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1/263)

52화

벨프 후작은 거의 진이 빠져 있었다.

아침까지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클라우제너에서 무슨 변고가 생겼음을 직감한 벨프 후작가의 법률 고문이 달려왔다.

그는 저간의 사정을 듣고 파랗게 질린 채 이렇게 말했다.

“공작님의 약혼녀를 해치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셨더라도, 지금 델포드 남작의 서명을 위조하신 건 확실한 사실이 아닙니까?”

“그깟 계집의 서명 하나에 이 난리를…….”

“델포드 남작가는 귀족원 명부에 이름을 올린 귀족인 데다가 작지만 수백 년 동안 영지를 유지해 온 가문입니다.”

“그게 대체 뭐?”

벨프 후작은 입가를 비틀고 말했다.

그래 봤자 아렌의 남작이다.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어도, 진짜로 귀족원 총회에 참석한 적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거기에는 제대로 된 법률 고문조차 없지 않나. 위빙 상단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 봤자 델포드에는 제대로 된 가신조차 없는데. 그 정부인 변호사 놈도 농노 아니었나!”

변호사는 기가 막혔다. 그레이 셔우드를 농노라고 부르다니.

그러나 벨프 후작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후작을 납득시키기 위해 조곤조곤 설명했다.

“영주의 서명을 위조하는 것은 그 영지를 탈취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상대방이 그렇게 주장하면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지전을 일으킬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이 됩니다. 혹은 황제 폐하께서 정당하게 수여하신 영지를 강탈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내전이고, 후자는 반역이란 말입니다!”

당사자인 귀족들은 공부하는 것을 잊었을지 몰라도, 그 법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프리드리히 대제 이후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면서 사병이 혁파되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잊었을 뿐이다.

실제로 영지의 경계에서 병사들이 피를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지전을 가문 간의 전쟁이라고 해석하면, 상대를 파멸시킬 방법은 병사를 동원하는 것만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 변호사는 슐츠&셔우드의 그 셔우드다. 법정으로 가면 일은 더 어려워진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중재를 청하십시오. 그게 제일 낫습니다.”

벨프 후작이 비로소 심각성을 깨달은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히 두렵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에리히 공이 지금 우리를 이런 식으로 핍박하고 있지 않은가!”

“중재를 청한다 한들, 약혼녀를 건드린 상황인데 받아들이겠습니까? 어제 태도를 보셨잖습니까? 고모님까지 끌어내라고 했는데요.”

요시아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벨프 후작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래. 에리히 공이 원한다면 사과할 수 있어. 하지만 일방적으로는 안 돼. 철저히 따질 거라면, 클라우제너에서 이렇게 우리를 가둬 두고 있는 것도 따져야지.”

변호사는 지난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터지는 속을 물로 달랬다.

어디 클라우제너와 벨프가 같은 입장인가. 지배 가문이 지배 가문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콩콩.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것은 막시밀리안이고, 제일 앞장서서 들어온 것은 클레어였다.

변호사만 혼자 일어섰다.

그와 그레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레이가 살짝 고개를 숙여 그에게 묵례했다. 어쨌든 동문이라,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클레어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벨프 후작의 건너편 자리에 섰다.

벨프 후작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제저녁에 인사할 때에는 에리히가 있어서 형식상의 예의라도 갖추더니, 이제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클레어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새로 생긴 인척이 아니라 위빙 상단의 주인으로서 프라흐 상단의 주인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긴 하는군요, 후작님.”

“…….”

“왜 그러세요? 돈 귀신이 붙은 천박한 아렌 계집 따위와는 대화할 마음이 없으신가요?”

클레어가 반듯한 자세로 고개를 든 채 눈만 내리깔고 벨프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후작가의 운명을 거셔야 할 텐데도?”

그녀는 오만한 자세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리히의 흉내를 일부 내는 것만으로도 꽤나 그럴듯했던 모양이다.

벨프 후작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성질대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막시밀리안이 클레어의 등 뒤에서 새파랗게 날 선 검처럼 서 있었기 때문이다.

행여 울분에 손이라도 내미는 순간 그것을 트집 잡아 클라우제너가 벨프를 짓밟으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클레어는 그것까지 알아채고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여전히 벨프 후작은 그녀의 가치를 ‘에리히의 여자’로밖에 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레이.”

지시를 받은 그레이가 차분한 태도로 벨프 후작과 변호사 앞에 각자 서류를 내려놓았다.

“변호사님 쪽은 사본입니다. 검토하기 편하시도록.”

첫 번째 서류는 벨프 후작가의 모든 자료와 자산을 동결해서 델포드 남작가에게 넘기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것까지 보지도 않고 벨프 후작은 분기탱천하여 벌떡 일어섰다.

“감히 이따위 미친 개소리를……!”

“확실히 말씀드려서.”

클레어가 큰 목소리로 벨프 후작의 분노를 끊었다.

“벨프 후작가를 그냥 파산시키는 게 가장 간단합니다. 이 자리에서 편지만 몇 통 써도 가능한 일이죠. 후작님이 위조하신 바로 그 서명으로.”

“뭣?!”

“부채액이 너무 커서 자산이 되기는커녕 위자료도 안 되는데 넘기라고 하는 건 프라흐 상단의 직원들 때문입니다. 거절하시면 그냥 파산시킬 테니 그리 알고 결정하세요. 먹고살 만큼은 충분히 남겨 드렸습니다.”

“허튼소리! 네가 아무리 에리히 공의 마음을 얻었다고 해서 앉은 자리에서 후작가의 핵심을 빼먹으려고 해?!”

“좋은 일이군요. 금력이 가문을 유지하는 핵심이라는 건 알고 계시는 것 같으니.”

클레어가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벨프 후작은 그 말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전부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깨닫고 숨을 들이켰다.

요시아스가 끼어들었다.

“남작님의 말씀은 도가 지나칩니다.”

“그런가요?”

“잘못은 통감합니다. 숙녀의 명예를 해치려고 한 일도, 결혼 계약서의 한계를 넘어 클라우제너의 후계에 간섭하려고 한 일도 모두 잘못이지요. 마음이 풀리실 때까지 사과드리겠습니다.”

요시아스의 얼굴은 숙취로 초췌했으나 눈은 명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클라우제너도 벨프를 가신 취급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가산을 몰수하겠다니요. 그런 권한을 가진 것은 황제 폐하의 법정뿐입니다.”

영지전보다는 재판이 낫다. 어차피 칩거하여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된 황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고,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귀족원은 후작이 남작에게 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원과 내각은 이제 와서 지배 가문이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적당한 타협과 협상이 오가게 될 것이다. 벨프 후작가가 비록 클라우제너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런 상황을 만들 정도의 인맥은 있다고 요시아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비웃음처럼 보였다.

“딱히 영지전 같은 유난스러운 소리를 할 생각은 저도 없어요. 받을 걸 받는 걸로도 충분할 테니.”

클레어의 눈짓을 받은 그레이가 서류 뭉치를 하나 꺼내어 벨프 후작 앞에 내려놓았다.

“벨프 후작가와 프라흐 상단의 명의로 발행된 차용증과 어음으로, 합계 2천만 골드입니다.”

벨프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 수는 없었다. 물론 그가 여기저기에 손을 많이 벌린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믿을 만한 곳, 오래된 거래처에서 빌린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위빙 상단 따위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차용증에 손을 뻗었다. 찢어 버릴 작정이었는데, 그 전에 막시밀리안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레이가 다른 차용증 뭉치를 내려놓았다.

“이건 한 달 이내에 기한이 돌아올 차용증과 어음입니다.”

벨프 후작의 낯빛이 차츰차츰 파랗게 변색했다. 클레어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설마 돌아올 줄 모르신 건 아니겠지요? 유감스럽게도, 채무자의 명예를 위해서 빌려준 돈을 포기하는 사람 같은 건 이야기 속에나 있는 거랍니다.”

달라는 말을 못 해서 포기하거나 기한을 연장해 주던 사람도, 위빙 상단에서 사들인다고 하니 채권을 파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클레어가 이 채권들을 확보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파산시키고 후작가를 해체해서 삼키려면 언제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은 벨프 후작가가 클라우제너의 인척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동안, 에리히만 위빙 상단의 존재를 알면서도 외면했던 게 아니다. 그녀도 클라우제너의 이름과 연관된 곳에서 시선을 돌렸었다.

지나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는 굳이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결혼이 결정된 후에는 에리히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루이자는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걸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클레어는 자신이 이단적인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루이자와 그 가족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해도 인내심을 발휘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용서는 약을 마신 에리히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협상과 타협은 변호사들의 일로 넘어갔다.

그녀가 할 일은 보복이었다.

“절차가 필요하다면 하루의 시간을 드리죠. 오늘 일몰까지 2천만 골드를 상환한다면, 가산을 압류하는 것은 보류하겠어요.”

물론, 그 뒤에도 계속해서 기한이 돌아오는 채무를 상환해야 한다.

가능할 리 없다. 벨프 후작가에 남아 있는 현금은 1백만 골드도 안 될 테니까. 저택의 도자기까지 전부 팔아도 그 절반도 갚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기한이 돌아올 어음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벨프 후작이 목이 졸린 듯한 얼굴로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레이가 두 번째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향후 어떤 방식으로도 상업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밀어진 서류는 벨프 후작의 직계 가족이 향후 20년 동안 수도와 델포드 영지 인근에 발을 디디지 않겠다는 서약서였다.

“무슨, 무슨 권리로…….”

이건 가문을 포기하라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이제 혈통만으로는 귀족적인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무력도, 혈통도 권력을 담보하지 않았다.

과거에 영지병을 거느리고 권력으로 다스렸듯, 지금은 재산을 쌓아 놓고 돈으로 사람을 고용하며 금권으로 장악해야 한다.

재정적 어려움을 겪다가 쇠락하여 작위까지 팔아 버린 가문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건 델포드 남작가와의 영지전이다. 그 말이 비수처럼 그의 뇌리에 제대로 박혔다.

무기와 병사 대신 돈이 움직였다.

“목장이 딸린 장원을 하나 남겨 드리죠. 대부인의 친정인데 길바닥을 전전하게 할 생각까지는 없어요.”

벨프 후작은 몇 번이나 새액새액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두 번째만이 아니라 세 번째 서약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앞으로 20년 동안 수도에 오지 못하면 자녀들의 혼사에 지장을 준다. 혼맥을 막은 것이다.

사실상 중앙 귀족의 지위를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납득할 수 없었지만, 채무의 무게는 목에 차꼬를 매다는 것만큼이나 지독했다.

“아버지…….”

요시아스가 불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벨프 후작은 어쩔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문서에 서명했다.

그레이가 문서를 회수했다. 클레어는 그것을 확인하고, 일어섰다.

“원만하게 합의가 이루어져서 기쁘군요.”

“원만이라니…….”

벨프 후작은 반발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끓는 기름처럼 뜨거운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돌려보내세요.”

클레어가 짧게 말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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