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날 밤 하원이 긴급 소집되었다.
화재나 오페라 극장의 일부가 부서진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클라우제너 공작이 무장 인원을 동원하고 경시청에 명령을 내린 것은 심각한 사태였다.
이제까지 클라우제너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하원에도 클라우제너의 후원을 받는 정치가가 여럿 있지만, 그것은 가문이 워낙 크고 부유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클라우제너 영지 출신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재가 정치에 투신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가신 가문에서 독립한 자손이 하원에 입성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음에도 클라우제너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정책에 관여해도, 해당 산업 분야에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와 이해 관계자로서 참여하는 것에 그쳤다.
관리와 직접 대화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지방관과 의논하여 영지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경시청장을 직접 불러 명령하고, 오페라 극장을 포위하여 사람을 잡아들인 것은 정부의 권한을 정면으로 침해한 것이다.
내각은 긴장했다. 클라우제너 공작이 작정하고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3대 전, 프리드리히 대제가 헌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비할 때, 클라우제너와 에른스트는 솔선하여 황제의 뜻에 따라 권력을 내려놓았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권한을 막은 적이 없었다. 고용인을 무장시키는 것도, 경시청장에게 명령한 것도,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모여들기는 했으나 내각 구성원을 비롯하여 하원 의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나서서 공작을 비난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노이만 의장이 한숨을 내쉬고 제일 먼저 발언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여러분의 아내나 딸이 납치되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의원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나부터 확언하겠소. 경호원, 고용인, 비서는 물론이고 사무실 청소원까지, 아는 사람은 모조리 풀어 찾고 인맥이란 인맥은 모두 동원해서 경시청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겁니다. 클라우제너 공작 각하께 가서 읍소도 하고.”
“청탁하는 것과 명령하는 것이 어떻게 같습니까?”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청탁하는 건 되는데,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안 된다는 말씀이오?”
“경시청 업무가 한 가지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고위 귀족이 자기 일을 처리하라고 명령하면 되겠습니까?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지금도 치안에 문제가 생긴 곳이 많을 겁니다.”
강하게 따지고 드는 자가 있긴 했다.
“의장님은 클라우제너와 인연이 깊으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게 바로 공작이 눈치조차 보지 않고 무장 세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잠시 동안 의장에게 예의를 지키라는 고함 소리와 찔리는 게 없으면 왜 화를 내느냐는 대거리가 오갔다.
쾅!
한 명이 격렬하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보다, 오페라 극장 휴게실에서 귀족이 납치됐어요! 백주 대낮에 사람을 끌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경시청은 이 일을 책임져야 합니다!”
“범죄 하나하나를 일일이 책임지라니, 시커먼 속내가 느껴지는군. 이 기회에 귀경의 파벌 사람을 경시청장 자리에 앉히려는 수작이 아닌가!”
거기서부터 클라우제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싸움이 시작되었다.
노이만은 기운 빠진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황제의 결단이 필요하다.
로멜-아렌 제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나 실질에 있어서는 타협적인 제도가 많았다.
하원에서 법안을 입안하고 내각을 구성하여 통치 전반을 맡았으나, 그 모든 것이 황제의 아래에 있었다. 귀족은 자신의 영지에 한해서 지방관의 통치에 비토를 행사할 수 있었다.
사실상 황실보다도 크게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없는 지배 가문을 내각이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내각의 이름으로 공작에게 경고라도 줄 수 있겠는가?
권한은 있지만, 그걸 자기가 나서서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의장인 노이만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는 황제가 직접 나서 줘야 한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나오시지 않겠지.’
5년 전, 황태자가 죽은 이래 황제는 칩거하고 있다. 심병이 심하여 그야말로 살아도 죽은 듯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다.
노이만 의장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싸울 만큼 싸우고 나면 진정될 것이다.
내일이 되면 클라우제너 공작가에서도 입장 정리가 있을 테고 말이다.
그때였다. 회의장 문이 열렸다. 황실의 제복을 입은 시종 넷이 깃발을 들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황후의 시녀 아우구스타였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불철주야 나랏일에 고심이 많으십니다.”
아우구스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회의장 전체를 메웠다.
노이만 의장은 대표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우구스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일이라, 내각에서 쉽게 처리하기 힘들 것을 우려해서 황실에서 어지를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어지라고 했으나, 병석의 황제가 내린 말일 리 만무했다. 황후의 뜻일 것이나, 실질적으로 황실을 이끄는 것이 황후인 이상 이것은 황명과 다를 바가 없다.
“약혼녀가 큰일을 당하여 놀란 클라우제너 공작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귀부인을 납치하는 흉악한 일을 좌시할 수 없는바, 경시청만이 아니라 내각에서 특별 조사단을 편성해서 이 일을 벌인 범죄조직을 조사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원의 분위기가 술렁 움직였다.
얼핏 한 가지 뜻처럼 보이지만, 아우구스타의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오늘 저녁 일을 모두 불문에 부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이상 클라우제너 공작가가 직접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시청장은 공작의 말을 쉽게 거역할 수 없겠지만, 황명으로 내각에서 특별 조사단을 편성하기까지 했는데 거기에 공작가가 간섭할 수는 없게 된다.
클라우제너와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으면서, 권력 남용을 경계시키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삼가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노이만 의장이 공손히 대답했다. 황실의 뜻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황제 폐하의 뜻이라고 말함으로써 황후 역시 권력 남용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 셈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타는 잠시 침묵했을 뿐 다른 말 없이 물러났다.
아우구스타는 황후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중간에 대여 마차처럼 보이는 소박한 검은 마차로 갈아탄 후, 시종과 황실의 마차는 돌려보냈다.
검은 마차는 이궁으로 향했다.
연꽃 이궁이라고 불리는 이 작은 궁은 사실 궁이라기보다는 작은 별장이었다. 정원에 커다란 못이 있어, 여름이 되면 온통 수련이 가득해졌다.
아우구스타는 작은 등불 하나만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기에는 사람이 없는 듯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실제로는 모든 창문에 두꺼운 커튼을 걸었을 뿐이다.
대기실에 카탸가 앉아 있었다.
아우구스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충분히 은혜를 내려 주었건만, 천한 출생을 속일 수 없는지 이 여자는 염치도 없이 이렇게 찾아와 있다.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터인데.”
“사태가 다급하여 그러니 너그럽게 용납해 주십시오.”
카탸는 공손하게 대답했으나 태도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우구스타는 오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깔아 보았다.
“특별 조사단을 편성하여 클라우제너의 개입을 막을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돌아가도록 해.”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약속도 되지 않습니다.”
“네가 정말로 주제넘은 요구를 하는구나. 아랫사람을 잘 단속하지 못해 죽게 생긴 것을, 황후 폐하께서 불쌍히 여겨 살려 주마 하셨으니 감사히 여기고 감읍하지는 못할망정, 약속을 요구해?”
“이게 어째서 제가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까?”
카탸가 사나운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황후 폐하께서 스테판을 이용해 절 위협하지 않으셨으면, 토마스가 델포드 남작을 보고 대뜸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일을 저질렀겠습니까?”
“기가 막히는구나. 황후 폐하께서 너 따위에게 일부러 마음을 써서 함정에 빠뜨리기라도 하셨단 말이냐?”
아우구스타가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어리석은 음모를 꾸몄다가 공작의 주시를 받게 되었으니, 당분간 근신하고 있으라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처럼 큰일을 벌였으니, 살려 주는 것만 해도 은혜인 줄을 모르고.”
카탸는 아랫입술을 물고 아우구스타를 쏘아보았다.
확실히 약혼 파티에서 계략을 꾸민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황후가 델포드 남작을 제거하기를 바란 것도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니면, ‘진정제’가 어째서 갑자기 제 손에 들어왔겠는가?
장사 도구인 연잎 궐련과 달리 ‘진정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증거는 없지만, 카탸는 황후가 그것을 이용해서 정적을 제거하고 있다는 것에 목숨을 걸어도 좋았다.
카탸는 황후가 그 ‘진정제’를 여러 사람에게 풀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제가 천것이라고 해서 쉽게 쓰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아우구스타 님.”
“뭣?”
“들개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법이죠. 전 절대 혼자 죽지 않을 겁니다.”
카탸는 무엄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우구스타는 커튼을 살며시 걷고 카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쪽에 있던 시녀 하나가 조용히 나와서 말했다.
“참으로 건방진 여자로군요.”
“아주 대담하지.”
“그냥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진작 했어야 했어. 클라우제너 공작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손대는 건 아무래도 곤란해.”
그 문제가 아니었다면 약혼 파티 직후에 제거해 버렸을 것이다.
황후가 클라우제너와 위빙 상단의 결합을 막고자 했을 때, 카탸를 택한 것은 아우구스타 자신이었다.
그 일에 실패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황후가 노할 것이다. 책임지게 되기 전에 뒷마무리를 잘해야 했다.
‘은혜도 모르는 것. 감히 날 협박해?’
옛날에 썩 내켜 하지 않는 황후를 설득하여 기회를 주었던 것도 그녀였다. 그래도 제법 오랫동안 조직을 잘 운영해서 만족하고 있었는데.
멋모르는 시녀가 물었다.
“그 보르얀스라는 자의 조직을 클라우제너 공작이 색출하고 있다면, 이러나저러나 들킬 위험이 있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그건 이미 처리해 뒀으니 염려할 것 없어.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결혼을 하고도 옛날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우구스타는 음울하게 말했다.
특별 조사단의 조사 결과는 그녀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면, 카탸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