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빠, 아빠라도 내 편이어야죠. 아빠가 왜 내 편이 아니에요? 아빠아, 아빠가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건 현실이야, 이리스. 미안하구나. 아빠가 더 대단한 사람이었으면, 에리히 공에게 혼담을 넣었을 텐데 말이다. 아빠가 그러지 못할 신분이라, 미안하구나.]
결국 그는 이리스를 끌어안고 사과하고 말았다.
자신의 마음까지 쓰리고 아팠다. 로멜의 전통 있는 백작가 후계자로 태어나 신분에서도, 금전적인 면에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딸이 가장 바라는 일에 자신이 장애가 된 것 같아 마음 아팠다. 아비가 되어서 노력하기는커녕 감히 원망조차 할 수 없다는 게 속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내 분명히 파티에 가지 말라고 일렀는데, 너무 상냥하게 말했던 모양이야. 아이가 허튼 생각 하는 것을 말리지 못했으니 모두 내 탓일세. 내가 대신 사죄하겠네.”
“이리스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요.”
에리히의 말에 슈나이더 백작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사이이고, 부친의 친구라 그는 에리히에게 하대했다. 그러나 신분의 고하는 말투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대등한 친분 관계라는 것은 허상이다. 특히 에리히 같은 사람에게는.
클라우제너와 슈나이더의 우정이 오래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클라우제너가 관대하게 슈나이더에게 우정을 허락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그러니 에리히 앞에서 슈나이더 백작은 감히 고개도 마주 들지 못했다.
“제 약혼녀가 그런 일로 이리스를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두 번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날 일은 이미 끝났으니 백작님께서 그렇게 고개 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에리히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백작님께 연락을 드린 건 부인을 단속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슈나이더 백작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에리히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돌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아니. 조심시키겠네. 내 아내가 이리스에게 워낙 지극정성이라, 혹 실수를 저지른 게 있을지도 모르니…….”
“하녀를 매수하여 술잔에 약을 타는 것은 실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백작님.”
백작은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야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다음에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공은 설마, 내 아내를 의심하는 건가?”
“…….”
“어떻게 그럴 수가……!”
백작이 울분을 다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딸이 어리석게도 공을 사모하여 잘못을 저질렀고, 또 내 아내가 천한 출신 주제에 이런저런 수작을 부려 날 유혹했다고 남들이 뒷말하는 것을 알고 있네.”
“백작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모함할 수는 없네! 독살 시도를 했다고 누명을 씌울 수는 없어!”
에리히는 침묵한 채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확실한 증거를 찾고 있는 듯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증명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판단하고 처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판단하기에 동기가 확실하다면 범인도 확실했다.
결혼이 목적이라면, 상대는 분명하다.
누가 여태까지 근거 희박한 소문을 퍼뜨려 이리스를 자신의 짝으로 엮었는가? 누가 여태까지 자신과 연령이 맞는 젊은 숙녀들을 견제해 왔는가?
그러나 이리스에게는 이번 사건을 벌일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백작 부인이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딸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백작의 안색이 점점 검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울분과 억울함이 뒤섞인 그 표정을 보고 에리히는 슈나이더 백작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백작님이 정이 깊은 성격이라 17년이나 함께 살아온 아내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리스를 위해서라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아내는 아닐세.”
슈나이더 백작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거기까지는 에리히가 관여할 일이 아니긴 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여기서 직접 손을 써서 슈나이더 백작 부인을 치울 생각은 없었다.
치우는 것 자체는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면, 또 클레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아마도 이리스가 약혼 파티에 왔던 일 때문에 그 어머니에게까지 보복했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에리히는 이제 클레어를 둘러싼 시선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것에 굴복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자기 힘으로 헤쳐 나갈 능력이 없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종류의 평가를 받게 된 사람이다. 당연히 자신이 미리 막을 수 있을 만큼 막아야 했다.
그러니 경고만 주고 넘어가는 것이다.
만일에 약을 먹은 것이 클레어였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약을 먹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눈감을 수 있었다.
“내가 이리스에게는 꼭 델포드 남작님께 사죄를 드리게끔 하겠네. 오해가 있었다면 아내도 같이…….”
그가 입을 다물자 슈나이더 백작이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일은 그냥 멀리 두고 잊는 편이 나은 법이죠.”
대면해서 사과하게 한다고 해도 이리스가 진짜로 제 잘못을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공연히 클레어의 마음만 상하게 하리라.
슈나이더 백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네. 이리스는 내 꼭 제대로 꾸짖어 근신시키겠네.”
“부디 모든 일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갔으면 합니다. 클라우제너가 슈나이더 백작가를 보호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백작님.”
슈나이더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잊지 않았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집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남작님께서 집무실을 떠나셨습니다.』
에리히의 표정에 긴장이 돌았다. 슈나이더 백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일 있는가?”
“파벨이 대접해 드릴 겁니다. 저는 좀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슈나이더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히는 서두르는 걸음으로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손으로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크라바트와 코트를 벗어 뒤따르는 시종에게 던졌다.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황급히 그의 어깨에 실내용 드레싱 가운을 걸쳐 주었다. 그는 침실로 들어서기 전에 신발도 벗고, 슬리퍼를 발에 꿰어 신었다.
그러고 나자 똑 오후까지 늦잠을 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침실에 연결된 작은 티룸으로 들어갔다가 이번에는 열린 창을 통해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테라스 앞 정원, 작은 분수에서 솟는 물소리가 하늘을 메웠다. 측백나무 울타리를 쳐서 외부의 시야를 차단한 이 작은 정원은 아주 사적인 공간이었다.
정원에 새로 들인 해적선 안에서 신나게 놀고 있던 엘리엇이 두 팔을 흔들었다.
“아저씨!”
에리히는 아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가 깔깔 웃음을 터뜨리고는, 도도도 달려왔다.
“아저씨! 화장실 갔다 왔어요?”
“그런 말을 함부로 묻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엘리엇.”
품에 뛰어드는 아이를 받아 안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에리히는 점잖게 주의를 주었다.
엘리엇이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다시 말했다.
“그치만 엄청 오래 걸렸는데.”
“…….”
“이모도 맨날 그래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대요.”
“큭.”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참지 못하고 뿜는 소리를 냈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에리히 클라우제너에게 장 사정을 물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에리히가 흘긋 그를 쳐다보았으나 이미 시종은 표정을 단속한 뒤였다.
충실하지 못한 몸가짐이었으나 이런 일로 일일이 시종을 꾸짖을 만큼 가혹한 주인은 아니었으므로 에리히는 한숨만 내쉬고 가볍게 말했다.
“그런 것으로 하자.”
에리히 입장에서는, 자신이 자리를 오래 비워도 클레어가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엘리엇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채소도 먹어야 해요.”
“……그래.”
엘리엇이 까르르 웃었다. 에리히는 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밀을 지켜 달라고 말했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우려되었다.
“가서 놀아라.”
“이힛!”
엘리엇이 신나서 괜히 에리히의 뺨에 한 번 뽀뽀하고 도로 달려갔다.
그는 긴 의자에 몸을 눕히고 곁에 놓인 탁자에서 크리스털 잔을 집어 들어 음료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금세, 누가 봐도 지쳐 몸이 무거운 사람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그러다가 문득 곁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눈이 마주쳤다.
“…….”
시종이 얌전히 눈을 깔았다. 자고로 시중인이란 없는 듯해야 했으니, 절대 감정을 드러내거나 주인을 똑바로 쳐다봐서는 안 된다.
그러나 평생 안 하던 짓을 하는 주인을 보고는 눈을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건강한 상태인데, 여주인이 올 때만 되면 후유증을 앓는 사람처럼 구는 게 모로 봐도 꾀병이었다.
물론 시종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