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클레어가 말했다.
“저는 이 비밀을 혼자서 무덤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어요.”
“역시 그때 나한테 왔어야 했어, 클레어.”
“아뇨. 그래 봤자 엘리엇이 위험해지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았겠죠.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잖아요. 황태자조차 죽었어요.”
“그러면 엘리엇의 권리는?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엘리엇은 이제 다섯 살도 안 됐어요. 설령 엘리엇이 결정할 일이라고 해도, 그 애가 성인이 된 다음에 알려줄 작정이었어요.”
그 말 할 줄 알았다며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혈통과 가문의 상속권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고, 에리히 같은 대귀족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엘리엇의 권리를 찾자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선배가 가문과 혈통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클레어는 차분하게 말했다.
“전 엘리엇을 멀리 보낼 생각도, 포기할 생각도 없어요. 제 아이예요. 낳지는 않았지만, 태어났을 때부터 제 손으로 키웠어요. 선배가 이 점을 확실히 알아 뒀으면 좋겠어요.”
“……그래.”
“나머지는 내가 무슨 이야기 하려는 건지 다 알고 있죠?”
“이해했어.”
비밀연애였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상대까지는 몰랐어도 제러드에게 교제 중인 여자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 자들이 있었으리라.
아이의 얼굴이 정황 증거가 된다.
사생아로 만들든가, 제대로 인정하여 클라우제너의 장남으로 만들든가.
어쨌든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 이상 엘리엇은 반드시 위험에 처한다.
“자업자득이니까 참아요.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선배 본인이니까.”
클레어가 말했다.
“물론, 엘리엇을 장남으로 인정해서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로 삼아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출생을 모호한 상태로 놔둔 채 입양이라는 형식을 거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양가가 합의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다행히 클레어는 자기 가문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고, 에리히에게도 친척들을 누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입양아의 상속권은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보다 밀리니, 클라우제너 가문의 후계 문제에 걸리적거리지는 않을 거예요. 적당한 때에 이혼하면서 상속권을 박탈한다거나 하면 문제없겠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잊힐 것이다. 그때 가서 화제는 부부의 진흙탕 싸움 쪽으로 집중시키고, 엘리엇의 출생 문제를 다시 한번 논란거리로 삼아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그런다 해도 의심 갖는 자는 있겠지만, 그때쯤에는 황실의 후계 문제도 결정되었을 테고, 죽은 제러드 황태자도 완전히 잊혀 있으리라.
엘리엇에게 출생 문제는 계속 따라다닐 테지만, 지저분한 말을 듣는 쪽이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엘리엇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클레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역시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선배한테 흠을 만들게 되는 일인 건 알아요. 난 진짜 이렇게 되는 거 피하려고 애썼다고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안 믿고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잖아요. 저지른 짓에는 책임을 져 준다면서요?”
“그게 아냐. 왜 이혼으로 끝을 맺으려고 하지?”
“말했잖아요. 엘리엇은 선배 아이가 아니고, 클라우제너의 후계 문제를 깨끗하게 마무리하려면…….”
“내가 이혼하려고 결혼할 사람처럼 보이나?”
“청혼은 엘리엇이 선배 아이라는 착각 때문에 이루어진 거잖아요.”
에리히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클레어는 진정하라고 손짓했다. 에리히가 다시 그녀의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선배가 가문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배려하고 있는 거라고요, 지금.”
“가문을 잇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숙녀의 명예를 지키고 아이를 보호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조차 내가 모를까 봐?”
그 말은 조금 가슴을 울렸다. 클레어는 피시식 웃으며 에리히의 뺨에 손을 올렸다.
“말도 안 돼. 명예를 지켜 주고 싶었으면 손도 대지 말았어야죠. 그게 일반적인 신사의 의무 아니에요?”
“나를 신사 취급 안 하는 건 너지. 기대대로 응해 줬을 뿐이야.”
“이미 언론을 이용해서 내 명예를 전부 조져 놨는데, 그런 건 궤변…… 음.”
클레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에리히의 손이 그녀의 뒤통수로 들어와 깔끔하게 올려놓은 적갈색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마사지하듯 어루만졌다. 클레어가 짧게 신음하며 눈을 감는 찰나 고개가 젖혀졌다.
따뜻한 촉감이 클레어의 입술을 덮었다. 에리히의 입술은 조금 건조하고, 무례했다.
클레어는 숨을 들이켰다. 긴장 때문에 무심코 바닥을 찼지만, 뒤로 물러나기 전에 에리히가 팔걸이를 붙들어 의자째 잡아당겼다.
“내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선전포고를 했다고 해서 선배가 신사라는 건 아니죠.”
“그리고 너는 현명하지 못했고.”
“내가 뭘요?”
긴장으로 꽉 쥔 주먹을 에리히의 손이 덮었다. 그의 손은 크고 손바닥이 단단해서, 금세 잡힌 부분에서 열이 올랐다.
“처음부터 나한테 왔으면, 엘리엇이 어린 나이에 혼란을 겪을 일도 없었을 거야.”
“뭐예요. 진짜 아들로 받아 주기라도 하려고요? 그런 것까지는, 음.”
말을 끝까지 하기도 전에 에리히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을 막았다.
“넌 말이 너무 많아.”
“선배.”
“제러드의 아들이라면 내게도 무관하지 않아. 친척으로서도, 클라우제너로서도, 당연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 그리고 엘리엇은 충분히 그럴 만큼 사랑스러워.”
에리히는 클레어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거의 댄 채로 말했다.
“네가 네 아이로 받아들였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그가 클레어의 손을 깍지 끼어 잡았다. 클레어가 반쯤 황당한 웃음에 섞어 대답했다.
“말도 안 돼. 선배는 혈통을 중시하는 사람이잖아요.”
“맞아. 내가 그래서 너를 싫어했었지.”
중요한 것을 모두 뒤죽박죽으로 만드니까.
클레어의 목이 한 번 더 젖혀졌다. 에리히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어 열었다.
숨결이 깊게 얽혀 금세 가빠졌다. 무심코 힘이 들어간 클레어의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에리히가 그 다리를 잡아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귀족적이긴 개뿔.”
“귀족입네 하는 놈들 싸잡아 경멸하는 주제에 허튼소리 마.”
클레어가 간신히 내뱉은 말을 에리히는 가볍게 웃어넘기고, 숨을 몰아쉬느라 목에 입술을 눌렀다.
또각.
원예 가위가 꽃대 하나를 잘랐다. 제법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실하게 자란 알리움 꽃이 꺾였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햇살은 온화했고, 정원에는 신록이 가득했다.
황후 마르고트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팔토시와 얇은 장갑까지 챙겨 끼고 손수 꽃을 꺾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것은 황후와 측근 시녀인 아우구스타뿐이었다.
“헉.”
긴장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숨을 내뱉는 소리가 정원의 공기를 갈랐다.
황후는 꽃대 몇 가지를 더 꺾어 아우구스타가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 넣고는,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이 너무 늦긴 했지. 선대 공작이 혼처를 마련하지 않았으니, 루이자라도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은 슈나이더 백작 영애를 마음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이리스? 겉보기에 예쁘니 카나리아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황후는 피식 웃었다. 잘못 건드리면 손가락이 잘릴 정도로 물릴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스 슈나이더가 맹금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작은 새는 작은 새에 불과하다. 까마귀가 아무리 큰 야심을 가지고 있어도 사자를 삼킬 능력은 없다.
‘그에 비하면 클레어 델포드는…….’
꽤 오랫동안 지켜보아 왔는데도 아직 그 그릇을 판단하기 어렵다.
위빙 상단의 주인이니 돈을 다루는 일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것은 확실했다. 차라리 가신으로 포섭했다면 역시 에리히가 유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로지 돈에만 관심을 가진 그 여자를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까.
“천박한 세상이야.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내실을 차지할 것이 까마귀 새끼가 아니면 황금 귀신이라니.”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젊은 남자들은 종종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리곤 하니까요.”
연이어 들려온 대답에 황후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우구스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정말로 공작이 사랑에 눈이 멀었을까? 그게 진짜라면, 사랑에 눈이 멀었는데 상대의 여동생을 건드리고, 아이가 그 나이가 되도록 방치했을까?”
“그건…….”
아우구스타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후가 신중하게 또다시 꽃줄기를 또각 자르며 말했다.
“출생에 대해서는 확인되었나? 남작 자신이 출산한 적 없는 것은 확실하고?”
“적어도 남작가의 친척과 영지민 중에는 그런 의심을 품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타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여동생이 임신했던 것도 확실합니다. 험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