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제복을 입은 심부름꾼이 레이스로 포장된 아름다운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공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고마워요. 카드는 따로 없어요?”
“따로 적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심부름꾼은 침착하게 대답하고, 대신 커다란 장미 꽃다발만 상자 곁에 내려놓았다.
클레어는 그가 물러간 뒤에 고개를 갸웃했다. 꽃다발은 그렇다 치고 이 상자는 뭘까? 반지가 준비되려면 아직 멀었을 것이다.
“마님, 열어 보세요.”
마사가 자기가 더 설레는 얼굴로 권했다.
클레어는 겉포장을 풀었다. 안에는 붉은색이 선명한 고급 자단목 상자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청보라색 사파이어로 장식된 아름다운 백금 열쇠가 들어 있었다. 머리가 누름꽃처럼 생겼다.
“수레국화 열쇠.”
클레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클라우제너에서도 보물로 여기는 물건이니, 당연히 유명했다.
열쇠 자체도 보석이나 다름없었지만, 이것으로 열 수 있는 창고 안에 있는 보물들은 더 대단할 것이다.
“어쩜…… 세상에. 이거 클라우제너 공작가 안주인의 열쇠 맞죠?”
마사가 새삼스럽게 감동한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클레어는 희한한 기분으로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야 결혼하면 공작 부인이니, 당연히 자신에게 와야 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루이자가 쉽게 손에서 놓을 것 같지 않았는데.
‘고맙네, 진짜.’
이것을 주었다는 것 자체보다도, 에리히가 자신이 루이자와 실랑이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미리 가져다준 것이 고마웠다. 그런 세심한 배려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티파티는 언제 여실 건가요?”
마사가 설레는 목소리로 물었다. 클레어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갑자기 티파티라니?”
“이렇게 귀한 것을 받으셨잖아요. 자랑하셔야지요.”
클레어는 민망한 기분이 되어 괜히 목덜미를 쓸었다.
물론 이 열쇠가 유명한 것은 지금까지 자랑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파티까지 따로 열 일인가.
어차피 신문으로 사방팔방, 고래고래 소문내듯 결혼하는데 티파티 하나쯤 얹는 게 대수냐 싶기도 하지만, 왠지 부끄러웠다.
게다가 그건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하는 일이고, 이런 건 또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티파티를 열어 봤자 올 사람도 없는걸.”
“친구분 있으시잖아요.”
“수도에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어.”
아카데미에서 비슷한 신분의 영애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지만, 특별히 따로 만날 만큼 절친한 사람은 없다.
사실 있었어도, 위험 부담을 안고서까지 만나자고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엘리엇도 엘리엇이지만, 수레국화 열쇠를 처음 보게 된 사람이라는 소문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인의 미움을 사면 곤란해질 테니까.’
자신은 괜찮지만, 구경꾼에게 불똥이 튈 것이다.
클레어는 뚜껑을 닫아 그것을 침실에 가져다 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남작님, 제임스 님이 뵙자고 하시는데요. 다른 손님도 한 분 계세요.”
“알았어.”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에 온 직후에는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다 어쩐다 하면서 계속 조용하더라니.
하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예비 시어머니 다음에는 말 많은 친척 아저씨……. 어찌 보면 정석이었다.
10. 5년 전의 드레스
“할아버지! 저도!”
엘리엇은 어리광을 부리며 제임스 델포드의 무릎 사이로 파고들었다. 제임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이를 잡아 달랑 들어 옆에 앉혔다.
“어허. 바르게 앉아야지.”
“저도 좋아하는데에에.”
“그렇게 품위 없이 행동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느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임스는 테이블에 놓인 버터 쿠키를 집어 주었다.
“와!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엘리엇이 신나서 소리치고 와그작 쿠키를 깨물었다. 제임스는 풀어지려는 입가를 다잡으며 엘리엇의 엉덩이를 두드려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엘리엇 자체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손자가 그리울 나이인 데다가 엘리엇은 지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그러면 결국 모든 사람이 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물론 그것과 엘리엇을 델포드의 상속자로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아이, 그것도 십중팔구 질 낮은 놈의 자식일 거라고 생각해서 경계했다.
차라리 클레어가 결혼하여 진즉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낳았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엘리엇만 끼고 돌았으니 자신이라도 제대로 판단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졌다. 제임스는 마음 편히 아이를 예뻐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귀티가 줄줄 흐르더라니.’
그는 지난달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엘리엇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엘리사는 곱고 순한 아이였는데, 뉘를 닮아 저렇게 촐랑대고 소리를 지르는지 모르겠다고 흉보던 건 이미 잊었다.
‘복덩이야, 복덩이. 하긴, 우리 엘리사가 얼굴 하난 예뻤지.’
임신을 시켰으면 마땅히 그때 책임졌어야 옳았다는 생각 같은 건 미뤄 놓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흐뭇하게 웃고 있자, 옆에서 고운 목소리가 물었다.
“그렇게 귀여우세요?”
“어흠.”
제임스가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슈나이더 백작 영애 이리스가 입가에 손을 얹고 웃었다.
제임스의 얼굴이 벌게졌다. 누가 보면 이 나이가 되어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본능이라는 건 숨길 수 없는 법이다.
클라우제너 공작을 만난 이후로 내내 불평불만을 숨기지 않고 부루퉁해 있던 찰스마저도 목덜미를 붉혔다.
이리스가 엘리엇을 향해 다정하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와 보렴. 쿠키는 누나가 줄게.”
엘리엇이 우물쭈물하다가 제임스의 다리 뒤로 숨었다. 제임스가 ‘어허’ 하고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쿠키를 주신다고 하지 않니. 어서 가서 받고 ‘고맙습니다’ 해야지.”
“우웅…….”
“요 녀석이 부끄럼을 타나 봅니다.”
제임스가 껄껄 웃었다. 이리스가 미소 지었다.
아이는 사랑스러웠다. 에리히를 쏙 빼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귀여웠다.
용모에서 아이 엄마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에, 다른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정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인하러 오길 잘했어.’
이리스는 내심으로 생각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어디 기숙학교나 시골로 보내 버리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아무 잘못 없는 아이에게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후계자가 필요하니 차라리 잘되었다. 이리스는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
좋은 새엄마가 되어 주고 싶었다.
클레어는 문고리를 잡은 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려오면서 하녀에게 사정 이야기는 들었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방문했다고?’
왜 왔는가. 그런 질문은 하나 마나였다. 어차피 엘리엇이 궁금해서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지만, 주목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지금 자신의 결혼과 엘리엇의 존재는 사교계 최대의 화제일 테니까. 화제를 선점하기 위해 먼저 제임스에게 손을 내밀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관심을 사랑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클레어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막내딸은 유명인이었다. 일단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성황청 성가대의 소프라노 솔로로서, 그 미모와 인기에 힘입어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귀족의 딸이 오페라 가수라니, 보통이라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작은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리스는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였고, 하고 싶다는 일은 무엇이든 시키며 키웠다.
무엇보다도 백작 자신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오페라 애호가로서, 사적인 자리에서 스스로 노래하여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곤 했다.
귀족이 직업을 갖는 풍조가 생기면서, 이리스 같은 환경의 숙녀가 가수가 되는 것은 특이하지만 그렇게 비난당할 일까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돈을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성가대 소프라노가 본직이고, 때때로 초대를 받아 무대에 서는 것뿐이니까.
어찌 보면 그녀도 신분이 흐트러진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다.
‘잡을 수만 있다면, 최상급 모델이야!’
클레어의 머릿속에 새로운 마케팅 기획이 주르륵 펼쳐졌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었다.
“이모!”
엘리엇이 제일 먼저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와 다리 뒤로 숨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작님. 슈나이더 백작가의 이리스라 합니다.”
“환영합니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 이렇게 직접 만나 뵈니, 명성이 제아무리 높아도 영애의 영광을 빛내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겠어요.”
클레어는 자본주의적인 미소를 넘치게 입가에 걸고 말했다.
이리스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미소를 지었다.
“델포드 경에게 청하여 소개장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방문했는데도 과한 말씀으로 환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디 제가 호기심이 너무 많았다고 책망하지 말아 주세요.”
“책망이라뇨…….”
클레어는 이리스가 먼저 말하는 바람에 뒷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궁금했거든요. 제 연파랑색 드레스를 가져가신 분이 누구였는지.”
이리스가 그녀를 바라보고 말랑말랑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클레어의 머릿속이 한순간 쩌억 얼어붙었다. 남의 연파랑색 드레스를 가져다 입은 기억이 한 번 있었다.
5년 전에, 에리히의 침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