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3/263)

44화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 전부 제 잘못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자리에 화려하게 하고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곧이라도 방울방울 떨어뜨릴 듯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이게 연극이거나 오페라였다면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쳐야 할 타이밍이었다. 감정 잡는 게 대박이었다.

이리스는 정말로 슬프고 애처로워 보였으며, 작은 실수에 큰 대가를 치르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같았다.

‘와, 지금 내가 의상실 싹쓸이했다고 저러는 거야?’

여기가 성당이었다면 그런대로 진실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파티장이었으며, 이리스는 장소에 맞지 않는 초라한 옷을 보란 듯이 입고 나왔다.

“죄송해요. 제가…… 안 나오는 게 맞는 걸까 싶었는데, 그래도 두 분 약혼은 꼭, 축하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리스가 에리히를 바라보며 가련하게 말했다.

이리스의 가냘프고 청초한 모습은 이별할 수밖에 없는 숙명에 떨고 있는 여주인공 같았다.

클레어는 어금니를 물고 웃었다. 비록 그녀가 대범하려고 애쓰는 편이고,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니까 대충 다 이해하자는 주의였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솔직히 신경 쓰였다.

[클라우제너 공작도 남자야. 지금까지는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관심 없었어도, 이리스 양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과연 아무 생각 안 들까?]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클레어는 에리히의 팔에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이리스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짐짓 친밀한 태도로 이리스의 손을 답삭 잡았다.

“이리스 양!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

이리스가 곱게 인사하기 위해 손을 빼려고 했지만, 클레어는 웃는 낯으로 ‘우리 사이에 무슨’이라는 의미를 팍팍 담아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오늘 슈나이더 백작가가 참석하지 않는다고 들어서 마음이 좀 그랬거든요.”

“아버지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하셔서…….”

“백작님이 뭔가를 오해하고 계신가 봐요. 에리히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집이 흔하지 않은데……. 이리스 양이라도 오셔서 제 마음이 얼마나 안심되는지 몰라요. 그렇죠?”

클레어가 에리히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에리히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것을 굳이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고 무덤덤하게, 하는 듯 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절 불편해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드레스 이야기라면 오해였다는 사실이 이미 다 밝혀졌는걸요. 파벨이 에리히의 명령을 급하게 지킨답시고 이리스 양의 드레스를 새치기해 버렸던 거라면서요.”

클레어는 아예 들으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소문을 내느니 차라리 아예 알리는 게 나았다.

“저야말로 사과를 해야 하는데……. 미안해요.”

클레어는 그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손을 뒤로 돌려 목걸이를 풀었다.

파티장의 환한 조명을 받은 수백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빛을 뿜었다. 일순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거기에 집중되었다.

이리스는 여전히 사람을 홀릴 만큼 함초롬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나 이미 파티장의 주목은 클레어에게 옮아간 다음이었다.

가련미를 뽐낸 다음이라 적극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이리스의 시선이 당황스럽게 흔들렸다.

클레어는 그 목걸이를 이리스의 목에 걸어 주었다.

“제 선물이에요. 이리스 양이 파티에 참석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서 드리는 거예요.”

“네? 아, 아뇨! 이런 걸 받을 순 없어요……!”

이리스가 필사적이 되거나 말거나 클레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리히가 준 목걸이라서 아깝긴 했다. 하지만 질투 때문에 치사하게 이리스에게서 드레스를 빼앗았다는 소리를 듣느니 목걸이를 희생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아주 사교계를 활활 불태울 소문의 중심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가서 홍보 효과도 끝내 주길 빈다.

“저게 대체 얼마짜리야?”

“굉장하네요. 슈나이더 백작가의 재정으로는 저런 목걸이는 사지도 못할 텐데.”

누군가가 들으라고 말하는 건지 실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역시 최고의 광고판이라니까.’

거기에 스캔들까지 얹은.

클레어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손을 털고 물러섰다. 이리스가 패배감과 수치심으로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다.

“에리히.”

짐짓 다정한 태도로 에리히를 돌아보자 그가 클레어의 하녀에게 무슨 지시인가를 하고 있었다.

“괜찮죠? 이 목걸이, 이리스 양에게 선물해도?”

“상관없어. 예물도 아닌데.”

에리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녀가 서둘러 파티장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흘끗 보고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했다.

딴생각을 하지 말라는 듯이 에리히가 그녀의 목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어 아까 투왈렛룸에서 했던 것처럼 목걸이 자리를 따라 그었다.

“목이 허전해졌군.”

“괜찮아요. 목걸이 또 사 줄 거잖아요?”

“가져오게 했어.”

“헌걸로요?”

클레어는 으레 가문의 보석 중 하나려니 생각하며 웃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더 나은 생각이 있었지만, 에리히가 일부러 갖다 주게 하는 것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헐레벌떡 달려온 것은 하녀가 아니라 마사였다.

“말씀하신 걸 가져왔습니다, 공작님.”

마사가 숨을 몰아쉬면서도 온 얼굴에 웃음을 함박 머금고 상자를 열었다.

그것은 클레어가 만약을 대비해서 미리 갖고 오라고 한 수레국화 열쇠와 진주 목걸이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네 생각을 모를까 봐?”

에리히가 피식 웃었다.

“이것 때문에 이쪽 레이스를 뜯은 거잖아. 눈에 띄게 하려고.”

그가 클레어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하면서 클레어의 드러난 어깨를 가만히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 손가락이 등과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움직였다.

“걸어 줄 테니까 잠깐 잡아.”

클레어는 잠깐 머뭇거렸다. 친밀한 행위를 하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내친김이다. 이리스가 시야 한쪽에서 새파랗게 질려 휘청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지금 키스 정도까지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클레어는 그가 쓸어 주는 대로 머리칼을 모아 쥐었다.

에리히가 진주 목걸이의 잠금쇠를 채웠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자아.”

그가 손을 내리자 클레어는 머리칼을 한 번 흩트리듯이 하며 자연스럽게 다듬었다.

에리히가 이번에는 수레국화 열쇠에 달린 갈고리를 진주 목걸이 사이에 걸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쓰려고 만들어진 목걸이라, 진주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다이아몬드 장식 아래 열쇠가 늘어뜨려졌다.

본래 크기가 제법 되는 열쇠였기에 무게감으로 적당히 늘어져, 열쇠 끝부분이 가슴 사이로 살짝 사라졌다.

진주 목걸이 자체는 원래 걸고 있던 다이아몬드보다 단아했다. 그래서 흰 피부 위에 빛나는 수레국화 한 송이가 얹히는 것이 더욱 강조되었다.

“클라우제너를 목에 걸었어.”

“수레국화 열쇠를 저렇게……. 상상도 못 했어요. 너무 아름답네요.”

짧고 긴 탄식들이 여기저기에서 오갔다. 설레는 마음과 선망의 시선이 쏟아졌다.

클레어를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루이자의 측근 귀부인들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수레국화 열쇠의 주인 앞에서 그냥도 그녀들은 아무 말 할 수 없었고, 에리히가 직접 그것을 목에 걸어 준 사람 앞에서는 더 그랬다.

이제까지 수레국화 열쇠를 자랑한 공작 부인은 많지만, 그것을 배짱 좋게 목에 건 사람은 처음일 것이다.

클레어는 생긋 웃었다. 이 정도면 대체 왜 공작이 저 여자를 택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목걸이로도 잘 어울리는군.”

에리히가 눈을 내리깔듯이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

그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왜 그러는지 몰라서 잠깐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악단이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제나저제나 말을 걸 수 있을까 싶어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둥글게 거리를 벌리며 공간을 내주었다.

클레어는 난처한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은 집주인이라 그런 것이라 치더라도, 솔직히 좀 부끄럽다 못해 쪽팔릴 것 같았다.

“뭐, 당신이랑 살려면 이런 것도 익숙해져야겠죠?”

“뭘?”

뭐에 익숙해져야 된다는 건지도 이해 못 한 에리히가 약간 혀를 차며 내민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클레어는 그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에리히가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고 가볍게 홀 중앙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16632283372635.jpg

“후아.”

잠시 정원에 다녀온 노라는 크게 심호흡하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실수하면 안 되니까 연잎 궐련을 두 대나 피웠다.

카탸의 말이 옳았다. 노라가 카탸의 계략을 전달하자 루이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상으로 금화 주머니를 주었다.

그 돈으로 노라는 이자를 일부 갚고 싸구려 담배와 연잎 궐련도 샀다. 카탸도 그녀에게 한 상자를 주었기 때문에 노라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했다.

‘난 괜찮아. 잘 살 수 있어.’

연잎 궐련을 피우고 나면 잠시 동안은 손발의 떨림도 가라앉고 식은땀도 가셨다.

잘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받은 돈으로 빚을 갚고, 하녀 일을 그만두고 옷 수선집을 차릴 것이다.

‘돈을 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했는지 공작님에게 알리겠다고 해야겠어. 그러면 가만히 있을 수 없겠지.’

노라는 열이 오른 머릿속으로 그런 계획을 세우며 주류 준비실 쪽으로 들어갔다.

와인 담당 집사가 그녀를 알아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니?”

“마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셨어요.”

노라는 앞치마 밑에 숨긴 손에 약병을 단단히 쥔 채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