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요한은 숨을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시작부터 이런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
‘황후가 슈나이더 백작가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그 정보를 알고 있다면, 그건 위빙 상단이 알고 있는 건가, 클라우제너가 알고 있는 건가.
전자라면 모르되, 후자라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클라우제너에서 황후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계승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황후가 슈나이더 백작가를 주시하는 이유는, 슈나이더 백작의 삼남이 황태자 시해 사건 때 휘말려 죽었기 때문이니까.
요한은 지금까지 그게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죽은 삼남은 황태자궁의 서기관에 불과했다.
딱히 황태자의 측근도 아니고, 슈나이더 백작가가 황태자파였던 것도 아니다.
감시의 시선은 느슨했고, 딱히 어떤 부분을 살펴야 한다는 지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굳이 감시를 했던 것은 편집증 탓이라고 요한은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최근 2, 3년 사이에 슈나이더 백작가에 대한 방침은 급변했다.
‘아니, 지금 내가 생각할 일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황후와 클라우제너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보전이 아니라 자신의 처세였다.
섣불리 머리를 굴리다가 걸리면 신용을 잃는다. 그러나 뻔한 내용만 말하면 능력을 의심당한다.
결국 그는 망설인 끝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은 연꽃 이궁 출입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그가 말할 수 있는, 그리고 클라우제너가 모를 만한 가장 비밀스러운 정보였다.
‘연꽃 이궁? 거긴 황후의 별장이잖아?’
여기서 황후가 왜 나오나.
클레어는 당황했다. 그녀가 슈나이더 가문에 대해 물은 것은 실은 이리스 때문이었다.
이리스가 드레스에 빗대어 암시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녀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상식적으로-물론 세상에 의외로 미친 인간이 많긴 하지만-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따위로 나올 수는 없는 거다.
이리스의 당당함을 생각해 보건대 뭔가 있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요한에게 물은 것이다.
에리히의 여자 문제에 대해 제일 예민하게 굴 사람이 루이자였기 때문이다.
에리히와 이리스 사이에 뭐가 없었더라도, 가문 사이의 약속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말이다.
어차피 자신이 에리히에게서 청혼에 이어 수레국화 열쇠까지 받아 버린 마당에 의미 없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게다가 이렇게 뒤로 정보원한테 질문해서 캐낼 것이 아니라 그냥 에리히한테 직접 질문하는 게 낫다.
그런데도 요한에게 질문한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오늘 이리스를 만난 다음부터 계속 그 문제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탓이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뭔가 클라우제너 내부의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과 황후의 이름이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황후의 첩자에게 질문했으니, 황후에 관한 정보가 나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거긴 한데.’
클레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요한을 바라보았다. 사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머릿속은 일단 접어 두었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라니.
슈나이더 백작 부인 카탸는 몰락 귀족 출신이다. 그나마도 확실하지 않았다.
본래 오페라 극장의 가수였다고 들었다. 예술 애호가라는 이름의 한량인 슈나이더 백작이 정부를 후처로 삼은 것이다.
이미 아들이 셋이나 있어 후계 구도가 탄탄하고, 또 나이 차 많은 막내 여동생을 오빠들이 귀여워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혈통주의자인 황후가 가까이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그런 소문이 있었다면, 클레어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업 때문에라도 귀는 늘 열어 놓고 있으니까. 그런 스캔들이 있었다면, 한 번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니 그 관계는 비밀이다.
황후가 백작 부인을 비밀리에 만날 이유가 무엇인가.
‘첩자인가?’
클레어는 눈을 내리깔았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재혼한 것은 20년은 된 일일 텐데.”
“17년 전입니다. 당시에 이리스 양이 여섯 살이었죠.”
케이시 모리스가 대답했다.
17년 전부터 황후가 슈나이더 백작의 옆자리에 사람을 들여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아니, 이리스의 나이까지 생각하면 23년 이상 전이다.
23년 전에 황후는 에른스트 공녀에 불과했고, 슈나이더 백작에게는 그럴 가치가 없었다. 슈나이더 백작가는 전통 있는 로멜의 귀족 가문이었으나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죽은 삼남 때문인가?’
클레어도 슈나이더 백작의 삼남이 황태자 시해 사건 때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중에 엘리엇의 친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죽은 사망자 목록을 몇 번이나 훑었으니까.
‘그 삼남이 설령 뭔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5년 전 일이야. 이미 백작 부인이 된 다음이지. 백작가를 감시하기 위해 백작 부인을 포섭한다는 건 논리가 안 맞아.’
고용인 중 하나를 포섭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클레어는 호박색 눈을 들어 요한을 바라보았다. 뇌 속을 파고들 것 같은 광채를 띤 눈이었다.
“경은 슈나이더 백작 부인을 감시하고 있나요?”
“아니요. 이리스 양이 대부인을 방문하면 알려 드리는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요한은 그 눈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클라우제너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녀는 지금 무엇을 추론하고 있는 건가?
압박감 때문에 등이 축축해졌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와의 관계를 지금대로 유지하세요. 굳이 배신하라고 하지 않겠어요. 보고도 지금까지와 똑같이 하세요.”
요한은 고개를 홱 들었다. 클레어는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두 번째 계약서를 요한 경이 아니라 크로지크 백작과 체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예요. 제가 바라는 것은 다만, 클라우제너 공작저에 대해 황후 폐하에게 보내는 것과 동일한 보고를 제게도 달라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요한이 긴장을 풀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계약서는 케이시가 챙겨서 이틀 안에 백작가를 방문할 거예요.”
“예.”
“로저, 요한 경을 모셔다드려.”
“예, 남작님.”
로저 카슨이 촛대 하나를 들었다. 요한은 일어서서 클레어에게 인사하고, 로저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군요.”
요한이 나가자마자 케이시가 말했다. 클레어는 가볍게 대꾸했다.
“뭐, 그러니까 매수가 되는 거겠지.”
애초부터 충성심을 기대하지 않았다. 매수한 첩자는 돈값만큼만 하면 된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그는 배신하지 못한다. 크로지크 백작가는 조만간에 경제적으로 다이아몬드 사업에 종속될 테니까.
그는 그 정도의 결과는 알아챌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사람을 꼭 쓰셔야 합니까?”
케이시가 다시 물었다가 클레어의 시선을 받고 어색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니, 감히 남작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여하고자 올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냥 첩자는 배제하는 게 낫지 않나 해서요.”
“방첩에는 그게 제일 간편해서야. 어차피 클라우제너 같은 거대한 가문에 첩자가 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요한 경을 포섭해서 치워 봤자 새로운 첩자가 들어오겠지.”
그러면 그것을 알아내는 데에 또다시 시간과 돈을 소모해야 한다. 그러느니, 이미 알고 있는 첩자를 손에 쥠으로써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는 쪽이 낫다.
저택의 나머지 첩자는 대부분 요한이 포섭하여 관리 중이니, 경제적이기도 했다.
“공작님께 말씀드리지는 않는 겁니까?”
“의붓어머니의 남자 문제잖아. 그런 일에 관여하기에는 너어어무 고결하셔서.”
클레어는 빈정거렸다. 에리히는 루이자 주변 인물들이 클라우제너의 구멍인 것을 알면서도 보호 외의 목적으로는 사람을 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루이자는 가문과 사업의 기밀에 접근하지도 못했지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요한이 그녀를 유혹해서 정보를 빼돌리고 있나 의심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황후가 관심 있는 건 클라우제너의 돈이나 사업이 아니라 정치니까.’
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승권이며, 계승권은 혈통의 문제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방치해도 문제가 없었다. 에리히는 그 두 가지에 관심이 없으니까.
아마 황실보다 클라우제너가 더 명예롭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엘리엇을 지키려면 내실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엘리엇이야말로 황후가 가장 싹을 밟고 싶어 하는 문젯거리 그 자체니까.
‘제발,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을 운 좋은 신데렐라라고 생각해 주면 가장 좋다. 차선책은 이 결혼을 돈줄과 돈귀신의 결합으로 생각해 주는 거다.
그나저나 연꽃 이궁이라니, 거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정보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슈나이더 백작가를 감시하기 위해 백작 부인을 포섭했다는 것은 역시 말이 안 되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어디에 쓸모 있을까?
‘이리스일까? 딸을 이용하기 위해 모친을 포섭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
그나마 제일 납득 가는 게 그것이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슈나이더 백작가에서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리스뿐이다.
문제는 포섭해서 어디에 쓰느냐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녀는 문득 케이시가 여전히 자신을 우러르듯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또 질문 있어?”
“아, 아니, 별것 아닙니다. 제가 어리석었구나, 싶어서요.”
케이시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뭐가?”
“처음에 남작님께서 레이디 이리스에 대해서 물으셨을 때 소문 때문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었거든요.”
“소문?”
케이시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움찔했다. 그가 입을 다물고 클레어 대신 그레이의 눈치를 보았다.
그레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결국 케이시가 대답하고야 말았다.
“염문이 있었지 않습니까? 클라우제너 공작님과 레이디 이리스가 결혼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마음만 지키기로 했다는 그…….”
“…….”
“헛소문입니다. 그 두 분은 사교계 제일의 결혼 매물인데, 혼기를 넘겨서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케이시는 재빨리 임기응변을 발휘했으나, 미소를 띤 채 굳어진 클레어의 입꼬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어…… 죄송합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케이시가 사죄했다. 클레어는 고기인 줄 알고 집었다가 생강을 씹은 사람 같은 얼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