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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263)

33화

에리히가 만찬장에서 나와 마차에 오른 것은 보름달이 거의 하늘 중앙에 올라와 어스름보다 오히려 환해진 시간이었다.

한 시간쯤 전에 호텔에 먼저 연락을 넣어 보았지만, 클레어는 귀가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위빙 상단으로 사람을 보내자, 거기 있다는 답신이 돌아왔다.

아마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을 것이다.

클레어는 모순된 여자다. 에리히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충 살 거라고 하면서, 진짜로 그런 적은 없었다.

대충 산다는 건 무능하고 쓸모없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핑계로 의무는 모르고 오로지 권리만 향유하는 귀족 놈들처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그런 상태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돼지 같은 귀족 놈이라.’

무심코 떠올린 표현에 에리히는 큭 웃었다. 그러는 클레어 본인도 귀족이건만.

하도 그런 식으로 말하니 그에게도 표현이 옮았고, 어쩌면 사고방식도 조금 옮았는지도 모르겠다.

예법을 싫어하고, 사교계도 싫어하고, 결혼에 의해 혈통을 유지하고 품위를 다듬고 권위를 챙기는 일을 모조리 내팽개쳤어도, 그는 클레어보다 귀족적인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결정하고 행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지 않았다. 굴종하는 일도, 스스로의 판단을 포기하는 일도 없었다.

공부는 팽개치곤 했지만.

설득과 통제도. 자신을 갈고닦는 일도 자주 내다 버렸지만.

아니지. 그녀는 그걸 내팽개친 게 아니다. 능력을 남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 몇 년이나 걸렸다. 에리히에게 겸손은 미덕이 아니었고, 남의 뒤에 물러나 선택을 미루는 것은 악덕이었으니까.

그러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어째서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지?]

아마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그날의 일을 에리히는 잊어버리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날이었는데도.

그날의 하루 전까지 클레어 델포드는 그냥 얼굴과 이름을 아는 후배였다.

통찰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교수가 어째서 그녀를 아끼고, 자꾸 연구실에 불러서 뭐라도 시키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에리히는 알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이름과 얼굴을 아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하지만 그날 중앙 로비에 나붙은 석차표를 보고 무심코 생각했다. 델포드라는 이름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녀가 일부러 낮은 성적을 받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클레어는 이렇게 대답했다.

[각하께 우수하고 유능하다는 말은 아주 멋진 장식이겠죠.]

[무슨 뜻인가, 그게?]

[각하에게조차 고작해야 장식인데, 저 같은 일개 남작 영애 따위가 높은 성적을 받아 봐야 어디에 쓸 수 있겠냐는 뜻이에요.]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눈동자가 그렇게 선명한 호박색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으니까.

그 눈동자 깊은 곳에 뿌려진 광채가 금편 같아서, 감정이 격동하면 강철을 화로에 담갔을 때 튀는 불똥처럼 확 빛을 발한다는 것도.

그것이 달군 칼처럼 눈에 박혔다. 에리히는 그때 자신이 무어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들이마셨던 열기가 가슴을 답답할 정도로 메워서, 오히려 방어하듯 울화가 치밀었던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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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위빙 상단의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리히는 마차에서 내려 마부에게 대기하라고 하고 혼자 본점 건물의 문을 두드렸다.

“……진짜로 이 시간에 오셨습니까?”

시간이 좀 걸려, 그레이가 문을 열었다. 에리히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도 이번 일에 관계하고 있나?”

“계약서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들어오십시오.”

그레이가 문가에서 물러섰다. 에리히는 그를 한번 쳐다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무실에는 여기저기 촛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래도 샹들리에와 거울로 밝힌 것만큼 충분히 밝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클레어는 사무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케이시가 에리히를 보고 일어나더니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에리히는 그를 흘깃 한번 쳐다보고는,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으응…….”

클레어가 일어서기 싫은 듯 뭉갰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에요?”

“호텔 쪽에 연락해 보니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기에, 내가 바래다주면 좋을 것 같아서. 심부름꾼이 오지 않았나?”

“왔어요.”

미리 보낸 쪽지가 서류의 산 위에 놓여 있었다.

“근데 솔직히 이렇게 이삼십 분 전에 보내는 쪽지로 약속 잡는 거 좀 그래요. 이게 미리 연락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더 빨리 보낼 방법은 없잖아.”

“약속은 한 일주일 전쯤에 잡아 줘요.”

“넌 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마침 지금은 하나도 안 보고 싶은 순간인데요.”

클레어가 말했다. 한 사흘은 안 보고 마음을 다스렸으면 했는데.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격일로는 방문하고 있는 이 남자가 그럴 리가 없었다.

전화는 언제 발명되는 걸까? 그러면 그걸 좀 핑계 삼아, 바쁘니 오지 말라고 한 다음 목소리만 단속해서 이야기하면 될 텐데.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였다. 전신조차도 아직 일부 지역에서 공무용으로 쓰이는 정도였다.

소식을 전할 방법이라고는 편지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같은 도시 안에 살면서 구혼자가 방문하는 것을 연이어 거절하는 건 파혼 예고처럼 보이는 일이었다.

“만찬은 괜찮았어요? 뭘 어떻게 말하든 혼외자를 장남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누군가가 그런 문제로 내게 시비를 걸 거라면, 아마 어머니를 부추기겠지. 방계 친척이나 가신이 아니라.”

“노이만 의장도?”

클레어는 클라우제너의 가신 중에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하원 의장의 이름을 꺼냈다. 에리히가 가볍게 대꾸했다.

“노이만 경은 진보주의자야.”

“찬성했다는 뜻 맞죠?”

“로멜의 지배 가문에 아렌 남작가의 피가 들어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보적인 일이지. 안 그런가?”

“그 감각이 평생 이해 못 할 부분이니까요.”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이야.”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게 진보라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건, 아렌의 일개 남작인 너와 클라우제너의 주인인 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되잖나.”

“뭘 새삼스럽게.”

에리히는 쓴웃음을 지으며 클레어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긴, 그래서 그녀와 있는 것이 즐거운 것이기도 했다. 입씨름 같은 것은 흔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클레어가 이번에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에리히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끌어당겨 자신의 팔에 얹으며 물었다.

“네 일은 잘 끝났겠지?”

“내가 지금 등에 업은 게 클라우제너인데, 크로지크 따위가 뭐 별거라고.”

“그것도 그렇군.”

클레어가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또 몇 마디 구시렁댈 줄 알았는데 말이 없어, 에리히는 도리어 의아해졌다.

“클레어?”

“왜요?”

“…….”

“실없긴.”

역시 뭔가 이상했다. 에리히는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클레어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는 민감했다.

“왜 화가 났어?”

“제가요?”

“너 지금 목소리 조금 높아.”

에리히가 지적했다. 지금도 그랬다. 평소의 클레어라면 ‘제가요?’라고 반문하는 대신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늘어놓았을 게 분명했다.

“전혀 아닌데요.”

“화났군.”

“아니거든요.”

클레어가 일단 부정했다가, 자기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덧붙였다.

“화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좀 피곤해서 그렇게 보이나 보죠.”

“흠.”

“오늘은 그냥 적당히 계약 조건 이야기나 하고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신경전을 좀 했거든요. 그래서 피곤한가 봐요.”

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 많은 것도 수상쩍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 있지 않은 말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마무리를 지어 버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뭐라고 말을 더 해 봐야 클레어가 순순히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전략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모르는 척한다는 선택지는 에리히의 사전에 없었다. 그건 지난 5년, 그리고 그 전의 3년으로 충분했으니까.

클레어는 마차에 탈 때까지 입을 다물고 평화로운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리히는 그녀를 마차에 올려 주고, 뒤따라 탄 다음 손수 문을 닫았다.

“이넨호프 호텔로.”

에리히는 마부에게 말하고, 다시 클레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어두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클레어.”

“아, 진짜 삭히는 거 성질에 안 맞네.”

에리히가 입을 열기 무섭게 클레어가 빠르게 내뱉었다. 그리고 휴우 한숨을 내쉬고, 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이리스 슈나이더랑 진짜로 무슨 관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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