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황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한가?”
“당시에 델포드 남작가에서 일하던 하녀 대부분이 폭행의 흔적을 보았거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음.”
황후는 짧게 신음했다.
델포드 남작의 여동생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에리히가 과연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군. 반대라면 이해가 돼. 공작의 자식이 아닌데 맞다고 속이는 것은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지. 하지만 그 반대는…… 왜 그런 짓을 하지?”
“델포드 남작이 가주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가주의 결혼은 일개 영애의 결혼보다 훨씬 중요하게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순결한 몸을 혼수로 가져가기 위해서 그런 거짓말을 한다?”
황후는 빈정거리듯이 말했다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이 작위를 계승한 가주라면 그런 복잡한 짓은 하지 않는다.
야심 없고 능력도 없는 하잘것없는 남자를 데릴사위로 들이고, 후계는 보다 좋은 씨를 받아 만들 것이다.
‘아. 그런 건가.’
황후는 납득했다.
델포드 남작 역시 그런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위빙 상단을 지참금으로 노리는 가문은 쓸어 낼 정도로 많을 텐데, 스물일곱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있는 것을 봐도 그것이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제 자식이 아니라 여동생의 자식으로 처리한 것은 공작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으리라.
“그 정도로 닮았다면, 아이가 진짜 공작의 아들이고 남작이 낳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공작에게 청혼받은 여자의 여동생을 방계 황족 누군가가 임신시켰는데, 하필 공작의 얼굴을 닮았다는 것보다는 그쪽이 합리적이다.
아마 여동생이 낳은 아이는 어딘가에 처리했으리라. 사생아 대부분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하물며 태어난 것이 연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폭력의 결과라면 더더욱 그랬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타난 아이가 에리히 클라우제너의 자식이라는 쪽이니까.
아렌의 혈통이 섞인 새로운 황위 계승권자다.
아우구스타가 물었다.
“뭔가 조치를 취할까요?”
“흠. 어떻게 할까? 클라우제너까지 아렌 피로 오염되는 것은 좀 그렇지만, 내가 간섭할 일은 아니긴 해.”
새로운 황위 계승권자가 생긴다 해도, 에리히보다 순위가 낮은 어린아이다. 황좌에 연관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
차라리 에리히 자신이 계승전에 뛰어든다면 모를까.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지.’
아렌을 포섭하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아렌 귀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정이다. 결혼 동맹은 가장 오래된 방식 중 하나였다.
에리히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파트너로 단순히 전통 있는 귀족이 아니라 위빙 상단을 선택했다.
결국 그것이 문제다. 위빙 상단은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황후는 남방 아렌 지역을 로멜에 종속시켜 저렴한 식량과 노동력을 공급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 같았다. 풍요로운 아렌의 토지는 로멜의 곡창이 되었고, 가난한 아렌인들은 로멜로 와서 빵보다 값싼 노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위빙 상단이 아렌 전체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값싼 밀의 공급처가 되어야 할 땅에는 거대한 목화밭이 자리 잡았다.
농장은 위빙 상단의 방침에 따라 일꾼들에게 다른 곳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했다.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로멜 도시로 와서 노동자가 되는 대신 고향의 농장에 취직하는 것을 택했다.
이어서 섬유와 방직 공장이 아렌에 들어서면서 도시화도 촉진되고 있다.
클레어 델포드는 남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지에 산업을 일으키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요가 풍부하고 노동력 공급이 쉬운 도시 인근에서 산발적으로 부지를 찾지도 않았다.
그녀는 큰 강과 철도가 지나가는 곳을 따라 너른 평야를 구획하여, 시작부터 대규모의 공장을 깔았다.
그러자 역으로 공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고 있었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조만간에 도시 단위가 클레어의 영향 아래 놓일 것이다.
황후가 그녀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 클레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빚을 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미친 여자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게 답이었다는 사실을 황후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클레어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두고 있다.
채권자 그 누구도 빚을 갚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 여자는 겁 많은 감정가이거나 기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여자가 클라우제너로 들어가는 것이 과연 사랑 때문일까?
‘사랑 때문이라는 게 사실이더라도, 너무 위험한 일이지.’
델포드 남작이라는 이름으로도 그만큼의 일을 해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라는 이름을 쥐여 주면 어떻게 될까?
쿡.
생각이 깊은 나머지 황후는 실수로 가위로 손끝을 찔렀다. 방울방울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아우구스타가 경악하여 얼른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뒤따르던 자들은 황공한 듯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괜찮아. 조금 찔린 것뿐이야.”
“약과 붕대를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타가 공손히 말하면서 희고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어 황후의 손가락을 감쌌다.
황후는 그녀가 그러는 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속상해서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많겠군그래. 루이자도 그럴 테지만, 공작 부인 자리도, 위빙 상단도, 탐내던 이들이 많을 테니까.”
아우구스타가 시선을 들었다. 황후의 눈동자는 아주 차분하고 냉혹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효과 좋은 ‘진정제’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군요.”
황후는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말했으니, 나머지는 아우구스타가 잘 처리할 것이다.
8. 결혼보다 중요한 사업은 없다
클레어의 작은아버지인 제임스 델포드 경이 수도의 기차역에 내린 것은 오후의 일이었다. 스물다섯 살의 아들 찰스와 함께였다.
“농노의 아들 따위와 결혼이라니. 말이 되느냐? 아무리 딸내미가 귀여워도 그렇지, 형님이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그는 부들부들 떨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내 이번에야말로 클레어를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말겠다.”
본래 델포드 남작위는 그의 것이 되었어야 했다. 아들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남자 혈육이 잇는 법이다.
그것을 선대 델포드 남작은 덥석 딸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클레어는 충분히 가문을 건사할 능력이 있어. 너도 알지 않니.]
제임스도 클레어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형님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딸을 위해 울타리가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어 한 마음도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미 계승된 작위를 내놓으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결혼은 당연히 찰스와 해야지! 그래야 델포드 가문이 제대로 이어질 수 있지!’
딸은 결국 딸이고, 외손자는 다른 가문의 씨다.
하지만 찰스와 결혼하면 문제가 사라진다. 과학이 어쩐다 저쩐다 하면서 사촌 간의 결혼을 피하는 세태가 되었지만,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서 종종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면 태어날 아이는 델포드의 후손이고, 클레어는 델포드 가문에 대한 권리 절반을 여전히 쥐고 있게 된다. 형님 부부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델포드의 직계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어른으로서 그가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멋대로 그레이와 결혼하겠다고 수도로 혼자 가 버리다니! 그놈이 변호사가 되었다고 해서 어디 출신 자체가 변했던가?
거기에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입적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성큼성큼 기차역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검은 제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 여덟이 똑바로 제임스를 향해 다가왔다.
처음에 제임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둘러싸이고 나서야 당황하여 지팡이를 쳐들었지만, 딱히 공격하려던 의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무슨 용건입니까!”
그나마 젊은 찰스가 앞으로 나서며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짐꾼으로 건장한 하인을 둘이나 데려왔지만, 순박한 시골 청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만 쳤다.
제복 남자들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능숙하게 제임스와 찰스를 하인들에게서 분리하여 포위했다.
“제임스 델포드 경?”
“이게,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인가!”
이렇게 소리를 쳐도 이 사람 많은 기차역에서 간섭하러 오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멀찍이 둘러싼 채 수군거렸다. 제임스는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위압된 채 시뻘건 얼굴을 했다.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함께 가시죠.”
“각하라니?”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둘은 반쯤 밀려서 검은 대형 사륜마차에 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