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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2/263)

63화

이 사태에 가장 경악한 것은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이었다.

극단과 극장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권 다툼도, 빛이 닿는 곳이 화려한 만큼 그늘진 뒷일도 잘 알았다.

개축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된 공간이 불법적으로 쓰인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남몰래 벌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기껏 해 봐야 광대였다. 광대는 분수를 알아야 한다.

미모로 권력자를 홀리고,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때로는 재치로 귀족을 조롱할 수도 있다. 애호가들 중에는 진심으로 예인을 경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근본은 고귀한 악기를 애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지배인 같은 관리인은 늘 그것을 신경 써서 극장 내의 그 누구도 선을 넘지 않도록 주의시켜야 했다.

예인들의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랬다. 귀족이 분노로 뒤엎으면, 모든 것이 불타올라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극장 안에서 감히 귀부인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지다니.

이것은 클라우제너 공작의 약혼녀가 아니라도 오페라 극장이 사라질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맨발이 된 숙녀가 먼지 슨 뒤 통로를 달려와 공작의 품에 뛰어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탄식했다.

지배인의 곁에 서 있던 경시청장도 오한으로 몸을 벌벌 떨었다. 진심으로 이 모든 게 공작의 착오이길 빌었던 것이다.

에리히는 그들이 어쩌든 관심 두지 않았다.

그는 코트를 벗어 클레어의 몸을 감싸서 안아 들었다. 클레어의 회색 드레스는 굴뚝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시커먼 먼지와 얼룩으로 물들어 있었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애써서 말했다.

“화재가 났어요. 마약상의 아지트예요. 막시밀리안 경이 뒤에 남았어요.”

그녀가 두서없이 말했다. 정리해서 잘 설명하고 싶었지만, 몸만이 아니라 머릿속까지 긴장이 풀린 것처럼 생각들이 제멋대로 돌았다.

“총소리를 들었어요.”

“알았어. 지원이 곧바로 갈 거야.”

“지하 창고에 리나라는 하녀가 있어요. 절 구해 줬어요.”

“알았어. 안전하게 데려오라고 하지.”

“레비 순보의 기자도 한 명 있다고 했어요.”

“클레어.”

정신없이 말하는 클레어의 뺨을 에리히가 감싸고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에리히…….”

“괜찮아. 아무 일 없어.”

에리히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와 두 눈꺼풀 위에 닿았다. 다음에는 입술이 맞닿았다. 클레어는 그제야 자기 입술이 마구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다음에야 그녀는 춥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니, 그 반대라는 것도 이해했다. 몸이 너무 떨리자 뇌가 역으로 그것을 추위라고 인식한 것 같았다.

“공작님, 따뜻한 별실을 마련해서…….”

“위스키를 가져와.”

지배인이 간절하게 말했지만, 에리히는 그 말만 하고 마차로 향했다.

클라우제너의 문장이 박힌 사륜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에리히는 클레어를 거기 앉혔다.

지배인이 위스키를 들고 뛰어나왔다. 에리히는 잔을 클레어의 손에 건네주려고 했지만, 클레어는 그때까지도 장부를 움켜쥐고 있는 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입에 술을 머금고 클레어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음…….”

마치 새끼 새가 어미에게 물을 넘겨받듯 클레어의 입술이 아주 조금 알코올을 빨아들였다.

클레어는 그것을 꼴깍 목으로 넘겼다. 한 모금의 위스키를 전부 넘겨주는 데에는 여섯 번이나 키스해야 했다.

그러고 나자 몸에 열이 훅 올랐다. 손가락에서 비로소 힘이 풀려 장부가 떨어졌다.

“잘했어. 정신 놓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도 잘한 거야.”

에리히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그가 클레어에게 이렇게 상냥하게 말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클레어는 몸을 움츠렸다. 좀처럼 떨림이 가시지 않았다.

“레비 순보의 기자가 제 탈출을 돕기 위해서 값비싼 물건이 들어 있는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했어요. 아마 아편일 거예요.”

“경시청만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도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막시밀리안 경은…….”

“어설픈 폭력배 따위는 백 명이 와도 막시밀리안을 못 막아. 걱정 마.”

에리히가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쓸어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눈을 한번 맞추고, 콧날과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더럽혀진 겉옷을 벗기고 손목과 손가락을 확인한다. 그리고 클레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벗은 발을 손으로 쥐었다.

“피가 나는군.”

눈치 빠른 로저가 언제 준비했는지 젖은 손수건을 건넸다. 에리히는 그 손수건으로 클레어의 발을 꼼꼼히 닦았다. 다행히 유리 파편 같은 게 박힌 건 아니었다.

“고마워.”

클레어가 로저에게 말했다. 로저가 입으로만 “별말씀을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에리히를 내려다보고 팔을 뻗었다. 에리히는 손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바라는 대로 순순히 팔을 벌려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클레어가 숨이 멎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안전에 대해서,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클레어의 목소리는 거의 그만큼 떨렸다.

“당신에게 죽을 뻔했다고 뭐라고 해 놓고, 내가 더 조심성 없이 굴었어요.”

“사람 많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던 거잖아. 막시밀리안을 데려갔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나라도 판단했을 거야.”

에리히는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말했다. 클레어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잘했어. 잘 돌아왔어.”

그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가슴에서 가슴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원래 인생은 혼자 사는 거라 생각했고, 남을 지탱해 주는 것에 더 익숙했다.

전생부터 오랫동안 혼자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았다.

셋집 창문과 현관에 빗장을 달고, 밤길은 친구와 통화하며 걸었다. 부모는 오히려 그녀가 보살펴 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삶을 지키는 가장 높은 성벽은 통장의 숫자였고, 그것을 쌓아 올리기 위해 평생 일했다.

다시 태어나서도 그랬다.

새로운 가족에게 사랑받았고 사랑했다. 부모는 다정하고 자애로웠으니, 그녀도 아이답게 어리광을 부려도 좋았으리라.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고 안심할 수 있는 완전한 보호자였을 진짜 어린 시절은 너무 옛날이라 전부 잊어버린 뒤였다.

엘리사도, 엘리엇도 그녀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지, 기댈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델포드의 가주였다. 친인척도, 가문도, 영지민들도 모두 그녀가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 생에도 오로지 금만을 의지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진짜로 위험하다고 생각한 순간, 떠올린 것은 종이 위에 쓰인 숫자 따위가 아니었다.

“에리히.”

그녀는 힘껏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마음은 머리 따위보다 훨씬 정확한 법이다.

의지해도 되는 사람이 있었다. 걱정하며 이끌지 않아도 되었다. 하다가 안 되는 일은 기대고, 두려울 때 매달려도 괜찮았다.

클레어는 재회하고 오래지 않아 장난감 가게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했던 말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에, 정말로 한 번도 내 생각은 안 한 건가?]

그때 클레어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때도 그가 매력적이라는 걸 부정하지는 못했다. 키스는 황홀했고, 온화한 관계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연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열정에 인생을 묶을 수는 없었다. 결혼에는 동업 같은 신뢰와 협력을 기대했다. 삶 전체가 한 덩어리로 뭉치는 것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궤짝 속에 누워서 간절히 떠올리듯,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듯.

그에게 기대고 있다.

그리고 그도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자신을 생각한 적이 있고, 자신도 그랬기를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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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마차 문이 닫혔다. 에리히는 먼저 로저에게 말했다.

“자네가 따라가게.”

“제가, 말씀입니까?”

“클레어가 많이 불안한 것 같은데, 자네가 가서 확실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게 좋겠어. 몸은 마사가 돌봐 줄 테지.”

“감사합니다.”

로저는 피가 터지도록 짓씹은 입술로 애써 말했다. 에리히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클레어가 약해져 있는 상황에서 그를 곁에 놔둘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로저가 마부석 옆에 올라타자 마차가 출발했다.

에리히는 돌아섰다. 그가 무릎을 꿇고 더러워진 발까지 손수 닦아 주는 것을 본 사람들은 감히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을 좀 씻고 싶군.”

“준비…… 준비하겠습니다.”

지배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경시청장을 내려다보았다.

“화재가 난 곳이 오페라 극장과 연관된 범죄조직의 본거지인 모양이군. 전부 잡아들이게.”

“예.”

“내 약혼녀의 납치에 관여한 조직, 그에 연루된 자, 저 벽 뒤의 길을 사용한 자, 남김없이 샅샅이 조사해 와. 단 하나라도 놓치면, 자네 목이 떨어질 걸세.”

“이를 말씀입니까?”

경시청장이 고개를 숙였다.

에리히는 준비되어 온 세숫대야에 손을 담가 씻었다. 클레어의 옷에서 얼룩이 옮겨붙어 그의 옷도 더러워져 있었으나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이 무사히 빠져나와 클라우제너 경비대에 합류한 것은 그로부터 약 반 시간 후의 일이다.

그때쯤에는 화재도 모두 진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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