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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263)

34화

정말로 신경 안 쓸 거였는데 말이다. 진짜로 옛날 애인 하나둘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몇 살인데. 이 정도 되는 남자에게 여자 하나 없었다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눈앞에 들이대진 상황에서는 또 눈을 돌릴 수 없는 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옛날 애인이 지금 나타나서 시비를 걸어도 속이 뒤집힐 판국에, 대체 진짜 그 드레스 뭐였는데?

하지만 에리히는 그녀가 쏘아붙이는 쪽을 어처구니없어하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슈나이더 백작가와는 할아버지 때부터 교분이 있었어. 특히 아버지는 이리스 어릴 때 귀여워하셨지.”

“진짜로 그게 다예요?”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에리히는 진심으로 물었다. 가족 단위의 교류였으므로 어릴 때는 종종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슈나이더 백작 본인이나 장남과는 귀족원이나 사교 클럽에서 친분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리스와는 아니다.

아내나 누이가 있었다면 그쪽을 통해 여자들끼리의 교제도 이어졌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소문이 아주 파다하다던데? 결혼하면 귀천 상혼이라 그냥 연인 관계로 남은 거라고?”

“내가 그런 문제로 왜 거짓말을 하겠나?”

클레어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 태도였다. 에리히는 슬슬 성이 났다.

“그러면 드레스는 뭐예요?”

“무슨 드레스?”

“그때 내가 입고 갔던 드레스 있잖아요. 당신 방에 있었던.”

에리히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클레어는 그때까지 약간의 짜증 정도로 억누르고 있던 화가 단숨에 치솟는 걸 느꼈다.

“그거 이리스 슈나이더 거라며.”

“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긴 했다. 지금 해야 할 이야기는 연꽃 이궁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열이 뻗쳐서 냉정한 이성이고 뭐고 없었다. 황후가 이리스를 이용해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성황청의 일이든 오페라 극장의 일이든 클레어와는 상관없었다.

클라우제너의 일이라면 그저 빡침을 적립시키는 일이었고 말이다. 에리히의 고용인이 준비된 것처럼, 침실에 있는 여자에게 이리스의 드레스를 갖다 준 건 명명백백한 사실이 아닌가.

“그때 설마 양다리였어요?! 말도 안 돼. 그런 줄 알았으면 절대, 읏.”

미처 말을 마치기 전에 에리히가 몸을 클레어 쪽으로 기울였다. 마차가 좁아서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어는 입술이 닿기 전에 숨을 먼저 멈췄다. 화를 내야 했지만, 에리히의 숨결이 닿은 입술 끄트머리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망설인 자와 그러지 않은 자 사이에서 승패는 쉽게 결정되었다. 클레어가 분개한 소리를 다시 내뱉기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흣.”

숨을 내쉴 타이밍을 빼앗겨 목구멍에서 미묘한 소리가 났다.

에리히가 손가락을 벌려 클레어의 머리카락 사이에 넣었다. 단정하게 올려놓은 뒷머리가 풀어졌다.

탁.

마부석이랑 통하는 나무창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클레어는 그의 입술을 깨물려고 했지만, 역으로 입술이 깊게 맞물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에리히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깍지를 끼었다. 클레어는 발끝이 오므라드는 것을 느꼈다.

맞닿은 자리가 뜨거웠다. 그녀는 조금 더 몸을 움츠렸다. 그녀가 물러난 자리를 점거라도 하듯 에리히의 무릎이 빈자리를 짚으며 그녀의 드레스를 구겼다.

쿵.

클레어의 등이 마차 문에 부딪혔다. 기울어진 몸을 에리히가 받쳤다.

자유로워진 클레어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헤매다가 결국 에리히의 옷깃을 쥐었다.

“하…….”

밭은 숨이 보드라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열기 때문에 입술이 발간색으로 변했다.

에리히가 그녀의 등을 훑어 허리를 받쳤다.

“나 화내던 중이었어요.”

“더 화내.”

“잠깐, 열 받게 해 놓고 그게 할 소리예요?”

“넌 화낼 때 제일 뜨거우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맞물린 입술도, 입천장도 뜨거웠다. 그것이 화가 나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불확실했다.

클레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아프도록 잡아당겼다. 푸른 보석을 불에 넣은 듯 달구어진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뭣 때문에 갑자기 이러는 거예요?”

“그 드레스는 그날 아침에 파벨보고 구해 오라고 한 거야. 네 옷을 내가 찢어 버렸으니까.”

“언제요?”

“일어나서.”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하.”

또다시 그가 입술을 내리눌렀다. 뺨과 눈가에 감촉이 남아 자꾸 생각이 끊겼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이 남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는 물어보면 알겠지. 이리스와 같은 의상실인 게 이상한가?”

“당연, 음.”

“좋은 곳에서 가져오라고 했으니 최고인 곳에서 사 왔겠지.”

간신히 에리히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는 데 성공하고서, 클레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 일어났던 거예요? 눈 뜨고 나를 깨웠던 게 아니에요?”

그날 에리히가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흔들어 깨웠으니까. 당연히 일어나자마자 놀라서 깨웠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침에 사람을 의상실에 보내서 옷을 확보하고 돌아온 거라면, 적어도 그 앞에.

“아니, 그러면 적어도 한 시간은 먼저 일어났단……!”

클레어는 말하다 말고 지뢰를 판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에리히가 피식 웃었다.

“왜? 네 자는 얼굴이 웃겼을까 봐?”

“그게 아니고요.”

클레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에리히는 저항이 사라진 그녀의 뺨을 감싼 채 가볍게 웃었다.

“질투하는 게 꼴사나울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안 그래도 돼. 너 혼자 그러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언제, 음…….”

에리히가 말을 이은 것은 몇 분이나 뒤의 일이다.

“나는 정혼자도 아닌 미혼의 영애와 사적인 교제를 하는 사람이 아니야.”

“와.”

클레어가 입을 동그랗게 모아 과장된 감탄사를 토했다. 그 뒤에 ‘지금 내 앞에서 그런 말을?’이라는 문장이 숨어 있었다.

염치가 없긴 한지, 에리히가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게 뭐라고, 클레어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에리히가 고개를 숙였다.

덜컹!

마차 바퀴에 뭐가 걸렸는지 몸이 튀었다. 클레어가 짧은 신음을 토하고, 에리히의 머리를 잡아 끌어 올려 그 목에 팔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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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는 더워서 잠이 깼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커튼을 통과하여 넓은 침실을 밝히고 있었다.

‘아, 외박했네.’

혼낼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는데.

‘술 때문에 어쩌다 보니는 개뿔.’

그녀는 자제력 없는 스스로를 욕했다. 어제는 술 한 방울 안 들어갔으니 핑계 삼을 것도 없었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안 봤으면 모르되, 다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있었다면 언젠가는 기어이 일이 터졌을 것이다.

“하아…….”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벗다 만 비단 양말이 걸려서, 그걸 다른 발가락으로 잡아 이불 밖으로 밀어냈다. 이 꼬라지를 하고 자고 있었다니.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제 발로 발목을 걸어 도로 이불 안으로 끌어들였다.

“더운데.”

클레어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에리히가 그녀의 귀 위쪽을 입술로 물었다. 클레어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뒤로 뻗었지만, 밀어낼 기력도 없어서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침대가 출렁거리고, 지나치게 푹신한 깃털 매트리스 때문에 허리가 아팠다.

땀에 젖었다가 그대로 잠든 몸도 찝찝했다.

생존을 위해 직장에 갈려 나가고, 내일은 없고, 높은 박탈감과 경쟁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고통스러운 프롤레타리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이럴 때였다.

노동력을 갈아 넣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명 발달이 필요할 때.

아무리 행복해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바닥에 촘촘히 깔린 보일러라든가, 에어컨이라든가, 하다못해 전기장판,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찜질팩이라도.

영화나 게임 같은 놀잇감은 됐으니까 제발 파스와 아세트아미노펜 좀. 그리고 스프링 매트도.

‘누가 허리 좀 밟아 줬으면 좋겠다.’

클레어는 졸음에 겨운 채 멍하게 생각했다.

좀 더 버티다 보니 허리가 아프다 못해 머리까지 아팠다.

클레어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리에 감긴 팔이 감금이라도 하듯 꽉 조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거 좀 놔요.”

“…….”

대답이 없었다. 지금 숙면 중일 리가 없는데 말이다. 방금도 건드려 놓고.

클레어는 손을 뒤로 뻗어 에리히의 귀를 만졌다. 그제야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냥 더 자. 해 뜨려면 멀었어.”

높은 코가 클레어의 귀부터 목까지 비비듯 쓸고 내려와 옆 목에 파묻혔다. 평소에는 단정하게 넘기고 다니는 머리칼이 클레어의 귓가와 뺨을 간질였다.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이 풀리는가 싶더니 검지와 엄지가 클레어의 뺨과 입술을 어루만져 왔다.

그러나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도로 가슴 위로 팔을 감아 구속하며 제 품으로 쓰러뜨렸다.

클레어는 그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렇지만 반응이 없어서, 이번에는 팔꿈치로 배를 탁 쑤셨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팔이 단단한 복근에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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