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일어나세요.”
절박하게 부르는 소리에 클레어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 의식은 흐리고, 비몽사몽간이었다.
“어서 일어나셔야 해요. 사람이 오기 전에 피해야 해요.”
이번에는 뺨을 잡고 얼굴을 흔들어 댄 덕분으로 클레어는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그녀는 잠깐 멍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해 냈다.
바닥이 움직이면서 벽이 열렸다. 그 뒤는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공동처럼 소리가 울렸던 게 얼핏 기억났다.
막시밀리안이 조심하라고 경고성을 발하며 자신을 감쌌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벽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불의의 습격 같은 게 아니라 분진 가루였으니까.
들이마시면 위험할 것 같다고 본능적으로 생각했으나, 때맞춰 호흡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나 보다. 그리고 깨어나니 지금 이곳이다.
클레어는 몇 번 심호흡하고, 정신을 차렸다. 깨우던 사람이 안심한 듯이 말했다.
“아, 정신이 드셨군요. 다행이다. 이걸로 얼굴을 좀 닦으세요.”
상대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물이 좀 있으면 좋을 텐데, 이 방에는 없더라고요. 숨은 잘 쉬어지시죠?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시고요?”
“누구……시죠?”
클레어는 머뭇머뭇 물었다.
상대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여자였다.
꿀빛 금발에 새하얗고 조그만 얼굴, 물빛 눈동자를 가진 가냘프고 날아갈 듯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야말로 제국의 이상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용모다.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클레어는 자신이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건가 착각을 느꼈다.
여자가 클레어의 시선을 받고 부끄러워진 듯 발간 얼굴로 머뭇머뭇 대답했다.
“전 리나라고 해요. 스테판 하인즈 씨의 하녀예요.”
“아.”
스테판. 그자에게 정보를 듣기 위해 오페라 극장에 왔었다.
나머지 기억이 돌아옴과 함께 급작스럽게 현실감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아직 조금 멍한 상태였던 것 같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스테판이 절 이런 식으로 불러들인 건가요? 저랑 같이 있었던 남자가 있을 텐데요.”
이 여자가 안내인인가? 이런 식으로 자신만 끌어들이려 했던 거라면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하 창고에 있었는데, 기절한 부인을 누가 뒤 통로로 끌고 들어오는 걸 봤어요.”
“뒤 통로요?”
“극장의 일꾼이나 공연자들이 몰래 이동하는 통로인데, 무대 장치 같은 것 때문에 창고로 이어지거든요.”
리나는 해야 할 일을 팽개쳐 놓고 지하 창고에 숨어 공연을 듣고 있다가, 남자 둘이 클레어를 들쳐 메고 들어와 옷궤에 넣는 것을 목격했다.
사실 오페라 극장에서 그런 일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 남자들은 토마스 보르얀스의 부하들이었으니, 자신은 알아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옷궤가 자신이 낮에 가져다 놓은 것인 게 너무 신경 쓰였다. 저 여자는 스테판이 토마스에게 넘긴 걸까?
스테판은 악인이었지만, 그래도 사람 장사는 하지 않았다. 리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 옷궤가 옮겨지는 길로 따라왔던 것이다. 자신이 납치를 도운 꼴이 되고 싶진 않았다.
“남자분이라면 아마 징벌실로 끌려갔을 거예요. 일어나실 수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오페라 극장 쪽으로 돌아가야 해요. 귀족들이 오가는 곳에서는 보르얀스 씨도 함부로 못 움직이거든요.”
리나는 품에서 작은 꼬챙이 같은 것을 꺼내 문고리와 씨름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클레어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예쁜 여자애는 진짜로 자신을 구해 주러 따라온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리나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아, 제가 문을 딸 줄 안다고 해서 흉악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전에 일하던 극장 건물이 낡아서 툭하면 문고리가 잠겼거든요. 그렇다고 하녀에게 마스터키를 주지는 않으니까요.”
클레어는 미묘한 시선으로 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재잘대듯 말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는 게 느껴졌다.
“리나 양은 극장에서 오래 일했나 봐요.”
“네. 여섯 살 때부터였어요. 전임 발레단장님이 할머니를 위험한 처지에서 구해 줬다고 들었거든요. 그때부터 할머니가 계속 극장에서 일하셨고, 저도 어릴 때부터 스테판의 심부름을 했어요.”
“거의 평생을 극단 관계로 일한 거군요.”
“그냥 잔심부름하는 하인이지만요. 어떤 점에서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전 노래 듣는 걸 좋아하거든요. 다른 곳의 하녀였다면, 지금처럼 공연을 많이 훔쳐 듣진 못했을 거예요.”
딸각.
그때 문이 열렸다. 리나가 발딱 일어섰다.
“자, 이제.”
그때였다.
천장에서 쿵쿵 발소리가 났다. 천고가 낮은 창고라, 천장에서 발소리가 날 때마다 떨어지는 먼지가 클레어의 머리에까지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행여 소리라도 날까 봐 두 사람은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그냥 모르는 척하면 안 되셨던 겁니까?”
바로 머리 위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보르얀스예요.』
리나가 바닥에 글자를 썼다. 서툰 글씨였다.
클레어는 그게 누군지 정확히 몰랐지만, 아까부터 리나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저자가 보스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클레어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풀려 있는 밧줄을 들고 리나에게 눈짓했다. 리나가 헐렁하게 그녀의 팔과 다리에 다시 밧줄을 둘렀다.
그녀는 옷궤 안에 다시 웅크렸다. 지금 풀려나 있는 게 들키는 게 더 위험하다. 저쪽을 안심시킨다면, 시간을 좀 더 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나가 옷궤 뚜껑을 덮고, 기어서 창고의 상자들 틈에 숨었다.
천장 문이 쾅 열렸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었어! 클라우제너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스테판 그놈이 그 여자에게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잘못하면 이리스한테까지 불똥이 튀어!”
“그냥 눈 감고 오리발 내밀면 될 일 아닙니까? 아니, 오리발도 아니지. 우리 쪽에서 뭘 대단히 한 것도 아닌데.”
“솔직히 보스가 슈나이더 백작가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겁니다. 아무리 옛날 여자가 거기 있다고 해도, 좀 그렇잖아요.”
“닥쳐, 좀!”
토마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긴박한 심정을 이 멍청한 것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안 그래도 카탸가 의심받고 있다. 스테판 놈이 그걸 기회라고 생각한 듯, 금발머리 하녀 계집애를 데려다가 앞에서 알짱거리게 했다.
스테판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놈이 무슨 증거 같은 걸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약혼 파티 때의 일은 그놈과는 정말로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그놈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 ‘진정제’가 이 오페라 극장의 뒷골목에서 쓰인 적이 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그 금발머리 하녀라면 문제가 달랐다. 자신이 클라우제너의 여자라면, 카탸에게 보복하기 위해서라도 그 계집을 이용할 것이다.
속도 모르고 아랫것들이 낄낄거렸다.
“간혹 보면 보스는 이리스 양이 자기 딸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애인 딸이면 내 딸이지. 당연한 소리 마라.”
“개소리 좀 닥치라고! 멍청한 잡것들!”
토마스가 다시 욕을 퍼부었다.
“젠장, 하녀 계집 하나만 치워 주면 되는 일이라고 해서 도와준 건데, 이게 무슨 꼴이야!”
“그냥 평소처럼 처리하시죠. 숨기면 그만입니다.”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서 클레어는 숨을 죽이고 눈을 감았다.
들키면 안 된다. 진짜 기절해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데, 심장이 이렇게 쿵쿵 뛰어서 그게 될지 모르겠다.
끽!
옷궤가 열렸다.
“하, 이런, 씨발!”
토마스가 소리쳤다. 다음 순간 다시 쿵, 궤가 닫혔다.
‘헉.’
클레어는 멈췄던 숨을 토했다. 폐부가 터질 것 같았다.
“이거, 시녀도 아니고 공작의 여자잖아!”
“당장 팔아 버리죠.”
“뭐? 미친놈아!”
“위빙 상단 주인에 공작의 자식까지 낳은 여자 아닙니까? 분명히 엄청나게 프리미엄이 붙을 겁니다.”
클레어를 끌고 온 남자에 이어 다른 남자가 말했다.
“다른 귀족한테 넘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넘겨받은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그쪽에서 처리할 겁니다.”
“스테판에 대한 정보랑 같이 넘기죠. 생각해 보십쇼. 우리는 웬만하면 귀족이랑 직거래 안 합니다. 귀족이 만나러 온 거면, 스테판이겠죠.”
그러니까 뒤집어씌우기도 쉽다며 조곤조곤 설득하는 말에 토마스가 납득했다.
“카탸한테 오페라 극장 쪽으로 마차를 보내 달라고 해. 그쪽에 숨겨 놓으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백작 부인이 의심받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부 묻으려면 어쩔 수 없어. 같이 왔다는 남자 놈은 죽여서 강물에 던져 버리고, 우리는 사업 싹 다 정리해서 잠적한다.”
토마스가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위태위태했어. 카탸 그년이 귀족 남자 꼬시는 데 집착하다가 이 꼴 날 줄 알았지.”
그때 또다시 소란이 들렸다.
“야, 뭔 일인지 알아봐. 그리고 이 궤짝은 밖에서 한 번 묶어. 이게 뭐야, 잠가 놓지도 않고.”
“급한 김에 지하 창고에서 아무거나 적당히 써서…….”
“큰일 났습니다!”
올라갔던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도로 내려왔다.
“불이 났습니다!”
“뭐?”
“동쪽 창고입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거기에 든 게 다 얼마어치인데!”
토마스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뒤이어 쿠당탕탕,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밖이 조용해졌다. 클레어는 그러고서도 숨을 죽인 채 한참 가만히 있었다. 이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옷궤 뚜껑이 다시 열렸다. 식은땀으로 범벅된 리나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괜, 괜찮으세요, 부인?”
“후, 아아…….”
새파랗게 질린 클레어가 긴 신음을 토했다. 리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천운이 있나 봐요. 어서 일어나세요. 지금 당장 달아나야 해요.”
그때 또다시 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클레어는 이를 악물고 궤짝에서 일어났다. 저게 토마스가 뒤처리를 하라고 보낸 자라면, 다시 숨어 봐야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것이다.
죽으나 사나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위에서 들린 목소리는 아는 이의 것이었다.
“거기 계시면, 피하십시오.”
“막시밀리안 경!”
클레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천장 문이 박살 나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