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다음 단계가 궁금합니다.”
“이제 다른 신문사들이 이 문장을 가져다 헤드라인으로 쓰면서 기사를 재생산할 거예요. 결혼식 후에는 이 이미지를 받아 이어 나갈 만한 모델이 필요해지겠죠.”
클레어가 말했다.
“모델을 위한 다이아몬드도요.”
“예. 광산 대리인에게도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빌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제너의 광산은 광산일 뿐이지 보석상은 아니었으나, 루이자가 오랫동안 간섭한 덕에 그쪽과도 거래처 이상의 인연을 갖고 있었다.
그게 루이자가 클라우제너에서 한 일 중에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조차도 클레어가 다이아몬드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무의미했겠지만 말이다.
빌헬름은 자제하지 못하고 하늘을 날려는 입꼬리를 애써 점잖게 내리눌렀다.
그는 정말이지 이 새로운 여주인이 좋았다. 대부인의 씀씀이와 다이아몬드의 수익률 하락은 그가 클라우제너의 곳간지기가 된 이래 언제나 골칫거리였는데, 클레어는 그것을 마치 빗자루로 쓸듯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온 김에 동의를 구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 일이 무엇이든, 제게 동의를 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딱히 가주 대리로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서요. 늦어진 김에 결혼식의 규모를 키울까 해요.”
“그것도, 뜻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예산이 드니까요.”
“각하께선 내실에서 쓰는 예산에 제한을 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에리히의 그 방침에 복장 터져 했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빌헬름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도 클레어가 예산 서류를 내밀었기에 일단 받았다.
“약혼 파티 이래 에리히가 두문불출하는 데다가, 벨프 후작가와 대부인이 시골로 내려가는 바람에 결혼식을 두고 말이 좀 있는 걸로 알아요.”
“예.”
굳이 안 해도 될 약혼 파티를 계획하고, 결혼식까지 일정도 길게 잡은 것은 다이아몬드 때문이었다. 예물을 제작할 시간도 필요했고, 제작된 예물을 홍보용으로 쓸 시간도 필요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약혼 파티 때의 일이 있었어도, 굳이 일정을 더 늦추거나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클레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도록 아주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에요. 굳이 친인척만 초대하는 게 아니라 어지간한 사람은 다 구경할 수 있도록. 대성당의 홀을 이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교섭하고 있어요.”
빌헬름이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클레어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클라우제너의 고용인, 영지민 출신으로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 가신 전원, 델포드 가문의 거래처를 비롯해 가능하면 인연이 있는 중산 계급 전부에게 초대장을 발송할 거예요.”
“논란이 될 겁니다.”
“그래서 대성당을 이용하려는 거예요.”
예배당에서는 비록 같은 신분끼리 모여서 앉기는 하지만, 완전히 공간을 분리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
“알겠습니다. 예산에는 문제가 없으니, 설령 추가적인 증액이 필요하더라도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클레어는 빙긋 웃어 보였으나 속내까지 그렇게 평화롭지는 않았다.
‘결혼을 막으려는 자가 있으니, 오히려 더 떵떵거리면서 해 주는 게 도리지.’
만일에 원한 때문이거나 엘리엇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했다면, 클레어는 움츠렸을 것이다.
자신이 무릎을 꿇고 웅크려 폭풍을 넘길 수 있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궁극적인 목적이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이권이든 로멜 우월주의든, 혹은 치정이든, 상대가 문제로 삼은 것은 결혼 그 자체다.
자신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시도했을 것이다. 노라 호프만을 죽인 것처럼 밤길에 칼을 들고 습격하거나 청산가리 같은 독극물로 단번에 독살을 시도하는 방법이 훨씬 간편하다.
지금까지 신경 써서 경호를 데리고 다닌 적이 없으니까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루이자에게 혐의가 가도록 설계하여 약혼 파티에서 축하주에 약을 탄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추문을 감당 못 할 크기로 키워 자신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의 악의에 소름이 돋았다. 고작해야 결혼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그리고 클레어는 그런 놈에게는 절대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었다.
‘그런 작자는, 이쪽에서 소극적으로 나가면 더 기세등등해져서 지랄이 나는 법이지.’
기어이 잡아다 주리를 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할 수는 없었다. 노라 호프만이 죽어 버리면서 단서는 끊어지고 말았다.
루이자는 아는 것이 없고, 그녀의 방에서도, 벨프 후작가에서도 별달리 발견된 것이 없었다.
지금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축하주에 들어 있던 약이 아편계 알칼로이드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불분명했다. 화학 분석만으로 전 성분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편제제는 루이자의 방에서도, 벨프 후작가에서도 발견됐으나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두통약으로 모르핀을 처방하기도 하는 시대였다.
앞으로 자기 가족의 것만이라도 처방전을 모조리 직접 확인하겠다는 결심의 계기만 되었을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조사를 계속하면서, 상대가 움직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이 이렇게 고분고분하다니.’
한편, 집무실 한쪽을 지키고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막시밀리안은 놀랐다.
빌헬름은 까다롭고 보수적인 성격이다. 에리히가 택한 안주인이니 받들어 모시기는 하겠지만, 내실의 예산을 제외한 다른 돈주머니의 끈은 꽉 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긴급 사태였다고는 하지만, 에리히가 쓰러진 날로부터 사흘 만에 보안부가 가진 정보 전체를 클레어에게 개방하고 그녀의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
능력적으로도, 신뢰 문제로도, 그래도 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재산 관리인인 빌헬름과 보안부장인 자신이 무릎을 꿇으면, 클라우제너는 전부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가문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힘인 금력과 권력, 둘 다를 쥐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라서 가주 대행으로 쉽게 받아들였던 거지만, 겪어 보지 않았다면 아마 시간이 좀 더 걸렸겠지. 각하께서는 그걸 노리고 일부러 ……고 계신 건가?’
단순히 클레어가 걱정하기 때문에 그런다기에는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혼자 생각이 너무 많았는지, 클레어가 던지는 질문에 그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왜 웃고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이것 좀…… 아니.”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뿐 아니라 티테이블 위에까지 서류가 넘쳐흘러 보조용 책상과 서류함을 더 갖다 놨지만, 거기에도 쓰러질 만큼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남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으휴…….”
“잠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급하지 않은 일은 각하께서 회복하실 때까지 미뤄 두셔도 될 겁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서두른다고 뭐가 해결될 것도 아니고.”
비서에게 넘기라고 했으면 안 된다고 했겠지만, 에리히의 손 위에라면 대충 이것의 5.6배쯤은 넘겨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3인분은 하고 있을 거야. 아마.’
대행한테 3인분 시킬 정도면 본인은 17인분은 해야지.
클레어는 일어섰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보좌관들도 오늘은 일이 적당히 마무리되는 대로 퇴근하라고 전해 주세요.”
“수행하겠습니다.”
“어차피 집 안에서 움직이는 건데요. 괜찮아요. 에리히를 보러 갈 거니까.”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예를 올렸다. 클레어는 집무실을 떠났다.
클레어에게는 비밀이지만, 그 시간에 에리히는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공식 접견실이 아니라 사실에 붙어 있는 소규모 응접실에서다. 손님은 슈나이더 백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이런 곳까지 오시게 해서 실례했습니다.”
“아닐세. 내 딸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사과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네.”
슈나이더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날 이리스가 저지른 일을 듣고는 기가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네게 아무런 생각이 없었더라도, 이렇게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한 이상, 거기에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 댈지 몰랐니!]
딸을 그렇게 크게 꾸짖어 본 건 처음이었다. 이리스가 온 얼굴이 새빨개지고 퉁퉁 부어오르도록 서럽게 우는 것을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었다.
[네 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니? 네가 에리히 공을 사모하는 줄 나도 알고, 그래서 또 네 마음을 보답받는 날이 혹시라도 있을까 싶어 여태 아무 말 안 했던 거야.]
[아빠.]
[하지만 아니지 않았니? 너도 알지 않니. 우리 가문은 원래 클라우제너의 혼맥이 될 만한 가문이 아니야. 세상이 달라졌고, 너는 너무나 어여쁜 아이니, 만일에 에리히 공이 널 사랑한다면 나도 기꺼이 찬성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