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에리히는 곧바로 저택을 나섰다. 집사들이 황급히 코트와 구두를 가져왔다. 서둘렀지만, 저택 현관을 나설 때에는 이미 말과 경호팀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보안부와 경호팀 전원을 불러. 경시청장도 오라고 해.”
그는 클라우제너 영지 밖에서는 관리를 불러 명령하거나 행정부에 직접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힘이 없어서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명령은 빠르게 전달되었다. 에리히가 오페라 극장 앞에서 말에서 내렸을 때에는, 비교적 가까이 있는 건물에 상주 중이던 경비대는 모두 모여 있었고, 비번이었던 경호원과 보안요원들도 모여 있었다.
공작저 본관에서부터 에리히를 따라온 호위들이 대열을 갖추었다.
공식적으로 귀족의 사병은 철폐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클라우제너 공작가쯤 되면 경호팀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른다.
건물과 주요 시설을 지키는 경비대와 보안요원까지 합친다면 아마 그 무력이 작은 도시의 수비대 정도는 가볍게 능가할 것이다.
오페라 극장의 관계자들은 기겁했다. 지배인이 허둥지둥 달려 나와 에리히를 영접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클라우제너 공작님?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급히 방문하셨습니까? 공연을 보러 온 건 아니실 테고…….”
“약혼녀를 찾으러 왔네.”
“아, 그러시군요! 지금 바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배인은 애써 평범한 일처럼 응대했다. 그러면서 오늘 공연의 관객 명단을 가져오라고 직원에게 눈치를 주었다.
치정 문제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예약했을지도 모르지만 무조건 찾아야 했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가 관객 명단을 내밀든 말든 관심 없는 태도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시는 동안 지루하시지 않도록 최상급의 샴페인과 위스키를 준비하겠습니다. 마침 오늘 쉬고 있는 악단도 있습니다.”
지배인은 그를 뒤따르며 나불거렸다. 에리히는 대꾸가 없었다.
평소에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니라 뭘 좋아하는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이 흉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누그러뜨리고 싶었지만, 약혼녀를 찾으러 왔다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무희를 붙여서 마음을 풀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마침내 좋은 생각을 해 냈다.
“아 참, 슈나이더 백작 영애가 계십니다.”
그는 말하면서 직원에게 빨리 가서 이리스를 불러오라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오늘 이리스는 공연자로 온 게 아니었다. 객석에 있겠지만, 어디 있는지 아니까 바로 연락이 가능했다.
지배인은 이리스와 에리히 사이의 염문을 믿었던 사람 중 하나다. 최근에 의심하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이리스가 에리히와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뭐라도 좋으니 에리히를 뒤따르는 저 호위들의 분위기를 유화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그 말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층으로 가시지요. 이쪽은 평민들이 이용하는 입구라…….”
“이쪽입니다, 공작님.”
로저가 말했다. 에리히는 그를 따라 휴게실로 들어섰다.
“이 벽이 회전하면서 막시밀리안 경과 남작님이 함께 뒤로 사라졌습니다.”
“아!”
지배인이 몸 둘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막시밀리안의 이름까지 나오다니 진짜로 큰일이었다. 그냥 치정 문제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사고일 겁니다. 이 건물이 워낙 오래되다 보니 개축도 많이 하고, 여기는 특히 원래 소극장 무대였던 곳이라 무대 장치가…….”
“열게.”
에리히가 명령했다. 지배인은 그래도 우물쭈물했다.
“이쪽에서는 열 수 없습니다. 아마 장치는 남아 있겠지만, 이쪽에서는 작동 장치를 없애고 벽을 씌운 거라.”
“벽을 뜯어내.”
에리히는 그의 변명이 끝나기도 전에 뒤따르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이 사태를 예상한 로저가 이미 작은 도끼와 쇠지렛대를 준비시켰기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경호원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벽을 도끼로 찍었다.
“공작님!!”
지배인이 경악해서 소리를 질렀다.
에리히는 차분하다 못해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스테판 하인즈라는 놈을 잡아들이고, 그놈과 관련 있는 사람도 전부 구속해.”
“아니, 공작님!”
지배인이 우는 소리를 냈다.
오페라는 중단되었다. 복도를 부수는 소리가 나는데 정상적으로 공연이 이루어질 리가 없다.
겁에 질린 관객들이 웅성거리며 기웃거렸다. 극단 관계자들도 나와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성거렸다.
이리스가 나온 것도 이때였다. 지배인의 연락을 받은 것은 벽을 부수기 전이었으나, 화장을 고치느라 조금 늦은 것이다.
그녀는 휴게실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망설이지 않고 에리히 쪽으로 다가갔다.
“에리히 님, 무슨 일 있어요?”
에리히가 흘긋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서가 말리려는 듯이 그녀를 잡았지만, 이리스는 개의치 않고 에리히에게 다가서서 다정하게 팔에 손을 얹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인데요?”
“…….”
에리히는 불쾌감을 느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백작이 네게 근신하라고 하지 않았나?”
“네? 아, 네.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리스는 말하면서 움츠러들었다. 그러니까 사교 모임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나름대로 근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서 중 하나가 얼른 이리스를 감싸듯이 하여 물러서게 했다. 이리스가 이 이상 에리히의 불쾌감을 사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쿵!
두어 번의 도끼질로 벽에 구멍이 나자 경호원들이 지렛대로 남은 벽을 마저 뜯어냈다. 구멍이 뻥 뚫렸다. 안에 제법 큰 공간이 있었다.
“예, 옛날 무대입니다.”
지배인이 더듬거렸다. 확실히 장치는 오래되어 보였지만, 기름을 발라 지속적으로 관리한 게 확실했다.
뒤늦게 경시청장이 달려왔다.
“아니,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 아무리 클라우제너라도 이런 식으로 건물을 파괴하시면……!”
그는 항의할 생각이었다. 오면서 해야 할 말도 준비했고, 공정한 클라우제너 공작이라면 분명히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에리히가 그를 얼려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내 약혼녀가 이 자리에서 행방불명되었어. 나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네.”
“각하.”
“오페라 극장을 포위하고 모든 마차를 검문해. 끝끝내 발견하지 못하면, 경에게도 책임을 묻겠네.”
누가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경시청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웅성거리던 관객과 공연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덩어리진 군중이 되어 공작가의 보안요원들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에리히는 뻥 뚫린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뒤 통로는 생각보다 길고 깊었다.
안쪽 바닥과 벽에 분진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거 확보해서 조사해.”
에리히는 명령하고, 직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클레어와 리나가 지하 창고에 당도한 것은 이 순간의 일이다.
둘은 위화감 때문에 한순간 발을 멈췄다. 너무 조용했다.
리나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원래 여기까지 공연 소리가 들려야 되는데…….”
지금쯤이면 한참 3막 중이어야 한다. 무대 위에 선 것처럼 소리가 가까이에서 쏟아져 내려야 하는데, 지금은 조용했다.
대신 뭔가를 부수는 소리, 다급한 발소리가 멀리에서 소란스럽게 오갔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숨어요!”
클레어가 다급하게 그녀를 잡고 잡동사니 그늘에 몸을 감췄다.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남자들이 있었다.
“빨리 와, 빨리!”
“지금 나가려면 이 길밖에 없어!”
“빌어먹을, 전부 다 이리 나가면 오히려 들켜, 이 멍청한 자식들아!”
토마스 밑에서 일하던 극단원과 극장 일꾼 중에서 비밀통로를 아는 자는 모두 이쪽으로 몰려온 것이다.
전부는 아니었으나, 아주 소수도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오페라 극장 전체가 클라우제너의 경호원과 경관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비밀통로로 도망친다고 해서 뒷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결국 단원 명단을 확인하여 사람을 찾을 텐데, 지금 당장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부터 무엇 때문에 공작이 벽을 부쉈는지 대부분 몰랐다. 아무튼 일단 달아나, 자기는 관련 없다고 주장할 작정이었다.
클레어는 클레어대로 그런 사정을 몰랐다. 들키면 안 되는 상태에서 조직원으로 예상되는 자들과 마주친 것이다.
장부를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대로 숨어 있어야 하나? 움직여야 하나?
저들 중 몇 명이 자신을 알고 있을까? 죽여서 상황을 은닉하겠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뒤 통로.”
클레어는 숨을 몰아쉬며 리나에게 속삭였다.
“열어 줘요.”
“여기서 1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부인께서 끌려온 것과 같은 길뿐이에요.”
“그 길이 필요해요.”
클레어는 로저의 판단력을 믿었다. 그리고 에리히가 구하러 올 것도.
만일에 이 소란이 그것 때문에 벌어진 거라면, 제일 안전한 통로는 그곳이다. 제일 먼저 수색되고 있을 테니까.
짤막하게 설명하자 리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을 기어 움직였다. 클레어도 기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끼익.
낡은 경첩이 불안한 소리를 냈다.
클레어가 먼저 문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리나를 발견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아, 무슨 일 있어요?”
리나가 문을 황급히 자기 등으로 밀어 닫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냐니? 너 여기서 뭘 했길래 그런 것도 모르고 있어? 이거, 스테판 놈이 한 짓이냐?”
“아, 아뇨……. 제가 잠깐 창고에서 잠이 들었었는데.”
리나가 말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클레어는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발끝으로 뛰었다.
숨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둠 끝에서 램프의 희미한 불빛을 반사하는 낯익은 금빛을 발견했다.
“에리히!”
“클레어!”
그녀는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
힘이 빠져 주저앉으려는 몸을 강한 팔이 세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