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뭐……?”
루이자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 뒤늦게야 에리히의 말뜻을 이해하고, 기력이 빠진 사람처럼 비슬비슬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리히는 그 모습을 냉담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의외군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그냥 방치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던 겁니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루이자는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너, 날 의심하고 있었니? 나한테 세작을 심었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한 겁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에리히가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 계획하신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어머니도, 벨프 후작가도 이 땅에서 지워졌을 테니까요.”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에서는 노기조차 느끼기 어려웠다. 에리히는 그저 한없이 차가웠을 뿐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한 치의 감정적 동요도 없이 그가 자기 말을 지키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제 아내 될 사람에게 관여하지 마시라고 벌써 두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획책을 꾸미다니.”
“걔, 걔가 보낸 것일 수도 있잖아…….”
“어머니는 클레어가 진심을 증명하려고 바람 상대를 약혼자의 집에 끌어들이는 멍청이로 보이십니까?”
에리히가 그녀에게 경멸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루이자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눈물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왜 걔만 믿어?”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이 더 오랫동안 에리히와 함께 지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하는 남자였다. 남편이 죽은 뒤로는 남편처럼 의지했다.
그러니 에리히도 당연히 그래 줘야 했다. 자신보다 그의 곁에 더 오래 있고, 그를 더 아껴 줄 수 있는 여자가 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걔는 믿을 수 없는 애야!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다고 내가 그랬는데 왜 안 믿어!”
“이 이상 추하게 굴지 마십시오.”
“내 눈으로 봤다니까! 걔는 정부가 셋이나 된다고! 아니, 셋뿐이라고 누가 장담해!”
루이자의 얼굴이 눈물과 화장품으로 얼룩져 엉망진창이 되고, 제 머리를 제 손으로 쥐어뜯는 바람에 에메랄드 티아라가 대롱대롱 머리칼에 매달렸다.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한테 몸 굴리고 애까지 낳은 여자를 어떻게 믿어! 그 애가 네 애라는 보장은 또 어딨어!!”
“그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왜 날 안 믿어 줘! 넌 날 믿어야지! 그런 천한 계집이 아니라 날 믿어야지!!”
목이 찢어져라 절규하는 루이자를 에리히는 새파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의 무정함에 루이자는 몸부림쳤으나, 실내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기에 결국 혼자 지쳐 흑흑 울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에리히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내뱉듯 말했다.
“정말 실망스럽군요.”
“에리히!”
“어머니께서 종종 도가 지나친 짓을 하시는데도 제가 지금까지 굳이 제재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클라우제너를 긍지로 여기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리히는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 이름에 걸맞게 품위를 갖추시길 바란 거죠. 그러나 어머니의 행동은 천박하고 수치스럽습니다.”
그 평가에 루이자가 멍하게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에리히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우지도, 안색을 바꾸지도 않고 얼음처럼 냉엄한 얼굴로 선언했다.
“어머니에게서 클라우제너의 작호를 박탈합니다. 그 이름을 쓰시기에 어머니는 너무 부도덕합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제가 가주입니다, 어머니.”
벌벌 떠는 루이자에게 에리히가 짧게 대꾸했다.
비록 시대가 전과 다르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문 안에서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반면, 루이자의 결혼 계약서는 귀천 상혼으로서, 신분 차이가 나는 재혼이었기에 결코 동등하지 않았다.
보통의 정략결혼과 달리 벨프 후작가는 클라우제너의 가계도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루이자의 얼굴에서 천천히 혈색이 빠져나갔다. 망연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이자를 흘끗 내려다보고 에리히는 명령했다.
“마리아. 내실로 모셔라.”
마리아가 다가와 루이자의 팔을 잡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루이자가 미친 듯이 발광했다.
“너, 너, 나, 날 그렇게밖에 생각 안 했어? 내가 너한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니? 내가, 내가……!”
에리히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루이자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다른 쪽에서는 여자 보안요원이 그녀를 끌어냈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클라우제너의 안주인이야, 내가!!”
그녀가 목이 찢어져라 발악했다.
“고작해야 남작인 계집애 따위 하나 때문에 내가 왜!!”
탁.
문이 닫히자 소리도 끊겼다.
에리히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벨프 후작을 바라보았다.
벨프 후작은 얼른 에리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완전히 두려움에 잠식된 몸에서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한 번만…….”
“후작, 자네는 서명과 필적을 위조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에리히가 내뱉었다.
이제까지 에리히는 그를 후작님이라고 부르고 경어를 써 왔다. 어쨌든 새어머니의 오빠이니, 외숙부라고 여기지는 않았으나 인척으로 존중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를 하대한 것은 형식상의 인척 관계를 해소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 일은 너무 큰 것이라, 클레어 본인에게 알려서 처리할 거니까. 적어도 법정에 설 기회는 있겠지.”
“공작님!”
벨프 후작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기세로 매달렸다.
에리히는 그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파티장으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보안부장 막시밀리안이 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벨프 후작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그가 잘 지킬 것이었다.
클레어는 그동안 파티장에 혼자 있었다.
그녀는 원래 혼자 잘 노는 성품이었다. 전생에는 쇼핑도, 영화도, 여행도 혼자 잘 다녔고, 모임에서도 꼭 단짝이 있어야 한다는 타입은 아니었다.
환생 후에도 영지에 또래 친구 하나 없이 혼자 놀아도 외로운 줄을 몰랐다.
하지만 약혼 축하 파티에서 혼자인 것은 진짜 좀 그렇지 않은가.
‘잠깐 일 좀 보고 온다더니, 이게 뭔데, 대체.’
두 번째 춤곡이 끝난 직후에 에리히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여섯 번째 춤곡이 연주되고 있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클레어는 내심으로 이를 갈았다. 그나마 수레국화 열쇠를 목에 거는 퍼포먼스 덕분인지, 약혼자에게 내팽개쳐진 건가 하는 의혹은 사지 않았다.
물론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를 걸고, 투자자들과 대화하고 귀걸이와 새 원단도 영업했다.
‘오늘 난 일하러 온 거야. 일. 접대도, 투자자와 친목을 다지는 것도 일이지.’
그녀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귀걸이도 직접 디자인하신 거지요?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남작님 얼굴 주위에 빛이 비치는 것 같아요.”
“아니, 참. 그건 귀걸이 탓이 아니라 남작님이 너무 예쁘셔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누가 누구를 접대하고 있는 건지 모를 상태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걸 두고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참, 무리해서라도 칭찬해 드려야죠.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명색이 약혼 축하 파티인데, 약혼자가 이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얼마나 마음이 서러우시겠어요.”
루이자의 측근인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들으란 듯이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어는 잠깐 망설였다. 솔직히 여기서 파펜하임 백작 부인에게 대거리하는 게 더 꼴사납지 않을까 싶었다.
“드레스 저거 대체 무슨 일이에요? 자수 한 땀 없이.”
“그나마 위빙 상단 물건의 장점이 무늬를 잘 짜 넣는다는 것이었는데, 저건 자수가 아니고 애들이 그림 그린 것처럼 물감에 적신 거잖아요.”
“좋은 건 다 팔아야죠. 아렌 남작 따위가 클라우제너에 시집오는 건데, 마지막 한 푼까지 긁어모아서 지참금이라도 빵빵하게 챙겨야지.”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 참는 게 더 꼴사나워질 게 분명해졌다. 이렇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잘 들리게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어차피 이런 택도 없는 소리로 욕을 먹을 거라면, 무시당하는 것보다 미친개 소리를 듣는 게 낫지 않나?’
욱했다가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을 만들곤 했던 것을 잊고 클레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 곁에 서서 줄곧 귀걸이를 칭찬하고 있던 슈텔처 남작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혼잣말했다.
“그냥 무시하는 게 나으실 텐데…….”
하지만 클레어에게 직접 충고하지는 못했다. 결국 자신이 그녀를 모욕하는 말을 들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베티나 공녀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런 걸로 상처받을 분처럼은 안 보이는데요. 오히려 파펜하임 백작 부인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이 옳았다.
클레어가 다가오자 파펜하임 백작 부인은 뒷걸음질 칠 뻔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곱게 자란 영애라면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 도망을 쳐야 정상이었다.
‘저러니 결혼도 못 하고 나이만 먹었지!’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부채 밑에서 입으로 웅얼거렸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귀부인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질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루이자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지금, 자신이라도 나서서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이대로 클레어에게 중심이 옮겨 가 버리면, 나중에 루이자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루이자의 최측근이라는 걸로 사교계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파펜하임 백작 부인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
클레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파펜하임 백작 부인은 시선을 돌리고, 부채로 코 밑을 가리며 모르는 체했다.
소개도 없이 말을 거는 것은 숙녀다운 짓이 아니다. 저쪽도 그걸 알 텐데, 아무도 이쪽에서 입을 안 열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싶었다.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도, 미묘한 정적이 파티장에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