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엘리엇을 데리고 클라우제너 공작저를 습격하겠다는 로저의 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발 앞서 전갈을 보냈는데, 그 심부름꾼이 되돌아와 이미 두 사람이 외출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클라우제너 공작저까지는 가지도 못하고 로저는 한길가에서 말을 멈췄다.
“지금 저택에 있는 건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뿐인 것 같습니다.”
“쯧쯧.”
그렇다면 엘리엇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로저는 어른들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은 거지, 엘리엇을 그 무시무시한 대부인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주고 싶은 게 아니니까.
“웅, 이모랑 아저씨랑 벌써 집에 갔어?”
이야기를 주워들은 엘리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모랑 떨어지면 길이 어긋날지도 모르니까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해.”
엘리엇은 대답했다. 평소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화는 이미 누그러져 있었다. 로저가 억울한 이야기를 다 들어 주고, 계속 아저씨가 나빴다고 같이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처럼 마차가 아니라 높다란 말 등 위에 태워 주었다. 사실 엘리엇은 신나서 왜 화가 났었는지도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다.
로저가 싱글싱글 웃었다.
“그러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도련님. 이번에는 이모님을 걱정시켜 보죠.”
“웅…….”
‘그래도 되나?’ 하고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러 가요. 기가 막히게 맛있는 소다수를 파는 집을 아는데, 그걸 마시러 가죠.”
“진짜?”
엘리엇이 신나서 소리쳤다. 시럽이 몸에 안 좋다고 좀처럼 허락받을 수 없는 음료였다.
“갈래!”
“남작님한테는 비밀 지키시는 겁니다. 우리는 가서 우유만 마신 거라고 하는 거예요.”
“응! 빨리!”
엘리엇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로저가 개구쟁이 삼촌처럼 웃으며 말을 빠른 걸음으로 걷게 했다. 엘리엇이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주문하신 레몬 소다수가 나왔습니다.”
휘장이 쳐진 자리 안에서 시종이 나와, 종업원에게서 쟁반을 대신 받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은 흘끔흘끔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얼핏 휘장 사이로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보였다. 귀족 같았다.
생긴 지 올해로 10년이 된 이 음료 가게는 한때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만큼 유명했다. 그러나 티룸이나 커피하우스 같은 품위가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귀부인이 들어올 만한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진짜 귀족은 가짜로 만든 소다수가 아니라 약천에서 나오는 진짜 발포수를 코르크로 봉인해서 가져다 마시는 법이었다.
그런데 휘장 안쪽에 있는 사람은 그 중년 여인보다도 더 신분이 높아 보였다. 심지어 자리를 가리고 있는 휘장은 원래 가게에 있던 것이 아니라 시종들이 미리 가져다 친 것이었다.
종업원은 흘끔거렸지만, 안에 누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
어깨 넓은 호위가 종업원을 바라보았다. 종업원은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특수하게 만들어진 휘장은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이 제법 잘 보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늙은 아렌 공왕이 레몬 소다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느냐?”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여러 사람이 곤란해할 줄 아시면서 굳이 이런 곳까지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아멜리아 무어 공작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공왕의 사촌인 무어 노공작의 딸이었다.
“아렌의 신민들이 모두 공왕 전하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말이었다. 로멜과 아렌이 합병한 이래, 아렌 공왕가는 로멜의 지배 가문으로 인정받았으나 황실과는 달랐다.
통치권을 가진 것은 황제지, 공왕이 아니다. 자칫하면 아렌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그 지독한 마르고트 황후라면 일부러라도 그렇게 해석하여 공왕을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호위도, 시종도 나서서 말리거나 막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할 만한 신분이 아니었을뿐더러, 모두가 무어 공작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왕이 차가운 소다수 잔을 어루만지며 느릿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제러드의 꿈을 꾸었단다.”
“전하…….”
“다섯 살이었는데, 제 또래 여자아이 손을 잡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떼를 쓰더구나. 오랫동안 그 애 꿈을 꾸지 않았는데.”
공왕이 소다수 잔을 끌어당겨 한 모금 마셨다.
레몬시럽에 설탕을 더 들이부은 단물에 식초와 소다를 넣어 만든 음료에서는 싸구려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가 더없이 사랑하던 손자는 이 가게에 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가끔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소박한 옷을 입고 친한 소년들과 어울려 시장에 간 일을. 소다수를 마시고, 유리공예 장신구를 사서 여자아이에게 선물했던 것도.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제 여자친구를 그 소다수 가게에서 만났답니다.]
[호오.]
[너무 예쁜 사람이라서 한눈에 홀렸어요. 할아버지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제러드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하나뿐인 외동딸이 남긴 사랑스러운 외손자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다.
딸을 잃었을 때에는 세상의 모든 희망이 꺼진 듯했는데, 그 아이가 다시 빛처럼 세상에 불을 밝혔다. 그렇게 즐겁게 웃으며 살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또다시 그렇게 잃어버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온통 사방에서 연애결혼 이야기를 해 대니 그런 게지. 살아 있었다면, 그 애도 결혼을 했을 거야.”
“공왕 전하…….”
“꼭 저를 닮은 아가를 데리고 날 보러 왔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잠들었더니, 그런 꿈을 꾼 모양이라.”
황태자 시해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아렌 공왕은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매일 눈을 뜰 때마다 늙은 몸 하나 살아 유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하곤 했다.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전하께서 홀로 슬퍼하실 일이 아닙니다.”
무어 공작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전하께서 어떻게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지켜 내시지 못했는데요.”
“그렇지. 내가 이 일을 막으려면, 헨리에타가 황후가 되는 것부터 반대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말에 무어 공작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로멜-아렌 계승법, 로멜 황실과 아렌 왕가 사이에 약속된 혼약은 어떤 법보다 우선하는 특별법이자 아렌인을 위한 것이었다.
아렌의 공주를 로멜의 황후로 만들고, 자녀들의 이름을 아렌 식으로 짓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렌이 오래지 않아 로멜에게 잡아먹힐 것이 명백했기에, 당시 아렌 여왕이 결혼 합병의 첫 번째 조건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니 아렌 공왕가에 혼기 찬 딸이 있는데도 황실에 시집 보내지 않는다면 무어 공작 자신부터 나서서 비난했을 것이다.
“헨리에타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니? 에른스트 공녀가 그런 사람인 줄은 그때에는 아무도 몰랐고.”
아렌 공왕은 마르고트 황후의 호칭을 결혼 전 것으로 말했다.
“제러드가 그렇게 죽을 줄도…… 아무도 몰랐으니까.”
무어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헨리에타 황후가 죽은 것이 정말 산고 때문이었을까? 이제 와서는 그것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아렌 공왕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의심하며 고통스러워했을 사람이 바로 아렌 공왕이기 때문이다.
아렌 공왕은 잔 안에서 퐁퐁 솟는 거품을 들여다보았다. 삶이 거품 같기도 하고, 회한이 거품 같기도 했다.
매번 온당한 결정을 하기 위해 애써 왔지만, 그 결말에 남은 것이 늙은 몸 하나뿐이다. 그러니 제가 걸어온 길이 온통 전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황제도 원망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그와 똑같은 고통을 아는 것은 오로지 황제뿐이기 때문이다.
[제 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실 분이 세상에 오로지 장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제러드의 방 가구에 흰 천을 덮는 것을 바라보면서 황제는 그런 말을 했었다.
아렌 공왕은 짓무른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헨리에타가 죽었을 때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마음만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러드도 없지 않습니까? 이 마음속에만 지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지옥이더군요.]
황제는 느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그런 줄을 알았더라면, 그냥 전부 쳐 죽였을 텐데.]
[폐하께는 또 한 사람의 황자님이 계십니다.]
[헨리에타의 아이가 아니잖습니까?]
[폐하의 아드님입니다.]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황제가 킥 웃었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대며 웃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고 거품처럼 꺼졌다.
그리고 종내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공왕은 그때 황제가 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미치지도 못했고, 자식을 따라가지도 못한 몸이 무어라고 황제를 원망한단 말인가.
아렌 공왕의 슬픔이 너무 깊어, 무어 공작은 위로의 말조차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휘장 밖에서 작은 소란이 들렸다.
“앗, 도련님, 그렇게 뛰시면 안 됩니다.”
“악!”
비명소리가 나고, 아이가 콰당 넘어졌다. 하필 휘장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흐, 흐아아아앙!”
아이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보호자인 듯한 키 큰 남자가 달려오자 호위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까지는 괜찮지만 낯선 자는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냥 두어라. 어린아이가 넘어진 것뿐…….”
아렌 공왕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가 숨을 멈췄다.
오렌지색 소다수를 뒤집어쓴 아이가 통곡하듯 울고 있었다. 나무로 된 어린이용 컵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아니…….”
아렌 공왕은 저도 모르게 휘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옷이 얼룩지는 것도 모르고 황급히 아이를 안아 올렸다.
“제러드……?”
딸꾹!
낯선 사람에게 안기는 바람에 깜짝 놀란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