레어는 간신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누 냄새와 물 냄새가 섞인 에리히의 체취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돌아왔죠? 아직도 우길 거예요?”
“…….”
에리히는 침묵했다. 그녀의 동생이 임신했었다는 게 꼭 그녀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같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하지 않을 눈치는 있었다.
그 머릿속까지 읽고 만 클레어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뭐, 좋아요. 남들한테 그런 식으로 변명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건 오히려 나쁘지 않네요.”
“클레어.”
“선배가 그러는 건 좀 어이없고. 날 알잖아요. 물론 내가 아이가 있었어도 밝히지 않으려고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 말에 에리히가 그것 보라고 욱했다.
“지금 선배가 귀찮게 굴고 있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말이에요.”
클레어가 그의 가슴을 검지로 밀어내듯 꾹 찔렀다.
“아무튼 내가 이미 들통 난 다음에 되지도 않을 거짓말을 우겨 댈 사람은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도망갈 정도로 싫은 상대에게라면, 그럴 수도 있지.”
클레어가 잠깐 침묵했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싫다는 여자를 잡겠다고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선배 때문에 도망간 건 아니었어요. 애당초 내가 거기서 도망을 왜 가요? 고작 한 번 잔 걸 가지고.”
그 말에 에리히의 미간에 고랑이 패었다.
클레어는 그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그녀는 손수 문단속을 새로 했다. 거실에 연결된 문을 모두 열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빗장을 지르고, 다른 문도 모두 잠갔다.
그다음에 엘리엇을 위해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작은 액자를 가지고 왔다.
에리히는 순순히 그녀가 건네주는 액자를 받았다.
그 안에는 금발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예쁜 소녀가 있었다. 클레어와는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내 동생이에요. 걔는 엄마를 닮았고, 전 아빠를 닮았죠. 엄마의 외가 쪽에 로멜인의 피가 섞여 있어요.”
“그렇군.”
“그 애한테는 아카데미에서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에리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두었나?”
“결혼한다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닌데 뭘 어떡해요? 흔한 일이잖아요.”
그건 그랬다.
결혼 시장 밖에서의 만남은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교내 연애는 아예 금지였지만, 그래도 한창나이의 소년 소녀들을 한 장소에 모아 놓았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리 만무했다.
“누군지는 몰랐어요. 상대가 신분이 높아서 비밀이라고 했죠.”
“쓰레기군.”
“말조심하세요. 내 동생의 남자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집에 갔는데 그 애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어요.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고 하더군요. 들키면 모두 죽을 거라고도.”
에리히는 그때까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듣고 있었다.
클레어가 동생을 몹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만나 본 적 없는 상대였다.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 그에게도 클레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봤다는 게…….”
“남자 친구가 죽었다고 했어요. 바로 그날. 그리고 동생은 그 남자 친구의 아이를 낳았죠. 그날 자기들끼리 무슨 언약식 같은 걸 했던 모양이에요.”
에리히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죽은 몇 명의 젊은 귀족 중 누가 그 죽은 남자 친구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으리라.
죽은 제러드 황태자는 그와 사촌이라기보다는 친형제처럼 닮았다.
그리고 제러드는 소탈한 성미였다. 신분을 숨기고 자주 황궁 밖으로 외출하여 호위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밖에 여자친구가 있었어도 놀랄 것이 없었다.
그것이 하필 클레어의 여동생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