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263)

35화

“침대 때문에 코어 운동한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잠에서 완전히 깬 에리히가 어이없음 8할에 불쾌감 2할이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허리 안 아파요?”

“…….”

에리히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침대 안에서까지 신사 노릇 할 수는 없어.”

“누가 그런 이야길 해요?! 언제 침대 밖에서는 신사적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클레어는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에리히의 팔이 풀렸다. 그러나 클레어가 빠져나갈 정도는 아니고, 딱 몸을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여유만 내준 것이었다.

수작이 뻔했지만, 허리가 아파서 그거라도 움직여야 했다. 클레어는 낑낑거리며 돌아누웠다.

그러자 마주 끌어안는 자세가 되었지만, 이 정도로 민망해하기에는 이미 해 버린 일이 너무 많았다.

“이런 침대에서 자면서 허리 안 아프냐고요, 진짜.”

도대체 언제 적 물건일까. 오래되었을 것이다.

품위 있는 가문의 가구는 대부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 방에 있는 모든 가구가 3백 년 묵은 것이라고 해도 클레어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5년 전에도 잠깐 이 침대에서 잠들었던 적이 있지만, 그때는 진탕 취한 채여서 몰랐다. 사실 허리만 아픈 것도 아니었고.

“이 침대, 혹시 바닥이 로프예요?”

“아마 그렇겠지.”

“침대 살래요.”

“…….”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봐요? 선배가 침대 부술 것 같다고 말한 거 아니거든요?”

“내가 뭘.”

살짝 치켜 올라갔던 에리히의 눈썹이 도로 부드럽게 내려갔다. 클레어는 그 눈썹꼬리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죠.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고요.”

에리히의 얼굴이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변했다. 클레어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목화솜의 시대는 활짝 열려 있었다. 단단한 나무로 프레임을 만들고, 솜을 꽉꽉 채운 요를 깔 것이다.

델포드 남작저의 침대는 이미 그걸로 다 교체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처음에 고조부가 재산으로 장만한 귀한 침대를 치우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으나, 특별히 만든 온돌 침대와 그 위에 두툼하게 깔린 목화솜 요를 겪어 보고 두말하지 않게 되었다.

‘역시 오래 쓸 걸 생각하면 온돌 침대지.’

스프링 매트도, 라텍스도 없는 이상 그게 유일한 선택지였다.

침대 밑에 화로를 넣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서 돌을 데우면 된다. 연기가 적게 나는 숯을 쓰거나, 아니면 아예 연통을 벽난로 기둥으로 빼서…….

‘돈은 많으니까 충분히 되겠지? 근데 무려 상아궁씩이나 되는 건물을 개조해도 되나?’

생각을 굴리며 침실을 살피다가 클레어는 에리히가 아주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왜요? 내가 뭐 좀 손대면 안 돼요? 이제 어차피 절반은 내가 쓸 건데.”

“아니. 난 네가 네 구역을 따로 만들 줄 알았는데.”

“서재랑 집무실은 필요하긴 하죠. 침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에리히가 선뜻 대꾸하지 못하고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당연한 일이라서, 좋고 싫음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부부가 금실이 좋든 나쁘든 서로 다른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집이 작거나 대가족이라 부부의 공간을 만들 여유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에리히의 세상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밤을 함께하는 일시적인 시간이나, 여행이나 타인의 집을 방문하는 일로 잠시간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줄곧 써 왔고 앞으로도 평생 몸을 누일,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장소에 그녀가 있다는 것이.

아니, 클레어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그것을 맹렬하게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싫으면 말고요. 어차피 방 많이 남는데.”

대답이 쉽게 돌아오지 않자 클레어가 툴툴대며 말했다.

“굴러들어 온 돌이 가구도 갈아치우고 공간도 절반 차지하면 불편할 수도 있죠. 이해해요.”

“아냐. 그게 좋아.”

클레어가 말을 바꿀까 봐 그는 격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그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에리히는 그녀를 품에 가두듯이 다시 끌어안고 몸을 뒤집었다. 베개 위에 클레어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잠깐, 허리 아프다니까요!”

“내가 아니라 침대가 문제라며?”

“아니, 그쪽도 문제거든요? 아프다는 게 어디 딱 한 가지 이유로만 그러는 건, 으음.”

클레어의 손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 묻혔다.

에리히가 만족스러울 만큼 키스하고 났을 때에는, 그녀는 잠깐 자면서 충전했던 기운이 다 빠져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나 이제 일어나야 돼요.”

“더 누워 있어. 어차피 아침까지 시간은 넉넉하니까.”

“안 넉넉해요. 로저한테 시킨 일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야 한단 말이에요. 새로 차린 회사 일도 있고.”

“내일 해.”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있으니까.”

“열심히 살아 봐야 별로 의미 없는 세상이니 대충 편하게 살겠다던 게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겠군.”

“내일의 편안함을 위해서 오늘 조금 고생해 두는 거죠.”

클레어도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신은 원래부터 답답한 것을 참지 못했다.

일을 맡길 만한 완벽한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내일이 되면 또 모레의 편안함을 위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워라밸 망했네.’

피눈물이 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렸지만, 에리히가 그녀의 몸을 덮듯이 하고 누워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카슨에게 전부 맡겨.”

말하면서도 그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로저 카슨이나 그레이 셔우드를 더 신뢰하고 맡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믿지 말고 직접 일하라고 말하면 같이 있을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거대한 딜레마였다.

클레어가 이내 포기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놀지 뭐. 내일부터 죽어 나가도, 그건 내일의 나니까.”

“사람을 좀 더 쓰지?”

“믿을 만한 사람이 뭐 그리 흔하게 있나요? 돈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델포드는 클라우제너랑은 달라서 충성스러운 가신들 중에서만 뽑아도 인재가 우글거리는 곳이 아니니까.”

델포드 남작가의 가신은 거의 없었고, 유능한 아카데미 졸업생은 대부분 다른 가문 소속이거나 후원자가 따로 있었다.

전근대적이라는 건 이런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증인이 없으면 신원조차 확실히 알기 어렵고, 신용을 담보하는 건 혈연과 지연이 아니면 개인의 명예였다.

유능하다 싶어 눈여겨보면, 애초부터 영업 비밀을 빼 갈 생각인 놈이 태반이었다. 자기 사업을 차리든, 자기 주인에게 가져다주든.

‘산업 스파이 아냐? 사실상.’

그런 개념조차 확고하지 않은 시기니까 법대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없고 말이다.

로저 같은 사람이 찾아왔던 것은 행운이라고 멀거니 생각하다가 그녀는 문득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에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쉴 때는 확실히 머리를 비우는 쪽이 좋을 텐데.”

“맘대로 안 되니까 그렇죠.”

“그러면 운동을 좀 더 하는 것도 괜찮겠군.”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운동 기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어찌나 선배가 잡고 흔들어 대는지.”

에리히는 그 말에는 부정도 하지 않고 킥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그런데 호칭 말이야. 이제 바꿀 때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르려고?”

“아.”

“남들 앞에서는 잘 부르는 것 같더니.”

“그게…… 왠지 어색해서.”

클레어가 발갛게 물든 뺨에 손등을 댔지만, 손도 따뜻해서 식힐 수 없었다.

에리히가 그 손을 잡아 손가락 끝을 입술로 물었다.

올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에 새벽빛이 깃들듯이 명암이 드리워져 한층 깊어졌다. 클레어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갑자기 기억이 총체적으로 밀려왔다. 술기운을 빌려 까맣게 잊고 있었던 5년 전 것까지.

클레어가 갑자기 가쁜 숨을 내쉬자 에리히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날 위스키를 손에 흘렸던 게 기억났다. 손수건을 찾는데, 에리히가 자기 손수건을 찾아 건네려는 듯하다가 술에 젖은 손등에 입을 맞추고, 혀를 댔다.

손끝이 그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자신이 그의 머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입술이 닿고, 바닥을 굴렀다. 마차를 탔을 때는 이미 드레스가 망가져 있었다.

마부석과 통하는 창을 닫고, 마차가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내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도둑처럼 뒷문으로 들어와 이 침대에 뛰어들었다.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이러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머리를 싸쥐고 비명을 질렀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비명을 지를 때가 아니라 몸속 깊은 곳에 뭉치는 열덩어리에 신음할 때였다.

클레어의 반응을 깨달은 에리히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바쁘게 오르내리는 그녀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렇게나 기대하고 있는데, 부응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진짜.”

클레어는 자잘한 복수심을 담아 그의 앞머리를 아플 정도로 잡아당겨 엉망으로 헝클어 놓았지만, 그래 봤자 거만하게 잘생긴 남자가 흐트러진 잘생긴 남자가 되었을 뿐이다.

“선배는 민주주의의 적이에요.”

“갑자기 무슨 허튼소리야?”

“아, 몰라.”

에리히도 그 와중에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클레어.”

눈꺼풀까지 열이 올라왔다. 클레어는 에리히의 뺨을 미는 건지 감싸는 건지 스스로도 모르겠는 기분으로 그의 얼굴에 손바닥을 댔다.

“이따 일어나면 옷 사 줘요. 남의 걸로 만든 거 말고.”

“그래.”

“의상실 통째로 싹쓸이할 거야.”

“알았다.”

“같이 가야 돼요.”

“…….”

“대답.”

“……그래.”

클레어는 기분이 좋아져서 까르르 웃었다.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좀 취한 기분이었다.

그 취기는 곧 열과 뒤섞여 몸속까지 흠뻑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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