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6/263)

57화

에리히가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렇지. 깜박 실수로 나와 자고, 수습하려고 결혼도 할 수 있는 거지.”

클레어는 이유 없이 격분하려고 했지만, 그때까지 등에 가볍게 얹혀 있던 손이 미끄러져 올라와 그녀의 목뒤 아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에리히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로 내려오지 않고 왼손 손등에 닿았다.

감질나는 느낌에 클레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에리히가 그녀의 왼손을 받친 채 입술을 미끄러뜨려 약지를 깊숙이 제 입속으로 빨아들였다.

“에리히.”

그가 이로 반지 자리를 자국 날 정도로 아프게 깨물었다.

“읏.”

아파야 정상인데, 열감이 달렸다. 클레어는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물린 것은 손가락인데, 구두 속에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마침 오늘 이게 왔지.”

에리히가 드레싱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대충 비틀어 열었다.

상자도 장인이 만든 귀품일 텐데, 경첩이 떨어져 나갔다. 아깝다고 클레어가 말하기 전에 그가 내용물을 꺼내고 상자를 바닥에 던졌다.

“오…….”

약지를 깨물렸을 때부터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물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에리히가 잇자국을 낸 자리에 반지를 끼웠다. 클레어는 손가락을 쭉 펴 보았다.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햇빛을 받아 오색의 빛을 테라스 전체에 흩뿌렸다.

“마음에 드나 보군.”

“그럼요. 제가 원해서 요청한 건데.”

싫을 리가 있겠는가. 전생에는 죽도록 일하면서 돈을 모아도, 죽기 전에 갖기는커녕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걸 갖게 됐는데.

에리히도 그렇고, 루이자도, 심지어 마사마저도 공작 부인의 약혼반지로 너무 소박하다고 했지만, 클레어에게는 전시회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호화로운 보석보다는 이 정도가 꿈꾸기에 딱 좋은 물건이었다.

“다른 예물도 도착해 있어. 열어 보러 갈까?”

“그것도 좋지만, 그 전에.”

클레어가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에리히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몸을 구부렸다. 그녀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농담하듯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키스나 한번?”

“반지가 진짜 마음에 들었군.”

“뭐 꼭 그래서는 맞고요.”

클레어가 키들거리면서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흥얼거렸다.

에리히는 좀 웃긴다고 생각했다. 이것보다 비싼 것도, 가치 있는 것도 벌써 몇 상자나 그녀의 금고에 넣어 놨는데 말이다. 농담인 줄은 알지만.

어쨌거나 사양할 이유가 없어서 그는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의 목구멍에서 비음이 샜다.

충동적으로 허벅지를 움켜쥐자 클레어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이에게, 후, 사이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키스까지죠.”

“음…….”

역시 아픈 척을 포기하는 쪽이 낫겠다. 에리히는 일어서면서 클레어의 손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

힐끗 확인하자 엘리엇은 아직도 해적선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쓰러질 때까지 저러고 놀 것 같았다.

‘보모가 알아서 하겠지.’

클레어가 약간 난처한 듯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 피곤한데. 절대 위에서 1분 이상 못 버텨요.”

에리히는 그 순간 앞으로 보름 정도 후유증을 더 앓는 것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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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보크 씨가 보낸 심부름꾼이라고? 딱히 급한 연락이 올 게 없는데.”

슈나이더 백작 부인 카탸는 의아하게 중얼거리며 별실 문을 열었다가 움찔 굳었다.

그러나 그것을 표정으로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뒤따르던 하녀는 카탸가 곧바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지 않는 것에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굳이 안주인의 표정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굽실거렸다.

“베어보크 씨께서 그레이스 부인의 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봐도 초라한 노동계급 남자였다. 그러나 카탸는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얘, 너 주방에 가서 햄과 계란을 두껍게 끼운 샌드위치를 가져오렴.”

“아, 네!”

베어보크 씨가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 이름이라는 것을 슈나이더 백작가 사람들은 대부분 알았다. 백작의 초대로 간혹 집에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슈나이더 백작 부인은 늘 오페라 극장에서 오는 심부름꾼들에게 후하게 대접하곤 했다. 점심과 저녁 사이라서 주방은 쉬고 있을 테지만, 그리 이상한 심부름은 아니었다.

하녀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자, 카탸는 곧바로 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남자한테 성큼성큼 다가가 작은 소리로 격하게 말했다.

“토마스, 너 미쳤어?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고, 컥!”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토마스가 그녀의 목을 턱 쥐었다.

굽은 허리와 어깨가 펴지자 덩치가 산만 해졌다. 얼굴에 사나운 기색이 돌자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토마스 보르얀스는 오페라 극장의 뒷골목 주인이다.

“너야말로. 일 처리나 제대로 해 놓고 그딴 소리를 하지 그래?”

“윽……! 그래서, 날 위협하면, 뭐가, 큭, 해결되긴 해?”

카탸는 숨이 막혀 버둥거렸으나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빈정대자 토마스가 손을 놓았다. 거의 발끝까지 들어 올려졌던 카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헉헉거리고 숨을 골랐다.

토마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부탁을 들어줬다가 귀족의 주시를 받게 됐어.”

“하. 무섭니? 대단하긴 대단하네, 클라우제너가. 경시청도 개똥처럼 아는 네가.”

“카탸, 죽고 싶어?”

“그게 네 탓이지, 내 탓이야? 제대로 흔적 잘 감췄으면 그런 일이 생겼겠어?”

카탸는 주저앉은 채로 흐트러진 머리를 아예 풀어 쓸어넘기며 토마스를 노려보았다. 토마스가 으르렁거렸다.

“내가 실수라도 저질렀다고?”

“아니면 뭔데? 너한테 부탁한 거라곤 노라를 처리해 달라는 것뿐이었어. 네가 잘했으면, 클라우제너가 네 존재를 알아챘겠어?”

카탸가 거칠게 말했다.

“설령 날 의심해도 그게 너한테까지 이어지겠느냔 말야. 네가 노라 주위에 단서를 남겼거나, 이렇게 뜬금없이 날 찾아와서 곤란하게 한 게 아니라면.”

“빌어먹을.”

토마스는 그녀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여기서 카탸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는 것도 문제였지만, 카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에리히가 무슨 증거가 있어서 카탸의 옛 지인을 추적하게 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마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카탸를 완전히 팽할 수는 없었다.

그는 거칠게 소파에 앉아 카탸를 내려다보았다.

“그놈은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이라니?”

“스테판. 발레리노 놈.”

“그것도 내 탓이야?”

“그놈이 연잎 궐련을 공급하고 있어. 그놈도 너랑 같은 곳에서 물건 떼는 거야?”

“…….”

“야, 카탸. 제대로 대답해. 네가 모신다는 그 높은 분이 너 팽하고 그놈으로 갈아탄 거 아니냐고!”

쾅!

토마스가 테이블을 걷어찼다. 그가 협박하기 위해 그러는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탸는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소리가 가라앉은 후에도 문밖에서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그녀는 매달리듯이 토마스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진정 좀 해. 공급 끊긴 거 아니잖아. 높으신 분이 사람 여럿 쓰는 게 뭐가 이상해? 너도 알잖아. 이게 돈 어마어마하게 벌리는 일인데, 우리만 욕심냈겠어?”

“어우, 이게 진짜.”

“나 아니면 어차피 너 공급 못 받아.”

카탸는 거기서 한번 튕겼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연꽃 이궁에서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손을 끊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테판이 보내진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황후는 오페라 극장의 공급망을 둘로 늘린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처지였으니 원망하지는 않았다. 황후가 더러운 일에 쓴 사람을 옆에 두고 책임질 리가 없지 않은가. 쉽게 꼬리를 자르기 위해 자기 같은 자를 불러들인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클라우제너의 일도 곧 끝날 거야. 남편이 이야기하고 왔다더라고.”

카탸는 토마스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의식적으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의 무릎에 앉았다.

“하. 남편?”

“알잖아. 그이가 나한테 푹 빠진 거.”

물론 카탸가 전해 들은 이야기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에리히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백작은 그녀를 믿었지만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괜한 사람 만나지 말고 당분간 조용히 지내자고 말했다.

자꾸 듣다 보면 없던 의혹도 생기는 법이니, 당분간은 몸을 사릴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토마스가 협조해 줘야 했다.

“그리고 스테판이 날고 기어 봐야 오페라 극장 안에서나 잘나가지, 유랑극단들까지 다룰 수 있겠어? 우리가 아렌 전역에서 돈을 긁어 들이는 이상, 공급은 계속될 거야.”

“그걸 알면 쓸데없는 짓 좀 그만해. 물량이나 늘려서 받아 와.”

토마스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카탸는 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끈적끈적하게 말했다.

“너야말로 날 도와줘야지. 우리 딸을 위한 일인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으나 카탸의 입김이 토마스의 입술 위를 스쳤다.

그녀는 이리스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원했지만 갖지 못했던 것을 모두 딸에게 주고 싶었다.

이리스는 그녀가 꿈꾸었던 모든 것이었다. 온갖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귀한 집 아가씨였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숙녀였으며,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명성 높은 가수였다. 이리스는 그녀의 전부였고, 완벽한 분신이었다.

이리스야말로 지배 가문의 공작 부인에 걸맞았다. 충분히 될 수 있었다.

부모도 모르고, 기억을 할 나이부터 이미 길에서 구걸하며 자랐던 자신도 백작 부인이 되었는데, 곱고 귀하게 기른 이리스가 부족할 리 없지 않은가.

‘공작이 어리석어.’

하지만 남자란, 여자의 수중에 굴러떨어져 쉽게 어리석어지는 법이다. 백작이나, 지금 앞에 있는 남자처럼.

“딸은 개뿔.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토마스는 거친 숨과 함께 그렇게 내뱉었지만, 카탸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카탸는 그를 끌어안은 채 생각했다. 이리스에게 장애가 될지 모르니 언젠가는 처리해야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필요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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