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클레어는 한순간 흔들린 심경을 겉으로 드러낼 뻔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리스가 자신을 살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얘, 뭐야?’
이리스는 그럭저럭 말을 돌려 하거나 사람을 흔드는 솜씨가 있었지만, 오너 일가 직계 장남인 본부장님의 눈치를 보며 단련된 관찰력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말에 클레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는 거다, 저건.
‘드레스 문제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닌 거네?’
클레어는 확신했다.
생각해 보면 5년 전 일이다. 에리히의 침실에 누가 왔다 갔는지 그렇게 쉽사리 밖에 알려졌을 리가 없다.
진짜로 그랬다면,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집사부터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전부 목이 날아갔겠지.
아니면, 에리히 자신이 말했을까? 그것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 여자와 그 정도로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이제 와서 이럴 리가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몰랐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건 블러핑이다.
“무슨 말씀이죠?”
“제 드레스요. 분명히 공작님에게…….”
이리스가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상하네요. 에리히가 영애의 드레스를 어떻게 했다는 건가요?”
“자꾸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이리스의 입꼬리가 흔들렸다. 그 얼굴만 보면, 순수하게 클레어와 공통의 화제를 두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뿐인 것처럼 보였다.
“남작님께서 제 드레스를 가져가셨으리라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어요. 5년 전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제가 에리히의 침실에서 나올 때 옷을 얻어 입은 적이 있긴 한데요.”
“역시!”
그것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리스에게 클레어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게 영애의 옷이라면, 영애께서는 옷을 가져다 둘 만큼 그 침실에 자주 드나드셨다는 뜻인가요?”
“네?”
“그렇잖아요? 제가 에리히에게 옷을 얻어 입은 것은 그때뿐인데, 그 옷은 침실에 준비되어 있었는걸요?”
클레어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미 혼전 임신으로 낳은 자식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상황이다. 이제 와서 5년 전에 자신이 에리히와 잤다고 해서 놀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면, 설마 영애께서 거기서 옷을 직접 벗어 놓고 나오셨나요? 설마 그건 아니시겠죠.”
이리스가 당황했다. 그녀는 그제야 잘못하면 치정불륜으로 자기 명예가 진창에 처박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연한 금빛 속눈썹이 함초롬히 젖어 들었다. 무슨 기술인지 화장품 하나 녹이지 않고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동그랗게 뺨을 타고 굴러서 하마터면 클레어는 그거 워터 프루프냐고 물어볼 뻔했다.
눈물 가득 고인 푸른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내리깔고서, 이리스가 오열하듯, 하지만 선명한 목소리로 애처롭게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흑.”
과연, 프리마 돈나의 지위는 핏줄로 따낸 게 아니었다. 오페라 가수가 배우는 아니지만, 가창력만이 아니라 표현력과 연기력도 필요한 법이다.
“제가…… 전…… 그냥 드레스가 어떻게 되었는지, 흑, 궁금했을 뿐이에요. 제 소중한 친구가, 저를 위해 특별히, 흑, 디자인해 준 거라서, 흐으윽.”
여기에 단둘만 있었다면, 클레어는 개소리 그만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임스와 찰스가 있었다.
“클레어, 이제 그만해라.”
제임스가 둘 사이로 끼어들며 클레어에게 엄한 목소리를 냈다.
“시답잖은 질투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냐?”
“숙부님.”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비록 처음에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방식으로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그렇게 남의 명예를 해치려 들어서야 어떻게 숙녀라고 할 수 있겠니?”
클레어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찼다.
“쯧쯧, 내 이래서 너더러 항상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거지.”
“숙부님.”
“여자가 머리만 좋다고 다가 아닌데, 그걸 뽐낼 생각이나 하고, 거친 평민 놈들하고나 어울려 다니면서 남한테 이겨 먹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렇게 말을 함부로 내뱉고.”
“숙부님, 지금 남 앞에서 가주의 명예를 해치고 있는 게 누군가요?”
클레어는 헛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했다. 숙부를 권위적으로 무릎 꿇리지 못하는 게 전생을 떠올린 유교걸의 업보였다.
가주의 명예를 언급하자 제임스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클레어를 꾸짖는 대신 이리스를 위로하기로 한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 저희 클레어가…….”
“숙부님.”
클레어가 부르자 제임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가주라는 것을 기억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찰스를 돌아보았다. 제임스가 헛소리하는 것보다 아무 책임도, 힘도 없는 찰스가 하는 게 나았다.
“찰스, 마차를 불러서 슈나이더 백작 영애를 모셔다드리고 와.”
제아무리 둔탱이 멍청이라도 미인 상대로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찰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내, 내가?”
“너 말고 여기에 누가 있어?”
찰스가 머뭇머뭇하다가 이리스에게 다가서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영애, 부디 그렇게, 계속 눈물 흘리시지 말고…….”
찰스 딴엔 온 힘을 다했을 위로를 이리스는 힘없는 손짓으로 톡 걷어 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사람처럼 흐느끼면서 밖으로 나갔다.
“따라가.”
클레어는 찰스에게 고갯짓했다. 찰스는 무서운 사촌누나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몰라 또다시 머뭇거렸다.
“모셔다드리라고 했잖아. 델포드 남작가가 손님을 울려서 쫓아낸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따라가.”
“아, 응!”
비로소 클레어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눈치챈 찰스가 서둘러 이리스를 따라갔다.
마차 안에서 혼자 있을 땐 안 울 거라는 쪽에 클레어는 오늘 저녁밥을 걸 수도 있었다.
“이모…… 괜찮아?”
그때까지 그녀의 다리에 달라붙어 있던 엘리엇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클레어는 당황하여 엘리엇을 안아 올렸다.
“괜찮아, 괜찮아.”
“이모, 싸움했어.”
“싸운 거 아냐.”
“아냐, 싸운 거야. 이모 화났어. 여기가 빨개졌어.”
엘리엇이 고사리손으로 클레어의 광대를 만졌다. 클레어는 그 보드라운 감촉에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아이 앞에서 무서운 태도를 보이면 안 되는 건데. 참 어려운 일이다.
클레어는 엘리엇의 뽀뽀를 받고 나서 제임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형형한 눈빛에 또다시 한소리 하려던 제임스가 입을 벌린 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숙부님, 제가 지금까지 뭐, 숙부님더러 입을 다물고 있으라거나 쥐 죽은 듯 계시라거나, 그런 요구를 한 적은 없는데요.”
“어? 어…….”
“가문의 어른으로 존중받고 싶으시면 그럴 만하게 행동하세요.”
“떽. 오늘 일은 네가 교양 없이 군 것이지. 어떻게 손님이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거기다 그 앞에서 감히 이 숙부에게 지적질을…….”
“감히요?”
클레어가 웃어 버렸다.
“에리히 클라우제너도 제게 감히라고 말하지 못해요, 숙부님. 제가 숙부님의 조카라고 해서 숙부님이 마구 대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에요.”
“뭣?”
“숙부님이 입고 계시는 그 고급 정장, 지팡이, 실크 타이, 모자, 귀금속, 먹고 쓰는 돈과 생활하시는 저택의 유지비까지,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세요?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상속받으신 것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모욕감으로 제임스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랫사람에게 부양을 받으면, 적어도 존중은 해 주셔야죠.”
클레어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싫었다. 돈 때문에 존중하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고삐를 쥐는 데에는 이게 최고였다. 곳간 열쇠야말로 권력인 법이다.
“언제나 눈 조심, 입조심, 귀 조심하는 걸 잊지 마세요. 클라우제너의 인척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저보다 잘 아실 테니.”
제임스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고 엘리엇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이모, 역시 화났어.”
“이모가 화나서 무서워?”
“슬퍼. 고슴도치처럼 뾰족뾰족해지는 건 아플까 봐 그런 거래요.”
엘리엇이 그녀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이모가 아픈 거 싫어.”
“안 아파.”
“뽀뽀할래.”
엘리엇이 클레어의 뺨에 뽀뽀하고, 호 해 주려다가 어디다 해야 할지 몰라 조금 헤맸다.
그래도 속에서 치민 불이 좀처럼 꺼지지 않아 클레어는 아이를 끌어안고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뺨을 마구 비볐다.
그리고 엘리엇의 손을 잡고 놀이방까지 갔다.
‘이 일이 달리 더 번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리스의 태도로 보아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아니, 솔직히 이리스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든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엇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그 외의 감정들은 부수적인 거니까.
그리고 모르던 것도 아니지 않나. 에리히의 침실에서 드레스가 나왔을 때부터 여자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일단 전에 사귄 적 있으니까 옷이 거기에…….
‘아니, 근데 청혼했었잖아, 그때도?’
그러면 내가 남의 남자 스틸 한 건 아니지 않나?
옛날 애인 하나둘 가지고 이제 와서 따지고 드는 것도 우습다.
‘아니, 근데, 진짜.’
또다시 그 세 단어를 떠올렸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클레어는 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레이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클레어는 시계를 한번 보고 일어섰다. 시어머니의 남자 사람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