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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55/263)

56화

집무실에 있을 때는 모르겠더니, 나와 보니까 아주 해가 청청하고 맑은 게 최고의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자신은 왜 집무실에 처박혀 일과 씨름하고 있는 걸까?

클레어는 이제는 아득해진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사원의 안구 복지를 신경 써서 전 층에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플리커프리 LED 조명, 큼직하고 비싼 모니터, 완벽하게 가동되는 공조기, 널찍하고 훌륭한 탕비실, 자동 컵세척기, 비품인 홍삼, 그리고 기타 등등, 또 기타 등등과 수면실.

‘그러지 말고 해 지기 전에 퇴근을 시켜 줘…….’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비서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자신도 똑같은 꼴이었다.

“하.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클레어는 어이없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래서 아랫사람 굴리기를 좋아하는 재벌3세와는 상종도 안 하려고 했건만. 에리히는 재벌3세는 아니고 17대 공작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픈 사람한테 일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공식적으로 에리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울 수 있는 건 인장 반지와 안주인의 열쇠를 모두 가진 자신뿐이었다.

각오가 있었다. 에리히가 다시 그녀의 검지에 자기 인장 반지를 끼워 주며 수고하라고 말하기 전까지 말이다.

얄미웠다.

클레어는 곧 에리히의 작은 정원에 들어섰다. 잔디밭에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 있었다.

“해적선.”

클레어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엇이 탐냈지만 사 주지 않았던 장난감 가게의 가구 중 하나였다.

“나는! 후크 선장이다!”

장난감 칼을 번쩍 쳐들며 엘리엇이 고함쳤다. 놀이 상대가 되어 주고 있는 보모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꺅! 도망쳐!”

“바다에 던져라!”

엘리엇이 기세를 올렸다.

클레어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피터 팬 이야기를 해 줬는데, 왜 후크 선장이 선한 역이고 웬디가 악역인 걸까.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 걸까.

그 이전에, 이 해적선은 어찌 된 건가.

당연히 지갑을 연 사람을 잡아야 했지만, 공범 역시 잡지 않을 순 없었다.

“엘.리.엇. 델.포.드!”

그녀가 발을 구르며 고함 지르자 엘리엇이 신나서 비명을 질렀다.

“웬디! 웬디가 왔다!! 도망쳐!!”

“꺅!”

보모들의 웃음소리와 달리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클레어는 기운을 냈다. 기대를 받았으면, 그에 부응해야 하는 것이 양육자의 의무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말아 올리고 해적선 안으로 뛰어들었다.

클레어가 테라스로 온 것은 그로부터 5분 후의 일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거리고, 걸음은 비틀거렸다.

긴 의자에 누워 햇볕을 만끽하던(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이는) 에리히는 웃음을 숨긴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클레어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말했다.

“저 해적선, 내가 사 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 거야.”

에리히는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헛소리 마요.”

“정원이 허전해서 목조 조형물을 들이게 했지.”

“장난감 배를 골라서요?”

“엘리엇에게 물어봐. 저게 누구 건지.”

“작당은 끝마쳤단 이야기네요.”

어처구니없었다.

아니, 좋은 일이었다. 둘이 자신을 따돌리고 음모를 꾸밀 정도로 친해지다니. 감사해서 큰절을 올려야 마땅한데 왠지 섭섭하고 질투 나고 억울했다.

클레어는 에리히를 밀어내고 의자 귀퉁이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그가 곁에 놔둔 잔을 끌어다가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얼굴을 찡그렸다.

“맛있네요.”

포도시럽에 탄산수를 탄 것이었다. 와인이었으면 한소리 하려고 했는데.

에리히가 더 이상 웃음을 누르지 못하고 큭큭 웃었다.

“누가 잔소리가 많아서.”

“나네. 내가 범인이네…….”

클레어는 그대로 빈자리 절반을 빼앗아 옆으로 드러누웠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했다.

“5세아에게 졌나?”

“저걸 어떻게 이겨요.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데. 나는 집무실에 하루 종일 갇혀 있고.”

“너한테 시간을 준다고 조깅을 할 것 같진 않은데.”

“아.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사람이 불평하지 마세요.”

“일어날까?”

“으으…….”

클레어는 그러라고 말하지 못했다.

사실 에리히는 벌써 일주일 전에 일상으로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그의 상태에 대해 둘 사이에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에리히가 생각하기에 사실 아편제제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중독자에 대한 시선이 좋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낮은 시대였고, 이성과 새로운 발견에 대한 신념은 모든 것을 압도했다.

요컨대 중독과 오남용은 정신력이 약한 개인의 문제고, 적절히 통제할 줄 아는 지성인이라면 도구로 쓸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에리히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노한 것은 약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이 일을 저지른 자들의 악의 때문이다. 클레어가 평소와 달리 이렇게 안달하며 예민하게 구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클레어는 적당히 무시할 수 없었다. 중독도, 부작용도, 후유증도 걱정이었다.

어쨌거나 에리히를 침대에 눕혀 놓고 있는 것은 클레어였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을 만끽하기로 했다.

“자업자득이지.”

클레어가 그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손으로 내리쳤다.

“혼자 일하는 게 억울하다구요.”

“지금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뭐예요? 맞으면서 흥분하는 취미가 있었어요?”

나한테 강요하지 말라며 클레어가 질색했다. 에리히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어디에 손대고 있는 건지는 알고 있고?”

“내가 뭘요?”

클레어가 쓱 손바닥을 문질렀다. 찰싹 때렸을 때는 허벅지 근육이 튼실하구나 싶어서 그런 거였을 뿐이지만, 본인이 의식하고 계신다면야.

에리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다 후회한다.”

“아픈 사람은 가만히 계시죠.”

에리히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픈 척하고 있는 주제에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로 갈 수도 없고, 여러모로 불편했다.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예 그녀를 제 몸 위에 올려놓는 방법도 있지만, 아이가 놀고 있는 정원에서는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대신 그는 클레어의 재킷 안으로 손을 넣어 블라우스 위로 등을 어루만졌다. 클레어가 움찔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일을 좀 줄이는 건 어때?”

“뭘 줄여요? 내 손가락에 이거 끼워 놓은 게 대체 누구시더라?”

클레어가 드러누운 채 왼손만 높이 들어 올려 인장 반지를 끼고 있는 검지만 까닥거렸다.

“일 중독자에게 적절하게 분배한 거지.”

“절대 아니거든요. 내 꿈과 드림은 돈 많은 백수거든요.”

일하지 않고 지대를 받아 신선놀음하는 삶, 건물주, 아니, 이 시대 기준으로는 토지주. 귀족. 그것이야말로 모두의 꿈이 아니겠는가.

물론 에리히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다이아몬드에까지 손댈 필요는 없었지.”

할 말이 없어진 클레어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 뭐랄까……. 지나가다가 발밑에 금화가 보였는데 몸을 구부리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 안 주울 수 없었던 거라고 할까…….”

“무덤 깊이만큼 묻혀 있는 금화를 파내려고 손수 삽질 중인 건 아니고?”

땅에서 파낸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틀리지도 않은 비유였다. 클레어는 체념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본주의 속에서 태어난 괴물인지라.”

그러고 보니 아직 자본주의 같은 용어는 없던가 하고 클레어는 얼핏 생각했지만, 에리히는 그녀가 가끔 쓰는 이상한 조어려니 하고 무시했다.

“쉴 거라고 말하면서 돈 벌려고 죽도록 일하고 있는 게 모순이라는 생각은 안 하나?”

“……그러게요.”

몸에 밴 습관 탓일까. 하지만 눈앞에 기회가 떨어져 있는데 줍지 않을 수는 없고, 줍다 보면 남에게 맡기는 게 속이 터졌다.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성에 차는 속도로 빠릿빠릿하게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뭘 시켜도 대부분 느려서 미칠 것 같았다.

영혼에 새겨진 K-직장인의 천형인가. 클레어는 스스로도 슬퍼졌다.

“그래도 뭐, 좋잖아요. 기회가 있을 때 사업을 일으켜 두면. 나중에 자식에게 물려줄 것도 많아지고.”

“날 뭐로 보고 그런 걱정을 해?”

“클라우제너는 장자상속이잖아요. 나는 남녀 상관없이 둘째 셋째도 똑같이 물려줄 거예요. 그러려면 위빙 상단 하나론 모자라다고요. 웬만해선 첫째한테 몰빵처럼 보일 테니까.”

그 말에 에리히가 대꾸하는 대신 클레어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클레어는 그가 미는 대로 넘어가 의자에 반쯤 누웠다. 에리히가 그녀의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입을 맞췄다.

“갑자기 뭐예요?”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그 키스를 받아주었다.

처음에만. 가볍게 뽀뽀나 할 줄 알았더니 깊어지는 키스에 숨이 막혀서 그녀는 에리히의 가슴팍을 대여섯 번이나 때렸다.

“잠깐!”

저항은 쉽게 봉쇄되었다. 클레어는 금세 녹진해졌다. 열린 입술 안쪽이 뜨겁게 젖었다.

“갑자기 뭐 땜에 그래요?”

에리히가 웃는 듯 화난 듯 애매한 얼굴에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말했다.

“기쁘군. 나는 네가 엘리엇 일이 끝나면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

“나에게 셋째까지 낳아 줄 작정이었다니.”

화난 게 아니라 이성이 소실된 상태였다. 클레어는 등골까지 오싹오싹한 흥분을 느끼면서 목을 움츠린 채 대꾸했다.

“지금 건 실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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