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파티장 전체에 술렁임이 일었다. 그 술이 무엇인지는 몰랐겠지만, 에리히가 클레어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 대신 마셔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께 잘 받았다고 여쭙도록.”
“예.”
에리히의 말에 시종이 안도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가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됐는데. 적당히 엎어 버리려고 했어요.”
“이쪽이 더 분란이 적어.”
“몸에 안 좋은 거면 어쩌려고요. 그럴 가능성이 훨씬 큰데.”
클레어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리히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한 일이야. 내가 처리하는 게 맞지.”
“마셔서 처리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속은 괜찮아요? 요한 경이 음료를 조심하라는 쪽지를 보냈었는데.”
“……그냥 독주야.”
요한의 이름이 나온 것에 미약한 불쾌감을 느끼며 에리히는 대꾸했다.
“널 취하게 해서 난처한 처지에 빠뜨리려고 한 거겠지.”
“흠. 어머님이 제 주량을 우습게 보셨네요. 설령 좀 취한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실수 같은 걸 간단히 하는 사람이…….”
클레어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에리히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었네요.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대는.”
“그렇지.”
“왜 또 동의하고 그래요?”
클레어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자신이 인정하는 것과 남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에리히는 그냥 놀릴 마음으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녀는 지나가는 시종의 트레이에서 샴페인을 집어 들며 한탄스럽게 말했다.
“내가 술을 또 마시면 짐승이라고 했는데.”
“안 마셔도 짐승 아닌가.”
“진짜!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하하.”
에리히가 시원스럽게 소리 내서 웃었다.
워낙 드문 일이라 깜짝 놀란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어조차도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좀 이상했다.
클레어는 다른 사람들처럼 에리히가 천성적으로 차갑다거나 감정이 희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식으로 희로애락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된 사람이다. 특히나 이런 장소에서는 더욱더.
웃음이 잦아든 뒤에는 미소가 찾아왔다. 몹시 사랑스러운 것을 쳐다보듯이, 귀여워서 견딜 수 없는 아이라도 보는 것처럼 허물어진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뭐예요, 왜 그렇게 이상하게 웃어요?”
“내가 뭘?”
“지금 웃고 있잖아요. 놀리려고 그러는 거면 글렀어요. 난 이미 쪽 다 팔았으니까 품위를 잃을 정도의 가치는 없을 것 같은데.”
“네가 사랑스러워서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오그라드는 퍼포먼스는 목걸이 한 번으로 충분해요.”
클레어는 몸을 홱 돌리려고 했다. 민망해서 뺨에 열이 올랐다.
말이 끝나기 전에 에리히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뺨에 쪽 입술을 맞췄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마자 입술이 내려왔다. 클레어는 당황해서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만, 요!”
말하는 사이사이에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아서 그녀는 겨우 말을 끝냈다.
“당신 지금 눈 풀렸어요. 취했어요? 설마?”
그녀도 주량에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에리히의 주량은 그녀보다 월등했다. 눈이 풀려서 맛이 갈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위스키를 두 병은 들이마셔야 할 것이다.
에리히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음. 취한 것은 아니야. 판단력이 저하되고 있긴 하군.”
“그런 소리를 냉정하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이리 와요.”
클레어는 그를 잡아끌었다.
남에게 안 들리게 한다고 성량에 신경을 썼어도 주위 분위기가 약간 술렁술렁해졌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에리히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서 클레어를 돌려세웠다. 한 손을 깍지 끼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부서져라 감아 안자 품 안에서 클레어가 퍼덕댔다.
“잠깐, 미쳤?”
“제정신 아닌 것 같긴 해. 판단력이 저하되고 있군.”
자제력이 없는데 이 팔딱대는 여자에게 몇 년이나 참은 키스를 안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클레어가 듣는다면 언제 참았느냐고 소리 질렀겠지만 말이다. 에리히의 지금 기분으로는 그랬다.
그는 클레어의 입술을 입술로 겹쳐 열었다.
“읏.”
샴페인 향에 이어 단맛이 클레어의 입안까지 전해졌다.
에리히의 입술만이 아니라 입안까지 열기가 돌았다. 약간 부은 점막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에리히!”
클레어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에리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취기가 엄청나게 빨리 돌기 시작하는데.”
루이자의 진정제라면 그렇게 강하지 않은 것이다. 루이자는 때때로 발작하지만, 진짜로 아픈 게 아니라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라는 게 주치의의 견해였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서 가벼운 수면 유도제 정도를 처방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이렇게 금세 반응이 올 리 없었다.
‘술 때문인가?’
클레어도 상당히 술이 센 편이지만, 이걸 마셨다면 버티기 힘들었으리라.
그리고 아마 가짜 편지로 불러내진 누군가의 품 안에 쓰러졌겠지.
‘역시 그냥 죽이는 게 나을까?’
특정 누구를 지정한 것도 아니라 관련자 전원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에리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나, 음모의 상대방이 될 뻔한 남자들을 포함해서. 우선은 회색 머리부터 최근의 크림색 푸들까지 전부.
그는 클레어의 허리를 도로 당겼다. 그리고 평소보다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로 찰스와 제임스, 그 뒤를 따라온 친척 부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여기서 퇴장하도록 하지. 제임스 경, 경이 여기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니 호스트 역할을 부탁하겠네.”
“예?!”
“소개는 모두 끝났고, 남은 건 평범한 파티니까, 즐기다 돌아가게. 나는 약혼녀와 시간을 보내야겠어.”
클레어가 다시 미쳤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에리히가 다시 그녀의 뺨을 끌어당겼다.
“에리히……!”
당황한 클레어가 그를 불렀다. 에리히는 남들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키스처럼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입술을 거의 댄 채로 속삭였다.
“취해서 시야가 좁아. 방까지 데려다줘. 자연스럽게.”
“아까 마신 것 때문이에요?”
에리히는 보일락 말락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자 입술 끝에 에리히의 입술이 스쳤지만, 그녀는 지금 그건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에리히의 품에 기대듯이 하며 그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감았다.
클레어는 별 사소한 것을 다 가지고 품위가 없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물어뜯는 사교계 평판이라는 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그게 우습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별개로 약점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에리히는 약점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악행은 해도 되지만,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그의 평판은 선량과 자비가 아니라 통제력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어느 한쪽이 절제력을 잃고 취해서 자리를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면, 클레어 쪽이어야 했다.
실제로는 클레어가 부축하지만, 마치 상태가 좋지 않은 그녀를 에리히가 감싸는 듯한 자세로 둘은 천천히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다행히 에리히는 조금 어지러운 것 같기는 했지만, 걸음을 걷는 것에는 문제없었다.
클레어는 나오자마자 물었다.
“괜찮아요?”
“침실로 가지.”
“그냥 독주라면서요. 한 잔에 당신이 이렇게 취할 리 없잖아요.”
“음…….”
“또 웃네. 취했다는 거, 거짓말 아니에요?”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보니까?”
“아니에요.”
5년 전 그날 밤에도 무던히 웃었던 거 같긴 했다. 그걸 생각해 보면 그때도 취했던 거긴 하구나 싶었다.
물론 지금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신 양을 생각해 보면 희석 전 소주 주정이라도 이 정도로 만취되지는 않을 텐데.
걷는 동안 에리히는 점점 더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침실 쪽 복도로 들어가면서 시종을 불러, 같이 에리히를 부축했다.
“의사를 불러요. 이 사람, 취기가 과해요. 들키지 않게 조용히 오라고 하세요.”
“예.”
시종 하나가 서둘러 복도 저편으로 갔다.
밀어서 침대에 눕히자 순순히 말을 듣는가 싶더니, 클레어의 팔을 당겨 제 품에 가두려 했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에리히, 이거 몇 개인지 알겠어요?”
손가락을 두 개 들어 올려 보이자 에리히가 그 손가락을 입술로 물었다.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했다.
“당신 지금 이상하니까.”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에리히가 그녀의 등부터 허리까지를 쓸어내리며 몸을 돌렸다.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뭐, 키스 정도는.’
의사가 올 때까지는 괜찮겠지.
클레어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목을 감아 안았다.
하지만 키스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에리히의 입술이 힘없이 클레어의 뺨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클레어의 팔 안에 있던 몸이 힘없이 늘어지면서 무게가 실렸다.
“에리히?”
대답이 없었다. 클레어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에리히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