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해가 길어지는 계절이지만, 저녁 8시는 충분히 어두웠다. 석재로 포장된 길을 가스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췄다.
요한은 등불로 발밑을 비추며 마차에서 내렸다. 대여 마차의 마부는 손님에게는 관심도 없는 태도로 말을 몰아 그 자리를 떠났다.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한이 타고 온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떠나자 사방에 온통 고요함만이 가득 찼다.
수도의 대로에 가로등이 설치된 것이 벌써 10여 년 전이지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에 귀가했다. 우아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풍조가 생긴 지는 조금 더 됐지만, 그런 거리는 이 구역에서 멀었다.
이런 시간에 이런 거리에서 움직이는 것은 야경꾼이 아니라면 노숙자와 주정뱅이뿐이다.
요한은 위빙 상단의 본점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이 거리에서 오로지 이 건물 하나만이, 최상층에서 희미한 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 협상이 결렬된다고 해도 배신을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황후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돌아가도 위험했다. 황후는 의심이 많았고, 그가 변명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지 않았어야 했는가.
요한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쪽지가 손끝에 걸렸다.
『노이 다이아몬드.』
불과 30년 전만 해도 다이아몬드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
그중 노이 광산의 다이아몬드가 가장 품질 좋고 훌륭한 것이었다. 채굴량은 점차 줄어드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품질도 하락하고 있었다.
다른 광산은 애초부터 노이 광산의 다이아몬드와 품질을 경쟁할 수 없거나, 채산성 자체가 너무 떨어졌다.
보석의 가격은 희소성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노이 다이아몬드가 채굴을 중지하게 되면 가격은 점프하듯 상승할 것이다.
그것을 기대하고 요한의 조부는 시장에 나온 노이 다이아몬드를 매점매석했다.
부의 흐름이 1차 산업에서 공업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순간의 일이다. 더 이상 지주 노릇만으로는 가문에 어울리는 부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크로지크 가문은 거기에 명운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클라우제너 공작령에서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연이어 발견되었다. 채산성은 전성기의 노이 광산보다 나았고, 품질은 비슷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를 상대로 다이아몬드를 매점하여 공급량을 조절한다는 전략은 쓸 수 없었다.
요한의 조부는 생산량 조절을 제안해 보았으나, 매장된 절대량이 너무 많았다.
희소성이 없는 보석은 더 이상 귀하지 않다. 그리고 주 소비층인 귀족은 귀하고 특별하지 않은 것을 원치 않았다.
다이아몬드가 더 이상 귀한 보석이 아니게 되면서, 크로지크 백작가의 미래를 건 투자는 금고에서 썩어 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위빙 상단의 주인이 생각 없이 다이아몬드 사업에 뛰어들었을 리 없어. 반드시 끼어야 해.’
요한은 어금니를 물고 문을 노크했다. 곧 상단주 로저 카슨이 문을 열었다.
“오셨군요.”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요한이 누구인지는 묻지도 않고, 그가 가스등을 들고 앞장섰다.
클레어 델포드는 2층의 가장 안쪽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로저가 가스등을 껐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했다.
“가스등 냄새를 워낙 싫어하셔서요.”
“예.”
전 같으면 그것도 정보로서 머릿속에 저장했을 테지만, 지금의 요한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무실에는 가스등 대신 환할 정도로 촛불이 잔뜩 켜져 있었다.
클레어는 소파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 뒤에 회색 머리의 변호사가 서 있었다. 왼편에는 크림색 곱슬머리의 낯선 남자가 공손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 요한을 보고 일어섰다.
클레어는 앉은 채로 요한에게 자리를 권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요한 경. 우리가 아마 구면이죠?”
“아카데미에서 교양 수학 강의를 함께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델포드 남작님.”
요한은 최대한 친근하게, 하지만 담백하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클레어가 남작이고, 자신이 백작가 출신이라고 해서 경시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클레어가 앞으로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남작이라 해도 그의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요한은 가문을 소중히 여겼으나, 그 자신을 가문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작위를 물려받은 가주와 상속받을 것이 없는 삼남 사이에는 충분히 신분의 고하가 있었다.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제가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을 텐데.”
“그건 남작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클라우제너 공작님과 싸우는 후배 여학생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죠. 후배도, 여학생도, 맞서서 지지 않는 사람도 말입니다.”
“어흠.”
그 말에 클레어가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요한이 빙긋 웃을 차례였다.
“그리고 공작님이 아니라도 남작님은 충분히 시선을 끌어들이는 분이었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싸늘한 시선이 삼중으로 박혔다. 요한은 어이가 없었다. 그레이 셔우드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로저 카슨 따위가 감히 자신을 노려보다니.
누군지도 모르는 평민 따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요한은 서류를 들고 있는 케이시 모리스를 일별했다.
케이시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클레어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요한의 시선을 다시 끌어들였다.
“다이아몬드 이야기를 하죠.”
그레이가 요한 앞에 서류 한 장을 내려놓았다. 요한은 그것을 펴 보았다.
거기에는 2캐럿 이하의 노이 다이아몬드를 모두 헐값에 위빙 상단에게 넘긴다는 계약서가 있었다. 부친의 서명까지 되어 있는.
요한은 침을 삼켰다. 웃으며 유혹과 아첨의 경계에 있는 말 따위를 던지며 재어 볼 때가 아니었다.
부친은 필요 없는 물량을 떠넘긴다고 생각하고 서명했겠지만, 이 계약서가 실행되면 아마 크로지크 백작가는 팔아 버린 물건의 가격이 치솟는 것을 입만 벌린 채 쳐다보고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다이아몬드 사업을 시작할 거예요.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계획을 갖고 있어요. 신문사를 사들인 것이 그 첫 단추라고 할 수 있지요.”
“예.”
“수요가 증가하면, 클라우제너 공작가만이 아니라 기존의 보석상들이 반사적인 이익을 보게 되겠지요. 크로지크 백작가처럼 대량으로 품위 높은 다이아몬드를 갖고 있는 곳이라면 더욱.”
클레어가 빙긋 웃었다.
“저는 귀족이기 전에 쫌생이 같은 상인이라, 소매상이라면 모를까, 노이 다이아몬드를 독점하고 있는 대귀족에게 큰 이익을 나눠 줄 수는 없답니다.”
“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요한은 긍정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계약서가 요한의 앞에 놓였다.
“이 계약이 성사된다면, 요한 경을 동업자로 여기고 첫 번째 계약서는 파기하거나, 필요한 물량만큼을 원할 때에 언제든 구매가에 돌려드리죠.”
요한은 계약서를 살폈다. 거기에는 그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모리스 감정평가 회사에 투자하고, 다이아몬드 감정 표준을 만드는 것에 협력하고, 모든 다이아몬드에 모리스 감정서를 붙일 것?”
그 외에 감정사의 교육과 홍보에 투자할 것 등이 적혀 있었다. 지분도 30프로나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약 상대의 명의는 케이시 모리스였다.
그는 당황해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가 태연하게 말했다.
“충분히 부유해진 평민이 보석을 구입할 수 있도록 만들 거예요. 광범위한 수준으로, 가능하다면 여유 있는 수도의 시민은 평생 하나 정도의 다이아몬드는 가질 수 있도록.”
클레어는 부연했다.
“그리고 그 전에 감정서와 가격을 표준화할 거예요. 특별히 안목을 기르지 않은 구매자라도 그게 합리적인 값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도록.”
“예.”
“만약의 경우에 일정 금액을 다시 건질 수 있도록 재매입을 보장해 준다면 좀 더 쉽게 손을 댈 수 있겠죠. 다행히 다이아몬드는 쉽게 상하지 않는 보석이지요.”
“평민에게…….”
생각지도 못한 발상에 요한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놀랄 것이 없었다. 문직물도, 장난감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어는 언제나 중산 계급을 대상으로 시장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깨달음을 얻고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해했나요?”
“이해했습니다.”
요한은 한번 목을 울렸다.
위빙 상단은 대성공이었고, 클레어 델포드가 그 외의 몇 가지 사업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이제 클라우제너의 힘까지 더해졌다. 실패할 리가 없었다.
클레어가 말했다.
“저는 언제나 동업자와 경영인에게는 역할에 걸맞은 충분한 대우를 해 주려고 애쓰고 있어요. 물론, 상대도 제게 그만큼의 성의를 보이기를 바라요.”
“이 계약서가 성립하면, 저는 더 이상 황후 폐하의 사람으로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사실 전 그냥 전부 사들여도 돼요.”
클레어가 웃으면서 첫 번째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별 이득도 없는데 크로지크 가문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지금 요한 경의 위치가 유용하기 때문이지요.”
요한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물론 단번에 굴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미남계로 정보를 빼다 바치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왕 클레어 델포드에게 붙을 거라면, 적어도 로저 카슨보다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게 아닌가.
그는 성급해 보이지 않도록 침착하게 물었다.
“제가 무얼 하길 원하십니까?”
“슈나이더 백작가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말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