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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263)

24화

제임스는 노랗게 질린 채 부르르 떨었다. 마차는 이전에 타 본 적이 없을 만큼 널찍하고 안락했지만,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풍경이 창밖으로 휙휙 스쳐 지나갔다. 제임스는 등을 꼿꼿이 세우려고 애썼다. 무슨 부당한 취급을 받아도 당당하게, 귀족적으로 응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은 생각보다 빨리 쪼그라들었다. 마차가 거대한 대문을 통과하자 더욱 그랬다.

“이보시오. 어딜 가는 거요?”

그는 퍽 소심한 태도로 물었다. 그제야 건너편에 동승한 제복 남자가 짧게 답했다.

“클라우제너 공작저입니다.”

“힉!”

제임스는 기겁한 소리를 냈다.

마차는 화려한 본관 정문 앞에 두 사람을 내려놓았다. 찰스가 넋 나간 얼굴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상아궁이라고 불린 적도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커다란 창문에 끼워진 맑은 판유리에 햇빛이 부서져, 바람 없는 여름날의 호수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장엄하고 호화로운, 제국을 상징하는 그 어떤 건물도 이처럼 현대적인 사치를 보여 주는 건물은 없었다.

“제임스 델포드 경?”

멍청하게 서 있는 그를 이번에는 집 안에서 나온 사람이 불렀다. 고풍스러운 예복을 입은 집사였다.

“마, 맞네. 내가 델포드의 제임스일세.”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인가. 제임스는 눈을 굴리며 집사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의 집무실은 위엄 있게 꾸며져 있었다. 품위 있는 가구들은 아마 상아궁 시절부터 바뀐 곳 없이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책상 가까이에 놓인 가스등과 맑은 유리창만 신식이었다.

클라우제너 공작은 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뒷모습이었다.

“주인님, 제임스 경을 모셔 왔습니다.”

제임스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껏 힘을 주었다. 용건이 무엇인지 몰라도, 자신도 전통 있는 아렌의 귀족이다. 죄지은 것도 없고, 꿀릴 것도 없었다.

공작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허헉!”

제임스는 굳은 결심을 잊고 기겁한 소리를 토해 냈다. 찰스는 아예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에리히는 그 반응을 보고 내심으로만 쓴웃음을 지었다. 클레어의 말이 맞은 셈이다.

[델포드와 수도가 거리가 멀다고 해도 안심할 순 없어요. 영지민은 그렇다 쳐도, 친척의 입을 막기는 어렵죠.]

[네가 가문 관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유감스럽지만 ‘장남’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에리히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장남이 요절하여 차남이나 삼남이 가문을 잇는 경우에도 친척과의 사이에 힘겨룸이 생기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물며 클레어는 여자였다.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게 낫겠군. 클라우제너의 혈통 문제라고 하면 입조심하겠지.]

그 생각은 맞았다. 제임스는 벌써 시뻘건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네, 제임스 경. 갑작스러운 초대였는데, 이렇게 기꺼이 방문해 주어 고맙군.”

“아, 아닙니다.”

에리히가 악수하려고 손을 내밀자 제임스가 시뻘게진 얼굴로 등까지 굽히며 두 손으로 그 손을 잡았다.

기차역에서 납치하다시피 해서 데려왔다는 것은 이미 잊은 듯했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에리히는 우아한 태도로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은 뻣뻣한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제임스는 지난 5년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여태까지 자신은 엘리엇에게 어떻게 대했던가?

에리히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제임스의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생각들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굳이 들여다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는 제임스가 흡, 하 하고 숨을 들이켠 다음에야 본론을 말했다.

“식은 두 달 후에 올릴 생각일세.”

“식이라니…… 외람되오나 무슨 말씀이신지…….”

“결혼식 말일세.”

“결혼식이요?”

제임스는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클레어와 나의 결혼식 말일세.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했나?”

에리히는 성가셨으나 성의껏 대답했다. 어쨌든 인척이 될 사이였다.

제임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엘리엇 이야기를 하려던 거 아니고?’

에리히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제임스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입막음이었다. 그런데 결혼식이라니.

에리히가 깍지 낀 손을 허벅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처음 소식을 알려 주는 사람이 되겠군. 내가 청혼했고, 며칠 전에 클레어가 승낙했네. 결혼과 함께, 엘리엇을 가계도에 올릴 걸세.”

“가, 각하께서 엘리엇의 생부이기라도 하단 말씀입니까?!”

그때까지 입 다물고 있던 찰스가 벌떡 일어서며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에리히가 슬쩍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임스가 대경실색해서 아들의 팔을 잡아 도로 앉혔다.

“죄송합니다.”

제임스는 찰스의 등짝을 때릴 기세로 재킷 뒤쪽을 움켜잡고 끌어 내렸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당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그, 저기, 설마 정식으로 데려가실 생각입니까?”

“그래. 내 아이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뿐이었다. 남작 영애가 낳은 사생아를 클라우제너의 후계자로 삼는다고? 말이 되나?

공작은 당연히 신분에 맞는 결혼을 해서 후사를 봐야 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면 또 모를까.

‘아!’

제임스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을 했다. 모든 게 납득 갔다.

공작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몸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해된다.

엘리엇은 똘똘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인 데다가 공작을 똑 닮았다. 게다가 다행히 로멜-아렌의 결합은 귀천 상혼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연히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정식으로 입적할 생각이라면, 가계도를 생각해서 클레어와 결혼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린 후계자를 남기고 배우자가 죽었을 때 자매와 재혼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가문 간의 계약이 복잡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지만 제임스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짐작해 버린 에리히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클레어와는 다툼이 있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이게 최선의 결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네.”

“예. 지당한 말씀입니다.”

제임스의 대답에도 에리히는 불쾌감을 다 지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클레어가 낳은 것으로 하기로 했어. 그쪽이 문제가 없을 테니.”

“그것도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쪽이 절차적 문제도 적고, 무엇보다도 후계자에게 흠이 생길 우려가 없어지니까요.”

비록 결혼식보다 전에 태어났을지언정, 공작 부인 소생이라고 하는 쪽이 자매가 낳은 사생아보다 나은 게 당연했다.

제임스는 거의 굽실거리며 대답했다. 세상에, 델포드 남작가가 클라우제너 공작가와 혼맥을 맺다니! 조카딸이 낳은 쓸모없는 사생아가 클라우제너 공작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에리히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간략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식은 가까운 친지만 모아 간소하게 올릴 예정이야.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되네. 결혼식까지 인척으로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집사가 연락할 걸세.”

“예.”

에리히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만 물러가라는 축객령이었다.

오만한 태도였지만, 제임스는 불만을 갖지 않았다. 울컥하려는 찰스를 질질 끌고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물러 나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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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클레어는 호텔에서 신문사의 사주들을 만나고 있었다.

“식을 간소하게 올린다고 했지, 모든 걸 다 조용히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클레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숨어서 하듯이 남몰래 후다닥 치러서는 안 된다. 일가친척만 모아서 간소하게 하겠다는 것은, 그것을 별들의 파티처럼 만들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뿌려진 소문을 전부 수습하기 위해, 이걸 아주 낭만적인 연애결혼인 것처럼 만들 거예요.]

[아닌가?]

[…….]

[별일이군. 네가 입을 다물고.]

[……어이가 없어서요.]

남의 앞길 막을 정도로 소문을 낸 게 누군데.

하지만 클레어는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에 여태 그가 저지른 짓을 수습할 권한을 달라고 말했다.

에리히는 아주 가볍게 대답했다.

[전부 사.]

[네?]

[신문사. 필요하다면 우편업체도.]

땅을 파면 돈이 나오는 부자께서 말씀하셨다.

신문사를 몽땅 사 버리다니. 진심 생각도 한 적 없는 일이었다.

못 살 건 없었다. 언론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점에 대한 사회적인 우려도 없었다.

언론, 출판에 관한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대부분 검열과 관변화를 우려하는 것이다.

영세한 업체 몇 개쯤, 그냥 돈으로 사면 된다. 사주가 되면 기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클레어의 발상이 거기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와! 맨날 언론 재벌을 어떻게 해체할 수 있는가만 생각했지, 되어 보려고 생각한 적은 없네요. 자신의 어중간함이 한심스러워요. 진짜 귀족이 되려면 멀었군요.]

[넌 잘하고 있어.]

[진짜로 귀족적이지 못하다고 자책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클레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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