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웃을 뻔한 것은 에리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기민하게 판단했다.
여기서 웃으면 엘리엇은 삐진다. 모처럼 엘리엇이 자기편을 들어 주고 있는 귀중한 순간인데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아픈 건 잘못이 아니야.”
“웅. 그치만…….”
엘리엇이 심각한 얼굴로 웅얼거리다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알았어요. 아저씨 잘못 아니니까 이모가 화내면 내가 대신 싸워 줄게요.”
“잠깐, 아픈데 내가 왜 화를 낸다는 거야? 엘리엇, 내가 언제 너 아플 때 화냈어?”
“화냈어. 저번에두 내가 배 아프댔는데 화내고.”
“그건 네가 손 안 씻고 쿠키 먹어서 그런 거잖아. 이모는 아픈 거에 화낸 게 아니라 손을 안 씻은 거에 화낸 거야.”
“아저씨 손 안 씻었어요?”
엘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리히를 돌아보았다. 에리히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면 안 돼요. 병 걸려요. 그리고 아프면 침대에 잘 누워서 쉬어야 해요.”
엘리엇이 눈썹을 치켜들고 에리히를 꾸짖었다. 그건 에리히의 버릇을 배운 것이었다.
아직 어린 도련님이 똑같은 얼굴로 에리히를 꾸짖는 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또다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주치의 브란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방금까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통하지도 않는 잔소리를 하던 중이라 속 시원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클레어만이 웃는 낯 하나도 없이 엘리엇에게 동조했다.
“다섯 살짜리도 날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
“당신은 지금 일어나 앉아서 서류를 들고 있어요?”
“한 장짜리 보고서야.”
에리히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처음에는 웃음을 참았지만, 지금은 억울했다.
“한 장이든 열 장이든 보고서는 보고서지.”
클레어가 침대 가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리히는 순순히 보고서를 클레어의 손에 넘겨주었다.
클레어는 흘끔, 보고서의 제목을 훑어보고 파벨을 돌아보았다.
“우리 똑똑한 엘리엇은 가서 겉옷도 벗고 오렴. 파벨 경, 엘리엇이 신을 수 있는 슬리퍼가 있을까요?”
“그럼요. 모든 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도련님인데, 파벨이 준비를 하지 않았겠는가? 언제 놀러 오실지 모르니 갈아입을 옷부터 아이용 침구까지,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클레어는 엘리엇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엘리엇은 약간 걱정하는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파벨의 손을 잡고 나갔다.
에리히는 눈썹을 치켜든 채로 클레어를 올려다보았다. 클레어는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에리히를 무시하고 브란트에게 물었다.
“어때요?”
“체온, 맥박, 호흡, 모두 정상이십니다.”
“다른 건요? 뭐 판단력이 흐리다거나 신경 반응이 잘못되었다거나.”
“멀쩡해.”
에리히가 대답했다. 클레어는 그를 깨끗하게 무시했다.
브란트가 에리히의 눈치를 조금 보고 슬그머니 대답했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이제 검사도 해 봐야 하는데…….”
“브란트 선생님한테 협조하세요.”
“멀쩡하다니까.”
“어젯밤에 자기 입으로 판단력 저하 중이라고 해 놓고 무슨 소리예요. 판단력이 저하되어서 멀쩡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보장을 누가 해요?”
대답할 말이 없어져서 에리히는 패배했다는 뜻으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게 그걸 왜 마셔요? 내가 엎어 버리겠다고 했잖아요.”
“내가 안이했어. 사과하지.”
“……사과는 무슨. 내가 마신 것도 아닌데.”
“걱정했어?”
클레어는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는 대신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한 번 쓰다듬었다. 미간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가볍게 말하지 말아요. 대부인 말고도 술잔에 독을 탈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어요.”
“청산가리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농담하지 말아요. 정체불명의 화합물이 더 무서우니까.”
에리히가 손을 뻗어 클레어의 뺨에 얹었다. 클레어는 그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떨리는 숨이 그의 손바닥을 채웠다. 치솟는 감정을 꽉꽉 눌러 담으려 했지만, 속이 칼로 다져지는 것 같아서 좀처럼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에리히가 평소처럼 같이 언성을 높이는 대신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여 클레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군.”
“뻔히 알면서 마시고 말이에요.”
클레어는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와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다. 거기서 왜 웃음이 새었는지 자신도 알 길이 없었다.
고개를 들 때까지도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안심한 탓인지도 모른다.
에리히가 그제야 말했다.
“웃는 게 훨씬 낫군.”
“지금 남을 평가할 주제가 못 되세요, 공작님.”
클레어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파벨이 엘리엇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뽀송뽀송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도련님이 졸리신 것 같아서요.”
“나 안 졸려.”
“엘리엇, 이모가 부탁 하나 해도 돼?”
“부탁?”
엘리엇이 잠이 반짝 깬 듯 고개를 들었다. 이모의 부탁이라니, 드문 일이었다.
“보나 마나 아저씨가 안 자고 일어나려고 할 거거든. 침대에 꼭 잡아 놓고 있어.”
“왜?”
“아픈데 놀러 나가려고 할걸?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게 엘리엇이 꼭 지켜.”
“아저씨 나쁜 아이였어?”
엘리엇이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충격받은 눈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에리히는 황당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말했다.
“알았어.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지.”
“잘 생각했어요.”
에리히는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했지만, 엘리엇이 “아저씨 이제 코 자자.” 하면서 토닥이는 바람에 입 다물고 다시 누웠다.
멀쩡하다고 주장하더니, 역시 그렇지 않았다. 에리히는 몇 분 되지도 않아 곯아떨어졌다.
엘리엇은 자기가 어른을 재운 것이 신기했는지, 흥미진진한 얼굴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가 에리히를 돌아보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고 킥킥 웃다가 행여나 에리히가 잠이 깰세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는 꼴이 귀여워 입 다물고 보고 있자니, 에리히가 잠결에 손을 뻗어 엘리엇을 끌어당겨 토닥였다.
누가 누굴 재운 건지, 엘리엇이 금세 가물거리다 눈을 감았다.
나란히 잠든 얼굴이 똑 닮아 누가 봐도 부자지간 같았다.
‘제 자식도 아닌데.’
클레어는 미묘한 마음 상태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리히가 원래부터 아이를 그렇게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제게는 태어날 때부터 키운 친조카지만, 에리히에게는 아니다. 제 자식이라고 착각했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받아들여 주는 게 고맙고, 다소는 신기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게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른으로서 당연한 정도의 친절과 형식상의 책임만 함께해 주어도 고맙게 여겼을 텐데.
에리히가 이렇게까지 해 주니, 그 마음에 보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이게 자신이 지켜야 할 가족이다.
클레어는 침실에서 조용히 나왔다.
복도에서 그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벨프 후작가의 문제에 관해 서류를 꾸며 왔습니다.”
“아, 고마워. 빠르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그레이가 약간 느릿하게 물었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너도 밤새웠지?”
“저는 일이니까요.”
클레어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레이는 무심결에 손을 뻗을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손가락만 까닥하는 정도로 멈출 수 있었다.
오랫동안 동요한 일이 없었는데. 하지만 본디 한번 물꼬가 터진 제방은 수리하기 어려운 법이다. 가득 차 있다면 더욱더 말이다.
그는 마치 손가락 관절을 푸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이 까드득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평범하게 폈다. 그리고 단정하게 말했다.
“공작 각하는 강건한 분이시니, 금세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고마워.”
클레어가 애써 웃었다.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는 애매했다.
그녀는 에리히에게서 빼앗은 보고서를 우선 훑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빨리 처리해 버릴 작정이었다.
그건 지난 1년 동안 루이자가 주고받은 선물의 내역과 그 상대를 정리한 것이었다.
의사가 처방하지 않은 진정제는 다른 사람이 주었을 것이고, 공짜로 넘겨받진 않았을 테니 선물로든 무엇으로든 보상을 했을 것이다.
이건 나중에 장부를 검토한 다음 루이자의 시녀였던 마리아와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클레어는 보고서를 대강 접어 주머니에 쑤셔 박고, 뒤따라 나온 막시밀리안에게 물었다.
“벨프 후작과 그 장남은?”
“조금 전에 후작가의 변호사가 당도했다고 합니다. 접견실에 대기시켰습니다.”
“알았어요.”
클레어는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변호사가 있어도 문제없다는 의미로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클레어는 성큼성큼 접견실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두 남자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