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얼굴에 땀 날 것 같다.
마차에 앉은 채 클레어는 눈을 굴렸다. 다행히도, 얼굴을 절반쯤 가리는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어서 이 당혹스러운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앞에는 두 남자가 앉아서 불편한 얼굴로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과 로저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클레어는 애초에 가볍게 로저와 동반해서 다녀올 작정이었다.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기 미안했으나 역시 이런 일에는 로저가 제일 믿음직했다.
요한 크로지크는 겉으로 드러내 놓고 같이 다닐 만한 처지가 아니고, 케이시 모리스는 은밀한 외출에 동행하기에는 유약했다.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클레어도 혼자서 낯선 사람을 만나러 다닐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게다가 오페라 극장에 혼자 가는 것은 너무 눈에 띈다.
애호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긴 하겠지만, 자기들끼리 친분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혼자 가면 말을 걸 사람이 있을 게 뻔했다.
동행을 부탁하기에 그레이는 여러 가지 입장상 곤란했다. 슐츠&셔우드는 유명한 변호사 사무소고, 오페라 극장에 오가는 계층 중에는 그레이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소문이나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오해받을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로저였다.
클레어는 로저와 함께 시장이나 공장 시찰을 다니는 것에 익숙했고, 만약의 경우에 어느 정도 물리력도 기대할 수 있었다.
‘미안한데’로 시작한 클레어의 부탁에 로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가는 거 용건만 해결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오죠.]
[오페라 좋아해?]
[남의 돈으로 보는 건데 뽕을 뽑아야죠.]
맞는 말이었다. 내 돈 주고 보기는 아깝지만, 남이 표를 사 주면 재밌게 볼 수 있었다. 그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 뽕을 뽑아야 했다.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러라고 했다. 밥값쯤이야 누가 내든.
별것 아닌 일이었다. 클레어는 위빙 상단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일할 때처럼 소박한 회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남들이 굳이 관심을 갖지 않을 만한 적당한 중산 계급의 차림새였다.
평소와 다른 것은, 얼굴을 가리는 베일이 달린 모자를 썼다는 것뿐이었다. 요새는 그녀도 얼굴이 유명해져서 누가 알아볼까 봐 염려스러웠다.
포마드를 바르고 나온 로저는 그녀를 보고 시시덕거렸다.
[아니, 남작님이 얼굴을 가리시니까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것 같잖습니까?]
[맞잖아.]
[그게 아니라, 데이트하는데 한쪽이 얼굴을 가렸다는 건 그거 아닙니까?]
[데이트라니? 접선이야.]
[아, 안 넘어가시네.]
그가 어느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고 했는지 자명해서, 클레어는 그냥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농담인 건 알지만, 요즘 선 넘으려고 하네, 자꾸.]
[전 똑같습니다. 정부도 괜찮다는 게 쭉 제 스탠스였는데요. 남작님이 예민해지신 거죠.]
로저가 킬킬대며 말했다. 그것도 아슬아슬한 수위라 왠지 찜찜한 기분인 채 밖으로 나왔는데, 마차 앞에 막시밀리안이 하인 복장을 하고 서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는 몹시 난처해졌다. 막시밀리안을 동행할 예정은 없었다.
에리히가 사건을 덮어 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이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으니, 이 사건의 증거를 찾는 일에 클라우제너를 개입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남작님께서 하시는 일에 간섭하려는 건 아니고, 각하께 내용도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만일의 일을 대비해 경호하려는 겁니다.]
[막시밀리안 경이 직접요?]
[사람을 하나만 써야 한다면, 제가 제일 낫습니다.]
그건 그럴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지금은 보안부장이지만, 전임이 그만두기 전에는 에리히의 근접 경호를 했으니까.
그냥 오페라 극장에서 사람을 하나 만나는 일일 뿐이다. 경호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얼마 전이라 클레어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로저가 입을 다문 것이다.
막시밀리안은 원래 과묵한 성품이라 치고, 사람 좋아하는 로저까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막시밀리안이 명성 없는 사람도 아니고, 작위도 상당한 데다가 이름도 있으니 로저가 분명히 손을 비빌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차라리 둘이 싸움이라도 하면 중재할 텐데, 그것도 아니라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내비치면서 침묵하고 있으니 클레어의 입장이 퍽 난처했다.
결국 그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은 채 마차는 오페라 극장에 도착해 버렸다.
“하아.”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밀리안이 먼저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내리자마자 로저가 따라 내리더니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시비 걸듯 막시밀리안에게 말했다.
“근데 하인 옷만 입는다고 다가 아닐 텐데요.”
“로저, 괜히 신경질 부리지 마.”
하지만 클레어도 공감했다. 막시밀리안은 키가 크고 지나치게 반듯했다.
로저도 키가 커서 눈에 띄는 편이지만, 몸가짐 때문인지 막시밀리안에게는 고전적인 기사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하인 옷도, 클라우제너의 풋맨 복장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인 옷인 거지, 언뜻 보기에는 깔끔한 새 정장이라 좋은 옷을 입고 온 사람처럼도 보였다.
“막시밀리안 경, 로저 말이 옳아요. 단순히 차림새만 문제가 아니라, 분명히 경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건 카슨 씨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클레어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카슨 씨가 사교계의 유명 인사는 아니지만, 오페라 극장의 고객층 중에는 부유한 중산 계급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제 얼굴보다는 카슨 씨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업상 관계자가 많긴 하겠지만요.”
“그는 결혼 적령기의 남성입니다, 남작님.”
클레어는 새삼스럽게 로저를 쳐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젊어서 대성공을 거둔 상인에 훤칠하기까지 하니, 훌륭한 신랑감이다.
그렇다는 건 상계의 모든 사람이 그를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결혼은 언제나 어디서나 가장 많은 사람이 입방아를 찧어 대는 일이었으니까.
이제 좀 알아챘느냐는 듯이 로저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둘 다 놓고 들어갈까.’
클레어는 흘깃 마부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하인 하나 데리고 혼자 온 사람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로저가 그녀의 한쪽 손을 건져 올려 제 손에 얹었다.
“이왕 약속한 거, 가시죠.”
“…….”
막시밀리안이 침묵한 채로 반대쪽에 붙어 팔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떨떠름하게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생각해 보았다. 아니, 생각할 것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이 모든 것을 웅변했다.
‘막장 드라마 신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설령 진짜로 치정 싸움을 하더라도 이 둘 상대로는 아닌데 말이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띄기 싫어서 로저에게 동행을 부탁했던 건데.
마음속에서 무슨 메아리가 쳐도 상황은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저 3인 일행으로 보이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이 극장에 들어선 것은 1막이 끝날 즈음이었다.
막간에 잠시 볼일을 보러 나온 사람, 늦게 도착하는 사람과 지루해서 일찍 가 버리는 사람들로 로비는 어지러웠다.
귀족들은 아예 별도의 출입구로 들어갈 테지만, 세 사람이 들어간 곳은 평민들이 이용하는 1층 입구라 더욱 사람이 많았다.
2막 첫 시작에 나오는 발레 파트를 보기 위해 아예 이 시간에 도착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서도 쳐다보지 않았다. 노리던 대로다.
아니, 쳐다보긴 했다. 막시밀리안도, 로저도 눈에 띄는 남자들이었으니까.
클레어는 그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걸음을 빨리 옮겼다.
“어디로 갑니까?”
“1층 휴게실에서 잠시 기다리면 안내할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했어. 대기실에서 만날 거야.”
공연이 있는 날 주역 무용수의 대기실이다.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2막 공연이 시작될 때가 되자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 클레어도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아.”
그때 초라한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그녀에게 살짝 눈짓했다. 클레어는 모르는 얼굴이었으나 저쪽에서는 그녀를 알아본 것 같았다.
스테판이 보낸다던 안내인인가. 클레어는 별 의심 없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로저와 막시밀리안이 너무 티 나지 않도록 각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뒤따랐다.
“제리 부인이시죠?”
사람이 많은 휴게실에서 벗어나 계단실 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여자가 그렇게 물었다.
클레어는 약간 당황했다. 딱히 암호명 같은 걸 정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네요.”
하지만 클레어가 대답하기 무섭게 여자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끼이익!
“남작님!”
막시밀리안이 단숨에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전에 바닥이 통째로 회전하며 벽이 세 사람을 먹어치웠다.
한발 늦게 달려간 로저의 눈앞에서 벽이 닫혔다. 그는 벽을 쿵 후려쳤으나 거기에는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양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