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막시밀리안 경!”
세상에! 눈물 나게 반가웠다.
그가 따라와 주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막시밀리안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무사하십니까? 몸에는 별일 없으시고요?”
“네. 다행히, 별일 없어요.”
눈물 나게 무서웠고 다리가 풀릴 뻔했지만, 일단은 괜찮았다.
“이리로 올라오십시오.”
막시밀리안이 클레어가 올라갈 수 있도록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리나를 불러 그녀를 먼저 올려 보낸 뒤에야 계단을 올라갔다.
책상 위에 서류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은 보르얀스의 사무실인 듯했다.
클레어가 막시밀리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복도에 마취 효과가 있는 가루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잠깐 기절했다가 눈을 떠 보니 갇혀 있더군요.”
막시밀리안은 의자에 묶인 채, 오래된 핏자국이 군데군데 말라붙은 방에 묶여 있었다.
관절을 빼어 손발을 풀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밖에서 빗장이 걸린 문짝은 대뜸 부술 수 없었다. 다른 곳보다 문이 두껍고 경첩도 튼튼했기 때문이다.
도움의 손길이 없었다면 탈출에 고심했을 것이다.
“레비 순보의 기자가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레비 순보가요?”
클레어는 깜짝 놀랐다.
‘레비 순보에 탐사보도를 하는 참기자가 있어?’
귀족의 스캔들을 파헤치며 황색 언론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곳이 아니었단 말인가.
사실 그 기자는 마약상을 추적하던 게 아니라 리나를 쫓던 것뿐이지만, 내막을 모르는 클레어는 진심으로 반성했다.
“남작님이 이쪽에 갇혀 계신다는 것을 알려 준 것도 그 기자입니다.”
막시밀리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자, 생각은 일단 나가서 하시죠. 지금은 탈출이 급합니다.”
“불이 났다면, 이쪽으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리겠죠? 어떻게 생각해요?”
“무얼, 말씀입니까?”
“불이 이쪽까지 번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막시밀리안은 잠깐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고 있으니 화재는 괜찮습니다. 사람과 마주치는 게 문제입니다.”
“아래쪽에 비밀통로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면 괜찮을 거예요.”
리나가 주춤주춤 말했다.
“오페라 극장이랑 연결되는 비밀통로를 여러 명이 쓸 리가 없거든요. 중요한 물건을 몰래 나를 때만 쓰는 길이니까…….”
“바람 방향을 생각해도 오페라 극장 쪽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클레어는 막시밀리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책상을 뒤집어엎고 있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 개자식들은 분명히 증거 인멸부터 할 거예요. 그렇게 놔둘 순 없어요.”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납치를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마약에 납치라니, 클레어는 이자들이 본격적인 인신매매 조직이라는 것에 두 손 두 발을 다 걸 수 있었다.
이 정도 조직이 번듯하게 수도 한복판에서 운영되고 있다면 경시청이든 소방서든, 다른 무슨 기관이든 돈을 먹여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장부를 확보할 기회가 사라진다.
이건 이제 약혼 파티의 일에 관한 보복이나, 자신이 끌려와 감금당한 것에 대한 복수로 끝나서는 안 된다.
클레어는 굳이 정의구현을 위해 이 한 몸을 던져 범죄조직을 일망타진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처럼 도박과 마약을 하는 사람도 손가락질했다. 자업자득이다, 왜 그런 짓에 손을 댔느냐고.
이 시대 사람들처럼 중독자에게 이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손을 내밀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무엇보다도 자신과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노라 호프만은 단칼에 살해당했다. 이자들은 사람을 강제적으로 중독시키려 했다.
피해자 중에 그런 사람이 또 있지 않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납치하여 팔아 치우는 일을 ‘평소처럼 처리한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에리히와 상관없는 보통 남작 영애였다면, 막시밀리안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상상이 갔다.
귀족을 상대로도 그러는데, 평민을 상대로는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클레어에게 저지른 짓만 가지고도 족칠 수 있다. 그러나 공범이나 거래처까지 모조리 잡으려면 장부가 필요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언제나 돈의 움직임이다.
‘슈나이더 백작가를 덮어 준다는 말에 그냥 눈감았던 건, 백작 부인이 어디선가 약을 구해다가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에리히도 설마 백작 부인이 범죄조직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막시밀리안 경, 아래 창고에서 상자를 열어 증거품이 될 만한 게 있으면 확보하세요.”
책상 서랍을 열어 종이를 있는 대로 다 꺼내어 한 번에 쭉 훑어 읽으며 클레어는 말했다.
그녀의 손아래에서 이미 읽은 서류들이 순식간에 분류되어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클레어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장부에 적힌 이름 대부분이 아렌식이었다. 아렌에 세운 공단의 직원 명단만 훑어도 이것보다는 로멜인의 이름이 많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 의미를 다 알아채기 전에 소란이 가까워졌다. 소방서의 도움 없이 불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조직원들이 증거 인멸을 하러 오는 것이다.
클레어는 제일 중요한 장부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이제 나가죠!”
클레어의 외침에 후다닥 리나가 사다리로 내려갔다. 그다음 클레어가 내려가고, 막시밀리안이 마지막으로 모든 가구를 뒤엎은 다음 뛰어내렸다.
리나가 비밀 통로의 문을 열었다. 막시밀리안이 뚫린 천장문 주위로 상자를 밀어 쌓으며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제가 뒤를 막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클레어는 고개를 숙였다. 막시밀리안이 경호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사과였다.
막시밀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빨리 가십시오. 카슨 씨가 지원을 불러왔을 겁니다.”
사무실이 어지럽혀진 것을 안 자들이 지르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를 잡아라!”
“살려 두면 안 돼!”
클레어는 리나의 손을 잡고 비밀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탕!
뒤에서 모골이 송연한 총성이 들려왔다. 막시밀리안이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정신없이 달렸다.
그 저녁에, 에리히는 엘리엇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개와 두루미는 함께 맛있는 저녁 식사를 먹었습니다.”
“그거 이상해요.”
엘리엇은 잠들기는커녕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말했다.
“우리 집 보리는 새만 보면 쫓아다니는데. 윌슨 아저씨가 개는 원래 새를 쫓는 거래요.”
“…….”
“안 쫓는 건 놀기 싫어할 정도로 게으르거나 아픈 거니까, 보리가 새를 쫓아가지 않으면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근데 걔는 왜 두루미랑 같이 밥을 먹어요?”
에리히는 엘리엇이 클레어를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다.
얼굴은 확실히 많이 닮지 않았고, 성격도 클레어보다 훨씬 순진하고 직선적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닮았다면 똑똑한 점이려나. 낳는 데 기여한 것도 없고, 아직 정식으로 입적한 것도 아니면서 고슴도치처럼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게 닮았군.’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게.
자라면 대학원에 보내야 할까. 클레어는 의무 지워진 아카데미의 필수 교양이면 충분하다며 학업을 중도에 그만둬 버렸지만, 이런 애는 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것도 콩깍지 낀 관점이었으나 에리히는 아직 그것을 드러내어 주위 사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건 동화니까.”
“동화는 거짓말이라는 뜻이에요?”
역시 닮았다.
아이를 상대로, 우화는 인간사를 비유한 것이라거나 하는 설명을 잘해 낼 자신이 없었던 에리히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델포드 저택에서 키우는 개 이름이 보리니?”
“네!”
엘리엇이 팔짝 뛰어 일어나며 대답했다.
“진짜진짜지이인짜 귀여워요! 저보다 한 살 형아예요!”
“그렇군.”
“근데 하얀 강아지인데, 이모가 이름을 보리라고 지었어요! 저는 밀가루라고 짓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에리히도 그런 이야기는 싫어하지 않았다. 클레어가 좀처럼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시시콜콜한 과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파벨 아저씨?”
엘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리히는 파벨을 꾸짖지 않았다. 파벨의 얼굴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다.
“각하, 카슨 씨가 긴급한 일로 뵙고자 합니다.”
에리히는 벌떡 일어섰다.
클레어가 오늘 저녁에 로저와 함께 외출한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내심 유쾌하지 않았으나 옹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참았다.
그는 엘리엇에게 “별일 아닐 거다.”라고 말하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로저는 내실의 복도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는 판단이 느린 사람이 아니었다. 벽이 회전하여 두 사람이 사라진 순간 그는 자기가 이 일에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오페라 극장을 뛰쳐나와 곧바로 이리 달려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델포드 남작님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경이 뒤따라갔지만, 상황이 다급합니다. 계획적인 납치 같습니다.”
에리히가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