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11. 혈연
이모가 집에 오지 않았다.
엘리엇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가 큰 사고를 쳤을 때 클레어가 하는 버릇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길을 잃어버린 게 틀림없어.”
“아니에요, 도련님.”
마사가 방글방글 웃으며 부정했다.
간밤에는 소식이 없어 마사도 걱정했다. 하지만 오전 일찍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심부름꾼이 왔다.
클레어는 그곳에서 밤을 보냈고, 오늘은 쇼핑을 하고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이왕이면 어제저녁에 알려 주지 싶긴 했지만, 그 자체는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부부 금실이 좋을 것 같아 그저 흐뭇할 따름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한 엘리엇만 발을 동동 구르며 이모가 집에 오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 공작님 집에서 주무셨대요.”
“아저씨네 집에서?”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모도 놀다 잠들어?”
“어머.”
제 경우를 생각하고 하는 말일 테지만, 다른 의미로 들렸기에 보모가 까르르 웃었다.
어른들이 왜 웃는지 엘리엇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억울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저씨 나빠. 나랑도 친구라고 해 놓고 이모랑만 놀았어.”
잔뜩 부루퉁한 채 엘리엇은 투덜거렸다. 진심 가득한 말이었지만 마사도, 보모도 그냥 아이의 투정으로만 듣고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더 분해서 엘리엇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마사가 그제야 허둥지둥 엘리엇을 보듬어 안았다.
“아이구, 우리 도련님, 서운하셨구나.”
“웃지 마, 유모 미워! 제니도 미워!”
엘리엇은 앵돌아져서 마사를 팩 밀어내고는 소파에서 팔짝 뛰어내렸다.
제 방으로 타박타박,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가는 뒤를 마사가 웃음을 참으며 뒤따랐다.
엘리엇은 방으로 쏙 들어가면서 마사 앞에서 문을 쿵 닫았다.
“아유,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
“어쩔 수 없지요. 아마 주인님이 도련님만 두고 외박하신 거 처음이시지요?”
“일이 바빠서 잠자리를 돌봐 주지 못하신 적은 간혹 있지만, 집에 안 계셨던 적은 없지. 델포드에서는 항상 서재에서 사람을 만나셨으니까.”
하지만 수도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결혼식 준비도 있고, 약혼자도 있으니.
방에서 엘리엇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흥. 나만 따돌릴 수 있을 줄 알고?”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이 데리러 가야겠다. 그리고 아저씨에게는 한소리 해 줄 것이다. 우리 이모 뺏어 가지 말라고.
이모부가 된다는 게 둘이서만 논다는 뜻인 줄 알았으면 절대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엇은 한참 침대에 엎드려 계획을 세웠다. 그래도 달래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진짜로 서러워졌다.
‘이모한테 화낼 거야!’
엘리엇은 단단히 작정하고 다시 발딱 일어섰다.
방문을 빼꼼 열어 보자 마사가 창가에 앉아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보모는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엘리엇은 까치발을 하고 살그머니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마사가 부르기 전에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엇이 막 1층 로비로 뛰어나가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벨보이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도련님?”
“몰라도 돼!”
몰라도 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간격을 두고 몰래 따라오던 보모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벨보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예에’ 하고 엘리엇을 보내 주었다.
엘리엇은 타닥타닥 뛰는 듯한 걸음으로 호텔 밖으로 나가다가 입구에서 들어오려는 사람과 쾅 부딪쳤다.
“아앗!”
“아이쿠, 도련님.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뒤로 넘어지려는 엘리엇을 붙잡아 덜렁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로저 카슨이 물었다.
“아, 로저!”
엘리엇이 마침내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난 사람처럼 애절하게 외쳤다.
세상 서럽게 울먹이는 엘리엇의 등을 토닥이며 로저가 숨어 있는 보모와 눈짓을 교환했다.
그다음 엘리엇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서러운 일 있으셨어요?”
“이모가 어제 집에 안 왔어. 근데에…….”
엘리엇이 로저한테 하소연했다. 로저는 ‘그러셨군요’ 하고 엘리엇의 호소에 맞장구를 한참 쳐 준 다음 말했다.
“그러면, 모시러 갈까요?”
“로저가 같이 가 줄 거야?”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물론 언제든.”
로저는 싱글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의 머릿속에는 엘리엇을 보살펴 준다는 것 외에도 다른 수작이 있었다.
어른의 시간을 방해하는 데에 아이만큼 좋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아이가 끼는 순간부터는 아이의 시간이다.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사람이라면 더더욱.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담벼락이 높다지만, 설마 장남이 될 핏줄 앞에서까지 높을까? 그럴 리가.
로저는 엘리엇을 훌쩍 올려 안고, 그렇게 멀리 보낼 계획은 없었기에 당황하는 보모에게 손짓으로 괜찮다고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즐겁게 밖으로 걸음을 향했다.
그 시간에 이미 에리히와 클레어는 외출해 있었다.
“그런데, 꼭 의상실로 가야 하는 건가? 그냥 사람을 부르는 게 낫지 않나?”
“그러다가 또 남의 옷을 빼앗아 입는 꼴이 되고 싶진 않아요.”
“파벨이 확인도 시켜 줬잖아.”
“안 믿는다는 거 아니에요. 그냥 그걸로 속상했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도 할 말 있어.”
“뭔데요?”
“…….”
“할 말 있다면서요. 나는 진짜 오해 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에리히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클레어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아, 뭔데요? 이야기해요. 괜히 오해 쌓아 놨다가 나중에 삐치지 말고.”
삐친다는 표현에 에리히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클레어는 깔깔거리며 그 눈썹 끝을 손으로 내렸다.
“나는 너처럼 네 옛날 애인 하나둘에 연연할 생각 없어.”
“아하.”
“구혼자에게도.”
뒤늦게야 에리히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거기서 꺼내고 싶은 단어는 따로 있었지만, 차마 체면상 숙녀의 과거를 물을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화려한 사륜마차가 의상실 에델바이스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마자 의상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재단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비서가 마차 문을 열었다. 에리히는 먼저 내려 클레어를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그녀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망토를 끌어당겼다.
비서가 일찍 의상실을 털어 오는 걸 거부했더니 레이스가 뜯기고 늘어난 드레스밖에 입을 게 없었다.
결국 그 위에 에리히의 망토를 걸쳐야만 했다.
의상실 주인이 공손히 인사했다.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델포드 남작님. 미리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주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클레어도 웃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 환영해 주셔서 고마워요. 저희가 영업방해를 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작님의 옷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로텐부르크의 모든 의상실이 기꺼이 문을 닫을 겁니다. 다른 손님들께는 양해를 구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이 들어가자마자 재단사들이 문을 닫고 영업 종료 팻말을 걸었다. 아마 마차가 도착하기 전에도 걸려 있었을 것이다.
클레어는 즐겁게 웃었다. 이게 바로 VVIP의 기분인가.
그녀도 돈은 많이 벌었다. 하지만 위빙 상단의 돈은 버는 족족 다 재투자해야만 했다.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돈 달라는 곳이 너무 많아, 짹짹거리는 새끼들한테 허둥지둥 먹을 걸 물려 주는 어미새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진정한 부자의 후광을 입으러 왔다. 소박한 섬유 회사 주인은 땅에서 돈을 캐는 왕족 앞에서는 초라한 서민에 불과했다.
의상실 주인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빠르게 클레어의 옷차림새를 살핀 다음 말했다.
“우선은 당장 입으실 데이 드레스가 필요하시겠군요. 마침 남작님께 꼭 어울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조금만 손보면 될 겁니다.”
“아, 저 때문에 남이 미리 주문한 드레스를 찾아가지 못하는 건 싫어요. 그런 건 한 번만 겪어도 되는 일이거든요.”
의상실 주인의 얼굴에 미묘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공으로 수도 사교계에서 유명한 의상실이 된 게 아니었다.
이곳은 이리스 슈나이더의 단골 의상실이었고, 5년 전에 파벨이 드레스를 가져온 곳이기도 했다.
5년 전 일이지만, 에리히의 비서가 새벽 나절에 여자 드레스를 억지로 사 간 게 흔한 일은 아니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 의상실 주인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입에서 준비된 비즈니스 멘트가 나왔다.
“염려 마십시오. 신문에서 남작님의 자태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저희 의상실에서 가장 숙련된 디자이너들이 쏟아지는 영감 때문에 옷감을 두루마리 단위로 낭비하고 있답니다.”
“어머, 반갑네요.”
“물론 위빙 상단에서 나오는 옷감은 저희가 최근에 많이 권하는 원단이기도 합니다. 무늬가 들어간 무명은 화사하면서도 튼튼하니까 아이 옷이나 일상복으로 많이들 찾으시지요.”
아첨이 단술처럼 쏟아졌다. 클레어는 그 말을 대강 흘려들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주력으로 쓰고 있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태도는 흐뭇했다. 특히나 지금은 더.
“옷감은 귀한 것이니, 낭비하면 곤란하지요. 그 영감을 받아 만드셨다는 것 전부를 사고, 그리고 지금 이 의상실에 있는 남는 원단 전부를 다 쓰고 싶어요.”
“전부…… 말씀입니까?”
“전 옷이 아주 많이 필요하거든요. 가진 옷 중에 클라우제너 공작가에 어울리는 품위를 가진 것이 거의 없어서요.”
클레어는 에리히의 팔을 잡아당겨 팔짱을 끼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되죠?”
가장된 태도에 에리히가 살짝 인상을 썼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상실 주인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시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공작 각하, 남작님. 두 분의 시간이 낭비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권유받은 자리에 앉자, 주인은 소파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수 시가와 다과를 세팅했다.
주인이 만들어져 있는 옷부터 보여 주겠다며 준비하러 간 사이에 에리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도 사업인가?”
“일부는요.”
“나머지는 뭐지?”
“염장질이요.”
남 앞에서 유난을 떠는 것은 클레어도 썩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누군가는 부들대리라. 생각만 해도 꿀잼이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저쪽이었으니, 이 정도 보복은 사소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