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1백만 골드라면 넙죽 받아먹어야 마땅했다. 독점 특종으로 대흥해서 수천 부를 찍어도 5만 골드 매출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클라우제너가 이런 식으로 수도의 신문사를 쓸어 담았다는 것을 알았고…… 오늘 오전에 호출을 받은 것이다.
‘설마 공작이 이제 와서 약혼녀한테 다 우리 탓이라고 한 건가?’
어설픈 거짓말로 오리발을 내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세상 그 어떤 남자도 약혼녀에게 ‘내가 네 명예를 박살 내려고 했어’라고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지. 배상 책임을 요구할 거면 셔우드 변호사가 나섰겠지, 뭐 하러 귀족이 직접?’
‘굳이 돈을 주고 신문사를 샀잖아. 위빙 상단이니까 다른 의도가 있겠지.’
‘분명히 한 놈은 본보기로 처형된다. 거기 걸리면 안 돼.’
초조한 기다림 끝에 문이 열렸다. 편집장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클레어가 들어섰다. 편집장들은 무심코 그녀를 응시하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로 미인이었나?’
그런 생각들이 여러 사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클레어 델포드는 예쁜 편이지만, 용모로 화제가 될 정도의 미인은 아니다.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타입의 미인은 금발에 푸른 눈, 눈처럼 흰 피부에 작고 가냘프고 마치 바람에 날아갈 듯한 요정 같은 여자였다.
그게 아니면 만개한 겹장미처럼 풍만하고 화려한 여자가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 루이자도 젊은 시절에 이런 타입이었다.
클레어는 양쪽 모두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씬하고 키가 컸으며, 가냘프다기보다는 훤하고 이지적인 인상이었다. 머리칼은 붉은빛 도는 갈색이고, 눈동자는 노란빛이었다.
거의 언제나 무채색 옷을 입었고, 머리장식도 없이 잘 다듬어 올린 머리를 고수했다. 꼼꼼한 인상을 주면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은 적절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딘가 얼굴이 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왜지?’
‘안색이 좋아서 그런가?’
그 전에도 클레어가 존재감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녔다는 사실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니까.
그것을 깨달은 자는 없었다. 왜 그녀가 오늘 환하게 보이는지도.
“급하게 불렀는데 한 명도 빠지지 않았군요. 앉으세요.”
클레어가 우아한 태도로 먼저 상석에 앉았다.
하지만 따라서 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맙다는 말이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만큼 눈치 없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책망하려고 부른 게 아니에요.”
클레어가 습관 같은 몸짓으로 귀에 달고 있던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흔들리며 오색의 광채를 흩뿌렸다.
“죄송합니다, 남작님.”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그러자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이 그간 손톱만 한 사실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일부러 자극적인 어휘를 골라 기사를 쓰고, 모욕적인 삽화를 1면에 냈지만, 그것을 문제 삼으려 했다면 지금 내가 아니라 내 변호사를 만나고 있겠죠.”
수위를 지킨 몇 명은 시선만 내리깔았다. 하지만 연애담이 아니라 추문과 명예훼손 사이에서 줄타기해 온 자들은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실 절대 다수가 후자였다.
클레어는 빙긋 웃었다.
개자식들에게는 개자식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제 잘못을 알고 있는 개자식은 더욱 쓸모 있었다.
칼자루를 쥐는 맛은 언제나 꿀맛이었다.
“갑자기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요.”
“예……?”
“여러분의 펜으로 상처 난 명예는 여러분의 펜으로 다시 세워 주어야지요?”
클레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말했다.
대화가 끝나자, 편집장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클레어는 평화로운 기분으로 비로소 찻잔을 손에 들었다.
아침부터 얼굴에 공을 들이느라 피곤했다.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스스로 걸어 다니는 간판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나가지 않았다. 클레어는 의아하게 그쪽을 바라보았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 법한 얼굴에 푸들 같은 크림색 곱슬머리를 가진, 서글서글한 미모의 청년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요?”
클레어가 묻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정중하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물러가라는 말씀을 어겨서 죄송합니다, 남작님. 케이시 모리스라고 합니다. 가업은 서적상이고, 저는 작은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남작님의 새 사업에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위빙 상단의 로저 카슨 씨만은 못해도.”
클레어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사업을 이야기하는 거죠? 위빙 상단의 사업에는 서적상이나 잡지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결혼 사업 말입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귀족의 결혼이 대개 정략결혼이고 아주 많은 경제적 이해가 얽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모리스 씨가 관여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전 남작님께서 입고 걸치실 것들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케이시는 준비한 말을 빠른 속도로 내뱉었다.
그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클레어는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당하면서, 걸치고 있던 옷과 손톱에 대해서까지 기사로 나갔다.
결혼식 준비를 시작하면 더 심해질 텐데, 그녀는 오히려 계속해서 기사를 1면에 내기를 요구했다.
논조에까지 지침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아무 뜻이 없을 리도 없다.
쉬지 않고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며 신문에 실릴 수 있는 기회다. 그것도 완벽하게 본래의 목적을 숨기면서.
광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위빙 상단의 주인이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남작님께서 입으실 웨딩드레스와 베일, 신발, 또 피로연 드레스, 공작 부인의 예복, 신혼을 위해 바꿀 침구와 러그, 커튼에 대해서 모두가 궁금해하겠지요.”
“물론 약간의 이득이 있겠죠. 하지만 문직물 시장은 이미 위빙 상단이 장악하고 있어요.”
클레어가 오늘 몇 번 그런 것처럼 이번에도 톡, 귀걸이를 건드리며 말했다.
“고작해야 드레스와 침구 따위가 과연 내가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을 광고판으로 사용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 남작님께서는 본래 보석을 잘 착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의 의상만이 아니라 그 귀걸이도…….”
말하면서 케이시는 깨달음을 얻었다.
메모로 남겨 정리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기에, 그는 떠오른 아이디어가 사라지기 전에 성급하게 말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돈을 버는 자가 늘어나면 사치품에 대한 수요는 커지는 법이죠. 위빙 상단은 기술력에 의하여 문직물의 물량을 늘리고 가격을 하락시킴으로써 그 수요를 흡수하여 시장 자체를 확대했습니다.”
“그래서요?”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 결혼식은 보석에 관심은 있지만 실질적으로 구매하지 못했던 수요층을 끌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클라우제너에는 제국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두 개나 있다. 그리고 채굴 기술이든 가공 기술이든, 공급을 증대시킬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공급은 수요를 무한히 만족시킬 것이다. 위빙 상단이 그러했던 것처럼 막대한 시장이 새로 창출되리라.
케이시의 말에 클레어는 빙긋 웃었다.
“방향은 정반대지만, 큰 줄기로는 틀리지 않군요. 맞아요. 이전에는 공급되지 않았던 종류의 상품으로 새로운 수요층을 끌어들일 작정이에요.”
케이시의 얼굴이 환해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케이시. 유능한 사람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클레어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케이시는 공손히 허리를 굽힌 채 클레어의 손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들고,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 루이자가 이넨호프 호텔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때로부터 조금 전의 일이었다.
공작가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멈추어 섰을 때, 지배인은 처음에는 웃었고 다음 순간에는 경악했다. 에리히가 온 줄 알았는데 루이자가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직원에게 손짓했다. 금세 뜻을 알아챈 직원이 서둘러 안으로 사라졌다. 조금이라도 클레어에게 준비할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 오늘은 어쩐 일로…….”
“어디 있어? 그 여우 같은 것은?”
“예?”
귀부인이 입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천박한 언사에 지배인이 순간적으로 생각을 놓쳤다. 루이자는 그것조차도 짜증 나는 듯이 그를 손수 팍 밀치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지배인이 허둥지둥 뒤를 따라왔다.
“신문사 사주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다며.”
루이자는 날카롭게 말했다. 대체 사람을 불러 모아 놓고 무슨 소리를 하려는 수작일까, 그 요사스러운 것은.
아니, 그것까진 참을 수 있다. 에리히가 신문사를 쓸어 담게 했다고 들었지만, 뭐, 그래, 동전 몇 푼짜리 신문에 그렇게 값싼 흥밋거리가 되어 오르내리고도 가만히 있다면, 공작 부인은커녕 남작 노릇할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을 준다고? 이게 말이나 돼?!’
루이자는 녹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손을 힘껏 주먹 쥐었다.
그 다이아몬드 광산은 그녀의 것이었다. 물론 그녀가 소유권을 갖고 있다거나 광산 사업에 참견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 광산에서 나오는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그런데 감히 그것을 훔쳐 가려 해?
‘제깟 것이 대체 뭔데?’
그동안 루이자는 나름대로 참았다. 자신이 돈을 주어 쫓아내려 했던 것은 편리하게 기억 한편으로 밀어내고, 아이가 있다면 어쩔 수 없다며 자애롭게 받아들여 준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에 보답하려고 애쓰기는커녕, 결혼하기도 전부터 보석 광산을 탐내다니! 가지고 있던 가문의 재산과 사업도 정리해서 에리히에게 주지는 못할망정!
“여기야?”
홀 앞에서 루이자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손수 문을 쾅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본 것은 생각하고 있던 장면이 아니었다. 신문사 편집장을 불러들였다고 들었는데, 클레어는 지금 젊고 잘생긴 남자와 단둘이 있지 않은가!
“이 미친년! 감히 남자를 끌어들여?”
루이자는 소리치며 클레어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