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렌 공왕은 주름진 손을 떨면서 아이의 얼굴을 만졌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잊어버렸어도 그가 어떻게 외손자의 얼굴을 잊었겠는가. 한스럽게 잃어서 그런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생생해졌다.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카락과 하얀 이마, 맑은 가을 하늘빛 눈동자와 통통한 뺨에 도는 홍조까지, 꼭 어린 제러드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전 제러드가 아니고 엘리엇이에요.”
엘리엇이 또박또박 말했다. 아직 커다란 눈동자와 뺨이 모두 물기에 젖어 있었지만, 놀란 눈물은 멈춘 모양이었다.
아렌 공왕은 멍한 채 기계적으로 아이의 젖은 뺨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봐도 제러드인데, 제러드가 아니라고?
“전하.”
시종 하나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아렌 공왕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휘장 너머에서 그가 남기고 나온 레몬 소다수가 엎질러져 주르륵, 테이블 밑으로 끈적끈적한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내려 주세요, 할아버지.”
“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목소리까지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아렌 공왕 전하, 무엄한 줄 아오나……!”
당황한 로저가 호위에게 몸이 막힌 채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아이는 델포드 남작가의 엘리엇 님입니다! 곧 클라우제너 공작가로 들어가실!”
“아, 에리히 공의…….”
“아저씨를 알아요?”
낯선 사람에게 안기는 바람에 약간 긴장하고 있던 엘리엇이 방긋 웃으며 되물었다. 아는 사람의 친지라고 생각하자 경계심이 사라진 것이다.
아렌 공왕은 목을 몇 번이나 울렸다.
에리히에게 혼외자가 있고, 꼭 닮았다는 소식은 그도 들었다. 제러드와 에리히도 성격은 달랐을지언정 얼굴은 서로 많이 닮아서, 제러드가 어렸을 때 에리히의 초상화를 보고 자기 초상화라고 우겼을 정도였다.
그러니 에리히의 아이가 제러드를 닮은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꼭 작은 제러드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앗, 할아버지, 왜 울어요? 할아버지?”
엘리엇이 어쩔 줄을 모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모나 유모나, 가까운 사람이 슬퍼할 때 이렇게 해 주면 눈물을 그치거나 고맙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 공왕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이렇게 사람의 눈이 많은 곳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5년 동안, 그리고 그 전의 20년 동안 숨겨 온 슬픔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 아이를 안은 채로 주저앉았다.
그즈음에 클레어는 의상실을 네 개째 해치운 뒤였다.
마차에 오른 뒤에 길고 긴 리스트에 체크를 하자 에리히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사면 안 되나?”
“지금 목적어가 ‘옷’이 아니라 ‘의상실’이죠?”
“뭐면 어때? 나머지는 사람을 부르지. 설마 그 리스트의 의상실을 전부 들르려는 건 아니겠지?”
“피곤하긴 하네요.”
클레어가 등받이에 몸을 젖혔다가 옆으로 자빠져 에리히의 무릎에 누웠다. 에리히의 허벅지가 움찔 굳었다.
“저도 뭐, 그렇게까지 쇼핑을 좋아하진 않는다고요. 아니, 좋아하긴 하지만, 돈 쓰는 게 좋은 거지, 옷을 계속 갈아입는 게 좋은 건 아니니까.”
“그러면.”
“뭘 반가워하고 그래요? 선배는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한 주제에. 애초에 드레스 쪽이 바지 정장보다 입기 백배는 힘들다고요.”
“바지 정장?”
클레어가 이상한 단어를 쓰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낯설었다.
에리히가 의문을 갖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클레어가 말했다.
“아직 2시도 안 됐는데요. 두 군데는 더 돌 거예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왕 소문낼 거 확실하게 할 거라고요.”
“이렇게 돌아다니면, 너무 노골적이라서 남에게 자랑하기도 뭐한 상황이 되는 거 아닌가?”
“본인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자각은 있나 봐요?”
“말꼬리 잡지 말고.”
“어차피 선배가 자랑거리가 될 거라면 ‘옷을 의상실 단위로 사 줬다’ 만큼이나 ‘이렇게 하루 종일 끌고 다닐 수 있다’도 자랑이 되지 않을까요?”
“별로 네게 좋은 평판이 되진 않을 거야.”
“이젠 그런 것도 다 생각하실 줄 알고.”
클레어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어린애 칭찬하듯 에리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그런다고 손을 쳐 내지는 않았다.
클레어는 다리를 쭉 펴서 기지개를 켰다.
“역시 너무 과하긴 했죠?”
“나머지는 집으로 불러.”
“그래요. 그러면 잠깐 쉬고 뭐라도 먹었다가 보석상만 들렀다 가요.”
“그것도 집으로 불러.”
“싫어요. 난 아직 한 번도 비싼 보석상에 당당히 들어가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위빙 상단의 주인이 무슨 소릴.”
“그건 내 돈이 아니라 상단 돈이잖아요.”
“별소릴 다 듣겠군.”
“그런 게 있어요. 심적인 거리감이.”
아직 회사와 경영자의 구별이 되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가요.”
“한 군데 정도라면.”
에리히가 선선히 대답했다. 클레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전에 뭘 좀 먹으러 가요. 여기가 어디죠?”
클레어는 마부석 쪽 창문을 열어 묻고, 거리의 이름을 듣고는 말했다.
“시장 앞에 내려 주세요.”
“시장?”
“여기 아카데미에서 가까운 곳이잖아요. 큰 시장이 있으니까 그리 가요. 선배는 돌돌빵 먹어 본 적 없죠?”
에리히는 이번에야말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진담인가? 길에 서서 음식을 먹자고?”
“와, 뭔지 알기는 하나 봐요?”
“네가.”
에리히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가 친구들과 어울려 손에 먹을 걸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 있고, 그걸 기억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촌 중에 몰래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가 있었지.”
“아…….”
그것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클레어는 잠깐 대답하지 못했다.
죽은 황태자가 아니라면, 에리히가 그렇게 부드러운 단어로 지칭하지 않았을 테니까. 놈이라고 불렀겠지.
클레어는 무심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겠네요. 제 동생도 이 근처 맛집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그렇군.”
“이 기회에 선배도 진정한 서민의 생활을 맛보라고요.”
클레어는 일부러 더 경쾌하게 말하고 마차 문을 열려고 했다. 에리히가 그 문을 닫았다.
“싫다면?”
“이게 뭐 협상씩이나 걸 만한 일이에요?”
“네가 내 사소한 청조차 들어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사소한 청이요?”
‘뭐가 있지?’ 하고 눈을 굴리다가 클레어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사실 오늘 내내 자신도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냐고 오리발을 내밀 수가 없었다.
“내가 자랑거리가 된다는 건, 네가 먼저 인정한 거 아니었나? 그러려고 오늘 하루 종일 이러고 있는 거잖나.”
“재촉하지 말아요. 어색하단 말이에요.”
클레어는 얼굴에 부채질을 한 번 했다. 어차피 호칭을 바꾸긴 해야 했다.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에리히.”
에리히가 마차 문을 잡았던 손을 떼어 클레어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들어오는 피부의 감촉에 클레어는 난처해져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 여기 한길가거든요?”
“내가 뭘 했다고? 무릎에 드러눕는 쪽이 부끄럽지.”
“내가 하는 건 안 부끄럽다고요.”
실랑이는 별로 길지 않았다. 에리히가 다가오는 바람에 클레어는 마차에 달라붙으며 안 된다고 항의하려 했지만, 그가 손을 클레어의 허리 너머로 뻗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웃음이 클레어의 뺨을 스쳤다.
“왜? 내가 여기서 뭐라도 할까 봐?”
“나 참.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건 이쪽이지.”
클레어가 긴장을 푸는 순간 입술이 닿았다. 짧게 쪽 하고 한순간 닿았을 뿐인 뽀뽀였지만, 클레어는 이번에도 착각하고 기겁해서 피하려다가 마차에서 떨어질 뻔했다.
에리히가 그녀를 붙들어 잡아 주었다. 클레어는 그의 어깨를 때리며 화냈다.
“놀랐잖아요!”
“내가 잘하긴 했던 모양이군.”
“뭘요?”
“무엇이든.”
에리히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클레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에리히는 그녀를 안은 채로 마차에서 내렸다. 클레어는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공공장소잖아요!”
“누가 신경 쓴다고.”
에리히가 길거리 한쪽을 눈짓했다. 대여 마차를 세워 놓고 작별키스에 열중하고 있는 커플인지 부부인지가 있었다.
클레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개인적인 취향이 그렇다고요.”
“그것도 앞으로 협상해 봐야 할 문제군.”
“그게 무슨 협상거리예요?”
“나는 아내에게 환영키스와 작별키스 정도는 하고 싶거든.”
“뽀뽀 정도로 중간 지점에서 타협하죠.”
“방금 협상거리가 아니라더니?”
입씨름을 하면서도 에리히는 팔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거기에 손을 얹었다.
“시장인데 이런 에스코트라니, 너무 고상한 거 아니에요?”
“가자고 말한 건 너잖아.”
어차피 요즘 세상에 옷차림이 고급스럽다고 해서 시장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에리히가 덧붙였다. 클레어가 ‘요즘 세상’이라는 단어에 웃었지만, 에리히는 그녀가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근처에 유명한 소다수 집이 있어요.”
엘리사가 좋아하며 알려 주었던 곳이다. 클레어는 제대로 된 맥주가 존재하는 세상인데 왜 어중간한 탄산음료를 마시겠느냐며 싫어했지만, 엘리사는 아주 좋아해서 자주 편지에 그 가게에 갔다는 이야기를 쓰곤 했다.
두 사람이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을 때였다. 어떤 여자가 급한 걸음으로 뛰어나오다가 클레어를 보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델포드 남작님이 아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