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8/263)

49화

14. 진정제

루이자는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 이해하지 못했다.

보안요원들은 그녀를 내실로 끌어다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오래지 않아 하녀들이 들어왔지만, 루이자는 시중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가! 다 나갓!”

쨍그랑!

집어 던진 화병이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물건을 집어 던지고 옷을 쥐어뜯으며 발광했다. 그러나 평소처럼 주치의가 달려오는 일도, 하녀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보살피는 일도 없었다.

마리아는 아예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고, 몸종 니엘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굴렀다.

그러나 루이자가 시중을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게 명백해지자 주춤거리다가 달아나듯 밖으로 나가 버렸다.

루이자는 혼자 남았다.

“아악! 악!”

그녀는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루이자는 지쳐서 소파에 널브러졌다가 티아라를 빼서 아무렇게나 바닥에 집어 던졌다.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편할 테지만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프란츠, 프란츠…….”

그녀는 그 자리에 모로 누워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지만, 돌봐 주는 이는 없었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리아 때문이야. 마리아가 배신해서!”

그녀는 방 안을 빙빙 돌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파티장에서는 클레어가 수레국화 열쇠를 목에 걸고 에리히의 품에서 춤추고 있을 것이다.

루이자가 평생 자랑으로 여기던 것을 다 빼앗아 가지고서 행복하게 웃고 있으리라.

그럴 수는 없었다. 분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에리히는 지난 7년 동안 그녀의 것이었다. 함께 참석하는 모임에서는 늘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 전에도, 남편이 참석하지 않는 파티에서 늘 에리히의 옆자리는 자기 것이었다.

그녀는 클라우제너의 유일한 귀부인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래. 어떻게.”

루이자는 하염없이 울었다.

에리히가 그런 식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클라우제너에서 언제든지 잘라 낼 수 있는 사람처럼 대할 줄은 몰랐다.

마치 가신이나 고용인을 대하는 것처럼. 버리면 그만인 여자인 것처럼.

그리고, 후회도 했다.

“이럴 게 아니었는데.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그냥 그 얄미운 것을 쫓아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에리히가 결혼하리라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진짜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고귀한 혈통에 기품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라면 자신이 그렇게 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평범해도 괜찮았다. 이유가 확실하게 있는 가문 간의 결합이라면.

에리히가 그렇게 다르게 굴지 않았다면.

루이자는 울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내가 이러면 안 돼. 이러다가 진짜로 미움받아.”

에리히에게 미움받으면 살 수 없었다. 열쇠를 빼앗긴다든가 작호를 박탈당한다든가, 그런 것보다도 그게 루이자에게는 더 큰 일이었다.

그녀는 한참 울다가 침실로 기어들어 가 진정제를 찾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기절하듯 까무룩 잠에 떨어졌다.

루이자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침이 되어서의 일이다.

그녀는 퍼뜩 놀라 눈을 뜬 다음에야 거실 쪽의 인기척을 알아챘다.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루이자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멍하게 잠시 앉아 있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들었다. 들어온 것은 마리아였다.

마리아가 들고 온 세숫대야를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가 물병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루이자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한잠도 안 주무셨어요? 얼굴을 씻고 옷을 좀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너…….”

밤새 울부짖은 탓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긁힌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자 마리아가 잔을 하나 건넸다. 따뜻한 꿀물이었다.

이딴 건 필요 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너무 지치고 갈증이 나서 루이자는 어쩔 수 없이 그걸 받아 마셨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얼굴을 내밀어?”

“그러면, 계속 그런 얼굴로 계실 건가요? 델포드 남작님이 곧 오실 거예요.”

루이자가 숨을 들이켰다. 반은 겁먹고, 반은 화가 난 채 그녀가 소리를 높였다.

“걔가 뭔데 또 나서? 에리히는? 에리히더러 오라고 해!”

“대부인.”

“날 쫓아내려면 에리히가 와야지! 지가 뭔데 감히 나한테……!”

마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시면 안 돼요, 대부인. 알고 계시잖아요.”

눈알이 빠지도록 울었을 텐데, 루이자의 눈동자에 다시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어제 에리히가 날 그렇게…… 그렇게 대했는데, 걔가 또 할 말이 뭐가 있어서?”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어젯밤에 또 일이 더 생겼어요.”

“뭔데?”

미처 마리아가 설명하기 전에, 거실 쪽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루이자는 놀라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보안부 제복을 입은 여자 20여 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루이자의 침실과 드레스룸, 기타 개인적으로 쓰는 공간을 장악하러 흩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클레어가 느긋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너…….”

입은 열었으나 그 이상 말을 뱉지 못하고 루이자가 숨을 할딱였다.

억울하고 분하고 서러웠다. 그러나 이제 울고 소리쳐도 소용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앉으세요.”

클레어가 먼저 소파에 앉아 자리를 권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막시밀리안이 그녀의 뒤에 섰다.

그건 클라우제너의 보안부, 오로지 공작의 명령만 듣는 가장 강력한 핵심 세력이 클레어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슨 일이야?”

루이자는 지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깔끔한 데이 드레스에 머리를 묶은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루이자는 불현듯 자신이 어젯밤 입었던 화려한 파티 드레스 차림 그대로라는 걸 깨달았다.

공작새를 떠올리게 할 만큼 화려한 원단의 드레스였으나, 지금은 그 옷감도 치마도 모두 구깃구깃해져 오히려 더 형편없었다. 황금으로 만든 장식체인도 떨어져 너덜거렸다.

마리아의 말이 옳았다. 적어도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면 지금보다는 덜 비참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클레어는 루이자의 수치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대부인께서 축하주 잔에 탄 약이 무엇인지 찾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진정제를 탄 술을 제게 먹일 계략을 짜셨잖아요. 에리히가 먼저 막는다고 막았지만, 축하주는 파티장으로 나왔어요. 그걸 에리히가 마셨어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면서 찬찬히 루이자의 안색을 살폈다.

루이자는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피로 탓인지 이해력도 좀 떨어진 상태인 듯 클레어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축하주 같은 건 안 보냈는데?”

“주류 관리실에 노라라고 하는 하녀가 와서, 대부인의 심부름이라면서 술을 따로 준비했다더군요.”

이 일로 인해 집사부도 발칵 뒤집혔다. 공범도 찾아야 하지만, 설령 공범이 없다 한들 그 축하주를 그대로 내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클레어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어제 파티장에서 대부인께서 제게 보낸 축하주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걸 마시고 에리히가 쓰러져서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루이자가 눈을 깜박깜박하다가 다음 순간 경악해서 벌떡 일어섰다.

“에, 에리히가 쓰러져? 괜찮아?”

루이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간절히 물었다. 클레어는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몰랐던 것처럼 보였다.

“아직 혼수상태지만, 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다는군요.”

그건 약간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젯밤 한순간은 정말로 큰일이 나는 줄 알았으니까.

에리히는 잠들었다기보다는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이만큼 흔들면 일주일간 밤을 새운 사람도 깨겠다 싶은 수준으로 흔들고 자극해도 무의식적인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체온은 점차 하락했고, 심박수와 호흡도 천천히 떨어졌다. 클레어는 사람의 피부가 그렇게 차가워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시체를 만지면 이런 기분이 될까 싶었다.

원인을 모르니 치료도 불가능하고, 대증요법으로 처치한다고 해도 인공호흡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클레어는 이쪽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생에 왜 의사가 아니었는지를 한탄했다.

의사였다고 해도, 빈손으로 시대 수준을 넘어서서 의료 처치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있는 약물 중에서 무엇을 써도 되는지는 알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아니, 적어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새벽이 되자 체온도, 호흡도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뺨을 어루만지면 자연스러운 반응이 돌아왔다.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그건 에리히의 강건한 체질이 스스로 버텨 낸 것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클레어가 시선을 들어 루이자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넣었는지 말씀하세요. 문제가 뭔지 알아야 의사도 뭐라도 조치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나, 난 아냐.”

“애초부터 해치려던 게 에리히는 아니었을 거잖아요.”

“하아, 하, 하아!”

루이자가 숨이 막히는 듯 발작적으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런 일 시킨 적 없어. 노라, 노라를 불러 줘! 난 아냐! 아냐!”

“유감이지만, 호프만 양을 부를 수는 없겠어요. 어제부터 행방불명이 되었거든요.”

루이자의 호소에 클레어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때였다. 쾅쾅, 격한 노크 소리에 이어 다급히 문이 열렸다.

“노라 호프만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달려온 보안요원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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