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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39/263)

39화

클레어는 여자의 얼굴을 몰랐지만, 포목상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실밥이 여기저기 묻어 있고, 앞치마에 큰 가위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절 아세요?”

“그럼요. 포목점을 하는 사람 중에 남작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니, 아이쿠! 이럴 때가 아니어요. 카슨 씨가 무슨 수를 써서든 빨리 남작님에게 연락을 넣어야 한다고 했어요!”

“무슨 일인데요?”

“소다수 집에서 델포드 도련님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클레어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뛰기 시작했다. 에리히가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며 행여나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이 시장에 소다수 집이라고는 한 군데뿐이었다.

‘로저가 데리고 나온 건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이 데리고 놀러 나오는 게 별일은 아니지만, 엘리엇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가슴이 내려앉지 않을 수 없었다.

소다수 집 앞에 호위가 서서 출입을 막고 있었다. 제복 대신 평범한 정장을 입고 있지만,  보기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클레어는 발걸음이 막힌 채 숨 가쁘게 말했다.

“안에 제 아이가 있어요.”

통과시켜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지만, 호위는 에리히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무슨 일인가?”

“아렌 공왕 전하께서 계십니다.”

호위가 그렇게 대답하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

에리히는 클레어를 감싸고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클레어는 가게 안쪽에 벌어진 난장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소다수 집 앞에 서 있는 호위와 색을 맞춰 입은 호위들이 사람을 막아서서 공간을 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머리가 새하얀 노인이 웅크리듯 하고 앉아 아이를 껴안고 있었다.

“앗, 이모!”

노인의 머리를 토닥토닥해 주던 엘리엇이 클레어를 보고 소리쳤다.

안에 있던 호위가 또다시 클레어의 앞을 막으려고 했지만, 에리히가 그에게 비키라고 손짓했다.

아렌 공왕은 엘리엇이 머뭇거리는 것을 알고 애써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물이 멎은 것을 알고 엘리엇이 물었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저 이모한테 가야 하는데…….”

그가 가여워서 선뜻 발이 안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아렌 공왕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픈 게 아니라……. 널 무척 닮은 아이를 하나 알고 있어서…… 놀라서 말이다.”

“괜찮아요. 그 애 이름이 제러드예요?”

“그래.”

“잃어버리셨어요?”

“그래…….”

“길 잃어버렸으면 빨리 찾아야 하는데……. 우리 이모한테 도와 달라고 할게요. 이모는 엄청 아는 사람이 많거든요!”

엘리엇이 말했다.

아픈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실 공왕은 아팠다. 이미 닳아 없어졌을 터인 심장 한쪽에 다시 베여 나간 것 같은 통증이 생생하게 퍼졌다.

“고맙구나.”

아렌 공왕은 다정하게 말하며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고, 포옹을 풀었다.

엘리엇이 달려가 클레어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클레어는 엘리엇을 한번 안아 주고, 아렌 공왕에게 공손히 절했다.

“황공합니다, 공왕 전하. 제 조카가 전하께 무엄한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닌지…….”

“아닐세.”

아렌 공왕이 등을 펴고, 붉어진 눈으로 클레어를 보고, 그 곁에 와서 선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에리히 공.”

그는 번뇌 가득한 목소리로 마치 어릴 때처럼 이름으로 불렀다. 성인이 되고 작위를 상속한 지금은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주인으로서 존중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충분히 거리를 두기에는 마음에 고통이 너무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왕 전하.”

에리히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하고, 공왕의 뒤에 선 무어 공작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클레어를 소개했다.

“제 약혼녀인 클레어 델포드입니다. 아렌의 델포드 남작입니다.”

“소문은 들었네.”

“그리고 이 아이는 엘리엇입니다. 제 아들입니다.”

아렌 공왕의 눈이 흔들렸다. 이렇게 나란히 보면 에리히의 아들이 확실해 보였다.

공왕은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랬군. 무척 낯이 익어서…… 늙으면 감상이 풍부해지는 법이라 내가 실수를 저질렀네.”

“아닙니다. 엘리엇이 절 많이 닮았지요.”

그 말을 듣고 엘리엇이 눈을 깜박거렸다. 클레어는 ‘이모, 이모’ 하고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부르는 엘리엇의 어깨를 토닥거려 조용히 시켰다.

에리히가 차분하게 말했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인사를 드리러 갈 작정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놀래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 한번 조용한 자리에서 다시 봤으면 좋겠군. 나야말로 아이를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공왕은 허리를 굽히고 엘리엇과 눈을 맞췄다. 엘리엇은 혼자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공왕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공왕은 홀린 듯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뭐라도 쥐여 주고 싶어 괜스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어린 딸과 손자가 있던 때와 달리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가슴에 달고 있던 휘장을 떼어 엘리엇의 가슴에 달아 주었다.

“전하, 그러지 마세요. 아이가 갖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입니다.”

휘장에 아렌 왕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클레어는 그를 만류했다. 공왕은 고개를 젓고 클레어에게 말했다.

“내 이 아이 덕에 좋은 기억이 떠올랐거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네.”

“황공합니다.”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먼저 가 보게나. 나는 조금 더 쉬어야겠어서.”

아렌 공왕이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히와 클레어는 그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무어 공작과도 말없이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갔다.

“공왕 전하…….”

무어 공작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아렌 공왕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떠오르는 추억이 너무 많아, 흐느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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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와 에리히는 빠른 걸음으로 소다수 집을 벗어났다. 시장에서 끼니를 때울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런 일을 기사로 쓸 사람도 없고.”

클레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에리히가 냉정한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엘리엇이 날 닮은 건 모두 아는 사실이야. 나도 깜짝 놀랐는데, 공왕 전하께서도 그러시겠지.”

그 말의 진실한 의미가 에리히 자신을 닮은 것으로 모두 납득해 줄 것이니 괜찮다는 뜻임을 아는 것은 클레어뿐이었다.

클레어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요.”

“이모, 이모.”

엘리엇이 클레어의 옷깃을 당기며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슬퍼 보이고 어른들이 심각해서 못 물어본 것이었다.

“내가 왜 아저씨 아들이야?”

“아…….”

엘리엇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아저씨가 그랬잖아. 내가 아저씨 아들이라고.”

난처해서 여태까지 쉽게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클레어는 엘리엇에게 친모가 누구인지 속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태까지도 늘 엘리엇에게 엘리사의 초상화를 보여 주고 이야기도 많이 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빠는 에리히고 엄마는 엘리사라고 말하는 것에는 형언할 수 없는 거부감이 몰려왔다.

실은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이모가 엄마가 되는 건 괜찮아?’라고 물어서 괜찮다는 대답을 듣긴 했지만, 그게 진짜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이의 세상이 아무리 작아도, 저만의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모는 이모지 엄마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에리히가 손을 내밀어 엘리엇을 안았다.

그리고 클레어가 차마 못 하고 고민하던 말을 쉽게 해 버렸다.

“아저씨가 아빠 싫어?”

“아저씨는 우리 아빠 아닌데. 난 아빠 없는데.”

엘리엇이 눈을 굴리며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에리히가 말했다.

“이모가 엄마가 되고, 아저씨가 아빠가 될 거야. 그러면 싫어?”

“우웅.”

엘리엇이 고민에 잠긴 얼굴을 했다. 이모가 엄마가 되는 건 좋지만, 아저씨가 아빠가 되는 건 잘 모르겠다. 엘리엇은 아빠가 뭔지 잘 몰랐다.

그때, 뒤늦게야 소다수 집을 빠져나온 로저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경호원 때문에 길이 막혔던 것이다.

“남작님!”

“아. 로저.”

“마침 근처에 계셨다니 다행입니다.”

“여기까지 자네가 엘리엇을 데리고 왔나?”

에리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압적으로 로저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로저는 클레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설마 아렌 공왕 전하께서 이런 곳에 나오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사과하지 마. 네 잘못도 아닌데. 엘리엇, 네가 컵 들고 뛰다 넘어졌지?”

“안 띠어써!!”

뺨을 슬쩍 꼬집힌 엘리엇이 버둥거리며 항의했다.

로저가 웃으면서 말했다.

“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게 주인에게 연락처 남기고 왔습니다.”

“잘했어. 나중에 보상은 해야지.”

소다수를 엎은 것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공왕이 나왔으니 놀랐을 것이다.

로저가 엘리엇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남작님한테 화는 내셨어요?”

“응? 아……!”

무엇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 잊고 있었던 엘리엇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소리쳤다.

“이모 나빴어! 어제 집에 안 왔어! 내가 걱정했는데!”

“아.”

“아저씨는 안 돼! 아저씨가 아빠 되는 거 싫어!”

에리히에게 안겨 있지 않겠다며 엘리엇이 버둥거렸다. 내려 주자 엘리엇은 클레어의 다리를 끌어안고 에리히를 적대적으로 쏘아보았다.

“하하하!”

에리히는 로저를 노려보았지만, 로저의 낯짝은 위빙 상단의 순이익만큼 두꺼웠기 때문에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전혀 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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