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7/263)

58화

16. 오페라 극장

요한 크로지크가 방문했다.

클레어에게는 일정에 없던 일이었다. 루이자가 떠나면서 요한은 사실상 클레어에게는 효용을 다한 셈이었다.

황후 쪽에서 새로운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클레어도 그의 처우를 보류할 셈이었다.

당연히 요한 입장에서도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어. 대부인의 거처에서 나온 아편제제의 원출처가 그 스테판이라고 하는 발레리노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파펜하임 백작가를 통해서 들어갔을 겁니다. 대부인께서 늘 더 효과 좋은 수면제와 진정제를 찾고 계셨으니, 백작 부인이 전해 줬어도 이상할 게 없고요.”

“그래. 알겠어.”

클레어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서류를 훑고 있었다. 핵심적인 정보가 아닌 일에 신경을 쓸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일이잖아? 난 딱히 대부인의 방에 있었던 약의 출처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니야.”

“……스테판에 대해 설명을 드린 겁니다.”

실은 그것도 정보는 정보인 셈이라, 능력을 인정받을 속셈으로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말했던 요한은 머쓱해졌다.

“스테판 말로는, 공작 각하께서 겪은 증상을 동일하게 겪을 수 있는 약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음.”

처음으로 흥미를 느낀 클레어의 눈이 요한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긍정하지는 않았다.

“혼수상태, 서맥, 체온 저하…… 모두 다 아편류의 부작용이라던데. 그 부작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약이 있다는 뜻이야, 아니면, 특별히 부작용을 잘 일으키는 약이 있다는 뜻이야?”

“발포주에 섞어서 무미 무취일 정도라면 아주 소량일 텐데, 그걸로 그 정도의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뭅니다.”

후자라는 뜻이었다.

클레어는 말하는 방식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마약 중독자들이 점점 강한 약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화학이 발전 중이니 그런 약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무미무취에 소량으로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확언하는 건 경우가 달랐다. 일부러 그런 효과를 내도록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한이 스테판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면 말이다.

“알았어. 그래서?”

“유통 경로에 대한 정보를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남작님께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합니다.”

“안 됩니다.”

클레어가 가타부타 말하기도 전에 막시밀리안이 끼어들었다. 클레어는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결정 안 했어요.”

“저택으로 부르거나, 접선 장소를 따로 마련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테판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요한이 난감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클레어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과 같은 입장이겠죠?”

그건 황후의 사람이냐는 뜻이다. 요한은 잠깐 망설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스테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요한은 배신할 각오를 굳히고 위빙 상단으로 왔었지만, 단순히 정보만 제공하겠다는 사람에게 그것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또 한 가지 문제로 망설였다.

[이만 이 일을 덮었으면 좋겠어.]

에리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매사 확실하다 못해 대체로 명령조인 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난처한 표정으로 클레어를 쳐다본 채였다. 이런 수작도 부릴 줄 아느냐고 따지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누군지 아는 거예요?]

[짐작만. 구체적인 이름까지는 열거하지 않을 거야.]

[에리히, 말도 안 돼요! 사람이 죽었어요. 당신도 죽을 뻔했고요!]

[그러니까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거야. 말하면 넌 참지 않을 테니까.]

에리히는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야. 조치도 취했고.]

[좋아요. 조치를 취했다는 말은 믿겠어요. 하지만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면, 당신이 한 일과 별개로 나는 따로 움직일 거예요.]

[보호하기로 아버지에게 약속했었으니까.]

그 시점에서 클레어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추가적인 위협이 없더라도, 죽은 사람이 있어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했지만, 증거를 찾는 것을 거기에서 멈췄다.

에리히가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을 이 이상 어기게 할 수는 없었다. 루이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마음의 어딘가가 따끔따끔했지만, 눈을 감기로 했다.

심증은 심증에 불과하다. 그녀는 결국 이름을 듣지 않았고, 다른 증거도 없다. 살인범을 찾는 것은 경찰의 일이다.

그랬더니 이제 와서 증거를 주겠다는 사람이 나온 것이다.

“남작님.”

요한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시선을 책상 빈자리에 꽂은 채 대답했다.

“오페라 극장에서 만나 보죠. 공연이 있는 날에.”

마음에 망설임이 있었지만, 증거 이야기를 듣고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만 듣는 정도라면 해악은 없을 것이다. 진짜로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그때 다시 한번 에리히와 의논해도 된다.

오페라 극장을 택한 것은 공공장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눈을 피하는 게 의외로 쉬웠다. 너무 많은 사람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한쪽이 공연자라면 더 그랬다. 주역 무용수를 만나 보려고 대기실에 몰려드는 사람도 하나둘이 아니고, 로비나 다른 공간들도 연회가 벌어진 것처럼 환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테판도 기꺼이 응할 겁니다.”

요한이 공손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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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리나! 이것 좀 갖고 가!”

“아, 네!”

대기실에 마네킹 두 개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밖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리나 그레이스는 마네킹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스테판의 대기실은 4층에 있다. 무대 입구가 1층과 2층 사이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스테판의 대기실이 4층에 있는 것은 괴상한 일이었다.

주역 무용수의 개인 대기실이라면, 무대에 오가기 편한 2층에 있는 게 당연하고, 극장에서도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스테판은 코웃음을 치며,

[내가 2층에 있어 봐. 무대 끝나자마자 몰려오는 사람들한테 깔려 죽지.]

같은 말을 했지만, 사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극장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이리스 슈나이더라면 꽃에 깔려 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스테판은 인기 있는 발레리노였고, 짧은 막간에 4층에 있는 대기실까지 기꺼이 왕복하는 열렬한 팬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리나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스테판은 장사를 하기 위해 4층을 요구한 것이었다.

막간에 방문하는 사람 중에는 팬이 아니라 고객도 있었다. 스테판은 4층 창문을 활짝 열고 손님들과 함께 궐련을 피우거나 그 이상의 일을 했다.

때때로 난잡한 파티가 벌어지기도 했다. 수도로 온 뒤로 횟수가 현격하게 늘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리나는 생각한 적이 있지만, 참석자의 대부분이 귀족이었기 때문에 극장 주인은 오히려 기뻐했다.

[이 비밀은 꼭 지켜야 해. 지키지 못하면 네가 죽든 말든 길에 내다 버릴 거야. 네 목숨을 누가 구해 줬는지 잊지 마.]

스테판은 달궈진 인두를 손에 들고 리나를 사납게 위협했었다. 리나는 그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스테판의 어머니가 17년 전에 할머니와 리나의 목숨을 구해 줬다고 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할머니는 지난 17년 동안 스테판 모자의 가장 비밀스러운 일꾼으로 일해 왔고, 이제 리나가 그렇게 될 차례였다.

리나는 스테판을 배신한 자들이 길에서 무슨 참혹한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조직에서 나가면 죽는다. 스테판이 죽이거나, 경쟁 조직이 죽이거나.

리나는 기껏해야 스테판의 옷을 다림질하고 잘 꾸며진 대기실에 이런저런 짐을 가져다 놓을 뿐이지만, 그래도 조직원은 조직원이었다.

“요즘 너 왜 이렇게 굼뜨니? 가서 이 옷이랑 이 슈즈 가져다가 마네킹에 입혀 놓고, 이 상자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네.”

“그리고 이 옷들은 발레단에 갖다 줘.”

“오늘 바뀌었어요?”

“그것도 스테판 님 명령이라더라.”

리나는 억지로 한숨을 숨겼다. 보나 마나 이전 무대 의상의 배색이 자기를 제대로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니 뭐니 하며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구슬이나 레이스를 뗐을지도 모르고.

발레단원들은 대부분 의상을 다 갈아입었을 텐데, 가서 다시 나눠 줄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왔다. 여기는 탈의실이 따로 있어서 이런 일이 한번 생기면 더 난리였다.

“대기실 문 뒤에 있는 빈 옷궤는 창고에 갖다 놓으면 돼. 풍로에 기름은 남아 있어?”

“조금 있어요.”

“잘 챙겨야 해. 스테판 님이 초연 있을 때마다 예민한 거 알잖아.”

“네. 풍로도 확인해 둘게요.”

리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무대의상 한 무더기를 끌어안고 다시 뛰어 올라갔다.

발레단원들에게 옷을 나눠 주고, 스테판의 옷과 슈즈를 제자리에 두고, 풍로를 확인하고, 옷궤를 끌고 지하 창고로 내려왔을 때였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공연의 리허설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아…….”

이 창고는 무대의 지하 장치와 맞닿아 있었다. 무대 쪽은 위아래가 훤히 뚫려 있고, 창고와 무대 사이의 벽은 얇은 데다가 구멍도 많았기 때문에 음악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전부 들렸다.

“아…….”

악단의 반주가 리나의 몸을 꽉 메웠다. 기대감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리고 곧 연습이 시작되었다. 부드럽게 흐르듯 시작되었지만, 소프라노 독창이 이내 물방울을 밟고 튀어 오르는 햇빛처럼 청량하고 날카롭게 무대 전체를 메우고 메아리쳐 리나가 있는 창고까지 스며들었다.

내리꽂히는 환희의 전율에 현기증을 느낀 리나는 웅크려 앉은 채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입술로 더듬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달아나려면 그럴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결국 이곳이 좋아서였다. 무대 뒤에서 일하는 게 좋아서.

하루 종일 계단을 오르내리고 짐을 나르고 시중을 들어도, 이곳에서는 저 가슴 벅찬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노래가 좋다. 노래하고 싶다. 이렇게 도취된 순간에는 배고픈 줄도, 추운 줄도 몰랐고, 자신이 가난한 고아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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