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63)

42화

“어느 틈에……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셔서.”

마사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클레어는 거울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돌아가신 주인님과 마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주인님이 진짜 평생 짝도 없이 혼자 사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결혼식 할 때 해. 세상일 모르는 거야. 식장 들어가기 전까진.”

클레어는 농담으로 말했다.

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사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환한 얼굴로 잽싸게 움직였다.

“공작님이신가 봐요!”

클레어는 시계를 보고 너무 이르지 않나 생각했는데, 역시 문밖에 있는 것은 에리히가 아니라 낯모르는 얼굴의 하녀였다.

“아, 방해가 되었으면 죄송합니다. 전해 드리라고 하는 편지가 있어서요.”

실망한 마사의 얼굴을 보고 하녀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마사, 편지 이리 갖다 줘.”

마사가 편지와 편지칼을 가져다주었다. 서명 없는 봉투를 뜯자 안에서 짤막한 쪽지가 나왔다.

『대부인의 태도가 수상합니다. 마실 것을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파티에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참석합니다.』

클레어는 혀끝으로 윗니를 문질렀다.

“그것참. 조용히 살고 싶어도 잘 안 된단 말이야.”

원래 오늘 슈나이더 백작가는 참석할 예정이 없었다. 초대할 만한 사이였지만, 안 그래도 요즘 말이 많은데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백작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고 들었다.

어쨌든 저쪽에서 굳이 시비를 걸겠다는데, 이쪽에서 얌전히 당해 줄 필요는 없다.

클레어는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봉긋한 윗가슴선에서 시작하여 어깨와 목을 감싼 얇은 레이스를 북 뜯어 냈다.

“앗, 남작님!”

의상실에서 파견 나온 디자이너가 비명을 질렀다. 클레어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머지도 깨끗하게 뜯어 줘요. 시안에서는 원래 이 라인대로 노출되어 있었잖아요?”

“하, 하지만 남작님께서…….”

“자신 없어요?”

그 말에 디자이너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럴 리가요! 지금 다듬겠습니다!”

디자이너가 재빨리 뜯어 낸 봉제선 자리의 실밥을 치우고 다듬었다. 클레어는 거울 안에서 새로 완성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괜히 오프숄더가 불편해서 덮어 달라고 했었지만, 뭐 어떤가. 다들 이 정도는 노출하는데.

“마사, 호텔에 가서 열쇠 상자와 목걸이 좀 가져와. 진주 한 줄짜리 있지? 며칠 전에 들어온 거.”

“네? 진주 목걸이는 갖고 있는데, 열쇠 상자요?”

“수레국화 열쇠 있잖아. 그거 마사가 지금 가서 좀 챙겨 와. 파티장으로 갖고 갈 거야.”

“잃어버리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니까 마사가 잘 갖고 있어.”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다. 만약을 위한 대비는 항상 해 두는 게 좋다. 쓸 일 없다면 더 좋은 일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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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는 클레어의 드레스룸을 노크하고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하녀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직도 준비 중인가?”

“아, 거의 끝나셨어요.”

하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길을 비켜 주었다.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늦었는데, 클레어의 치장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이런 것에 오래 걸리는 성격인 줄 몰랐는데.”

그는 불평을 말하며 안으로 들어서다가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혀도 함께.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걸고 있던 클레어가 몸을 돌렸다.

“미안해요. 생각이 좀 바뀌어서.”

“어.”

“왜 그래요?”

갈색 머리칼에 금가루를 뿌릴 때에 거기까지 흩어졌는지, 드러난 목덜미와 우아한 어깨선의 솜털이 반짝반짝 빛났다.

클레어가 샹들리에 같은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한 번 톡 쳐서 흔들어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예쁘군.”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에리히는 그녀를 끌어당겨 침실로 가고 싶은 욕망과 싸우고, 동시에 재킷을 가져다가 목까지 싸매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여자의 옷차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뢰한이나 하는 짓이다.

꾹 다물린 그의 입술을 보고 클레어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말이라도 고맙네요. 힘내긴 했어요. 비교당하면서 저 여자가 과연 자격이 있네 마네 하는 소리를 듣는 건 싫으니까.”

“내가 결정한 건데, 누가 감히 자격 운운한다는 거지?”

“바로 당신의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요.”

클레어가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물론 나한테 반한 게 얼굴 때문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요. 공작이 눈깔이 삐어서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아니라 나를 선택했다고 하지.”

“누가 그래?”

“그럼 안 반했는데 다짜고짜 인장 반지를 벗어 줬어요?”

클레어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연히 에리히가 부정하려는 게 반했다는 부분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리스가 훌륭한 가수라는 건 알지만 얼굴은 글쎄.”

에리히의 검지가 클레어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한 번 훑어 내렸다가 살짝 건져 올렸다.

“네가 더 예쁘지.”

“미쳤나 봐.”

클레어는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얼굴에 화기가 올랐다.

“난 객관적인 사람이거든요? 사교계의 꽃에 비교 못 한다는 건 내가 더 잘 안다고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에리히가 무뚝뚝한 얼굴인 채 동요도 없이 말했다.

“네 말마따나 얼굴 때문에 네가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

“진짜 미쳤어.”

클레어는 웃음을 터뜨리며 또다시 그의 팔을 때렸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광대가 올라갔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나는 무의미한 거짓말은 안 해.”

“어련하시겠어요.”

클레어가 손을 내밀었다.

에리히는 그 손을 잡아 에스코트할 작정이었는데, 그 전에 그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얼굴 합만 빼고, 우리가 여러모로 잘 맞긴 했죠.”

셔츠 너머로 에리히의 가슴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클레어가 장난스럽게 검지와 중지로 걸음 걷듯 움직이자, 에리히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날 무책임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잡은 손을 당겼다. 클레어의 날씬한 허리를 감아 안고 고개를 숙이는데, 입술이 닿기 직전에 클레어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막았다.

“안 돼요. 화장 망가져.”

“고쳐.”

“당신이 망가뜨리고, 내가 고쳐요? 그렇게는 못 하지.”

“그럼 내가 고쳐 주지.”

“할 줄이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면 웃기지는 않을 텐데.”

클레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에리히는 결국 손바닥에나 키스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한숨인지 뭔지 모를 숨을 깊게 내뱉고 그녀의 손을 잡아 팔짱을 끼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 연회가 열린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일가친척과 가신들, 교분이 깊은 가문 위주로 초대장을 돌렸지만 동행자가 있느니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느니 하는 이유로 한 장에 여러 명씩 고개를 들이밀어, 넓은 연회장에 사람이 가득 찰 정도였다.

딩동. 댕동.

연주자가 누르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내악단이 각자 악기를 퉁기며 조율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불협화음이라기보다는 악상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물론 손님들에게는 소리의 아름다움과 별개로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쩐 일일까요? 악단의 준비가 아직도 덜 되어 있다니?”

“클라우제너 공작저답지 않네요.”

“약혼녀 쪽은 아직 안살림을 시작하지 않았고, 대부인께서는 이 약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하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걱정과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들이 소곤소곤 오갔다.

“대부인께서 그러시는 것도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에요. 남작가에, 심지어 아렌 출신이라니.”

“훌륭한 황녀님이라도 한 분 계시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아니면 에른스트 공작가라든지.”

“애석한 일이죠. 에른스트의 방계까지 세어도 그럴듯한 영애가 없으니.”

“로멜 출신의 고귀한 숙녀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 아렌인이라니.”

반면, 그런 목소리를 꾸짖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결정하신 일인데,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어련히 훌륭한 숙녀를 고르셨을까?”

“델포드 남작이라면 충분히 안심하고 클라우제너의 내정을 맡길 수 있죠. 솔직히 대부인께서는 낭비가 너무 심하셨어요.”

“어차피 귀천 상혼해야 하는데, 로멜의 숙녀라면 후사는 어쩌려고! 이럴 때를 대비해서 프리드리히 대제께서 로멜-아렌 계승법을 만드신 것이 아니오?”

벨프 후작은 불쾌한 마음으로 그런 대화를 흘려 넘겼다.

‘흥! 돈 세는 것밖에 모르는 촌구석 계집 따위를!’

하지만 이것도 이제 곧 끝이다.

몇 시간만 지나면 클레어 델포드는 공작 부인이 되기는커녕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도 못할 처지가 될 테니까.

오늘 그들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루이자가 클레어에게 술을 먹인다. 쉽게 취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다디단 발포주에 자신이 쓰는 진정제를 탈 예정이었다.

클레어가 졸기 시작하면 하녀를 시켜 후원으로 데려다 놓는다. 딱 밀회에 쓰일 만한 파고라가 있었다.

그리고 위조 편지 같은 것으로 거기에 남자를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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