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6/263)

47화

클레어는 사람들이 쫑긋 귀를 세우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다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에리히의 소개로는 이 파티장 전체에 통용되지 않나 봐요.”

혼잣말처럼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눈이 마주친 슈페 자작 부인에게 꽂혀 있었다. 네가 대답하라는 신호였다.

슈페 자작 부인은 몸 둘 바를 몰랐다. 클레어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니, 당연히 자기가 먼저 인사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루이자에게 찍힐 것 같다.

슈페 자작 부인은 주위 눈치를 살폈으나, 눈치를 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진짜 울고 싶었다. 왜 하필 자기 같은 피라미를 지목한단 말인가.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슈페 자작가의 아그네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슈페 자작 부인.”

클레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마주 인사했다.

그다음 고개를 들고 천천히 귀부인들과 하나씩 시선을 맞추었다.

몇 명은 파펜하임 백작 부인처럼 콧대를 세우고 고개를 돌리고, 몇 명은 불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슈페 자작 부인이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조금 발을 동동거리다가 슬그머니 그쪽에서 떨어져 나왔다.

클레어는 파펜하임 백작 부인 쪽으로 한 걸음 성큼 내디뎠다. 백작 부인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파펜하임 백작 부인만이 아니라 꽃이 가득 떨어진 못 물결이 출렁이듯, 만개한 드레스가 다 함께 클레어에게 밀려났다.

“저는 부인을 이해한답니다. 어머님에게 투자한 게 많으시겠죠.”

클레어가 생긋 웃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파펜하임 백작 부인과 그녀를 위시한 귀부인들이 듣기에는 충분했다.

“어머님이 물러나시면 이제 클라우제너의 내실에서 나오는 이득을 챙길 수는 없겠고, 하다못해 그룹을 유지해야 사교계에서 어머님의 측근이라는 지위가 유의미할 테니.”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저와의 사이를 그렇게 이간질하시면 안 되죠. 다른 분들은 한마디도 안 하고서도 절 모욕했다는 오해를 받게 될 텐데.”

아직도 루이자 곁에 붙어 있어야 할지 어떨지 결정하지 못했던 귀부인들 중 몇 명이 입을 손으로 가리고 슬금슬금 파펜하임 백작 부인에게서 멀어졌다.

조금 전에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자신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공개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뱉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공공의 적은 결속력을 강화한다. 게다가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녀를 모욕해 버리면, 나중에 전향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계략 따위는 없다는 듯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남작님? 시골 귀족 출신이라서 모르시나 본데, 고귀한 레이디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녀가 클레어를 슬쩍 깔아보는 듯한 눈짓을 했다가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걸 무슨 떨어지는 이삭을 주우려고 곁에 붙은 것처럼 말씀하시다니……. 여자의 몸으로 사업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역시 생각이 다르시군요.”

“유감스럽게도 제가 시골 귀족에 천박한 실용주의자이긴 하지만, 세상 사는 이치도, 무엇이 진짜 명예인지도 조금은 알고 있답니다.”

클레어가 가볍게 웃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클라우제너와 인연이 오래된 분들이니, 모두 품고 가야 마땅하죠.”

그러니까 지금 마음 바꾸면 봐준다.

그런 뜻을 담아 클레어는 이번에는 주위를 둘러싼 귀부인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 그럼요. 이렇게 마음 써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슈페 자작 부인이 얼른 클레어의 뒤쪽에 달라붙으며 아양을 떨었다. 어차피 루이자에게 특별한 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수레국화 열쇠의 주인이 받아 준다면, 갈아타야 한다. 중간에서 망설이던 이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다수였다.

파펜하임 백작 부인 뒤에 서 있던 사람 중 몇이 슬그머니 슈페 자작 부인을 알은체하러 왔다가, 그걸 기회 삼아 클레어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 보니 대부인께서는 무슨 일이실까요? 절친한 친구분들을 놓아두고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시다니.”

클레어가 짐짓 염려된다는 듯이 말했다.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부채를 불끈 쥐었을 때였다.

제복을 입은 시종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기웃거렸다. 클레어는 그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 남작님. 말씀 나누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이것을…….”

시종이 쟁반을 받들어 올렸다. 은쟁반 위에 놓인 동그랗고 작은 크리스털 술잔 위에 투명하고 붉은 술이 담겨 있었다.

“마님께서 축하주를 따로 마련하셨는데, 갑작스럽게 바쁜 일이 생겨서 직접 주실 수가 없게 됐다고 보내셨습니다.”

축하주라니. 진짜 축하의 의미일 리가 있겠는가.

클레어는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머금었고, 가져온 시종 본인도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음료를 조심하라더니…….’

그녀는 요한이 보냈던 경고 쪽지를 떠올렸다.

‘이게? 설마? 진짜? 이렇게 노골적으로?’

독살은 아니겠다. 진심, 이걸 마시고 죽으면 범인이 누구인지 3분 만에 알 수 있을 테니까.

용의자 지목까지 3분이 아니라 시종을 심문해서 증언을 얻는 데 걸리는 시간이 3분이다.

클레어는 잔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파펜하임 백작 부인과 응수를 주고받던 참이라 모여 있었던 시선이 그녀에게 쫙 다가들었다.

‘어떻게 이걸 안 받냐고.’

며느리가 약혼 축하 파티부터 시어머니가 보낸 잔을 독배라고 의심한다는 소문이 나면 참 볼 만한 꼴이 될 것이다.

반대로, 마시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독배를 보낸 시어머니가 욕먹긴 할 테고. 거기에 자신의 건강을 걸 작정은 없었지만 말이다.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잔을 집어 들려고 했다. 대충 마시는 척만 하다가 ‘어맛, 실수!’ 하고 엎든가 해야지.

에리히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가로질러 클레어 곁으로 왔다.

음악과 춤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방약무인한 태도였다.

“어딜 갔다 왔어요?”

“사소한 실책이 있어서 수습하느라고.”

“별일이야. 실책을 다 인정하고.”

에리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루이자의 참석을 막고, 더 엄중하게 경고했어야 했다.

말로는 요절을 내느니 뭐니 해도, 한 차례 욕을 퍼붓고 울고불고하며 감정을 쏟아 낸 다음에는 그때 계획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루이자였다.

음모를 꾸밀 능력도, 실행력도 없다고 생각해서 풀어 둔 게 잘못이었다.

“어머님은요?”

클레어가 물었다. 에리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 해서 들어가 쉬시게 했어.”

“아, 그래요…….”

에리히는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클레어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흘끔 파펜하임 백작 부인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발끈했던 파펜하임 백작 부인도 에리히 앞에서는 아무 말 없이 얌전했다.

루이자가 괜찮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을 여러 의미를 다른 사람들도 알아챘기 때문이다.

시종이 주춤주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에리히가 뒤늦게 그를 눈치채고 물었다.

“그게 뭔가?”

“대부인께서 남작님께 보내신 축하주입니다.”

“아.”

에리히는 짧게 탄식했다.

“아마, 대부인께서 직접 와서 축하해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그러신 모양이지요.”

파펜하임 백작 부인이 얼른 나서서 말했다. 에리히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러나저러나 클레어의 입장이 고약했다.

차라리 공개적으로 무례하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는다면 거절하거나 반박해도 할 말이 있다.

하지만 루이자가 파티에 돌아오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따로 보낸 축하주까지 무시하면 사교계에서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엎어 버리거나 남몰래 버리는 것도 파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지켜보며 평가하는 시선이 쏠리고 있는데 그럴 순 없었다.

“하.”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왜요?”

“아니.”

클레어가 종종 말하는, 자신이 사는 세상과 그녀가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설령 황제가 권한 잔을 거절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난은 들을 수 있었다. 욕은 언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치적 문제가 커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눈동자가 감히 자신을 평가하지는 못한다.

에리히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를 참석 못 하게 했어도 이걸 막을 수는 없었겠지.’

그냥 자신이 마셔 버리는 게 낫겠다.

기껏해야 진정제를 탄 것이다. 신경이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루이자가 진정제를 처방받고 있다는 것은 에리히도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노리고 있던 것이 외도 현장을 잡는 일이었으니, 아예 의식을 잃어버릴 정도의 독극물은 아닐 것이다.

에리히는 루이자나 벨프 후작에게 그런 배짱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에 유해한 것이라도, 클레어가 몸을 상하는 것보다 자신이 먹는 게 맞았다.

그는 클레어 대신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절반쯤 마시고, 쟁반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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