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4/263)

65화

17. 아렌의 이름이 적힌 장부

클레어는 지독하게 피곤한 꿈을 꾸었다.

밤거리에서 쫓기고 있었는데, 쫓긴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가로등이 깜박거리면서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엇에 쫓겼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마 좀비나……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호러 영화는 오랜만이라 반가웠지만,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스릴러도 마찬가지다.

빠아아앙!

트럭의 경적 소리가 뱃고동처럼 길고 우렁찬 울림을 냈다. 오렌지색 헤드라이트가 몸을 훑는 순간.

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님!”

침실 한쪽의 소파에 앉아 졸고 있던 마사가 허둥지둥 일어나 달려왔다. 클레어는 이불을 쥔 채 멍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아.”

전생의 꿈이다.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솔직히 트럭이 달려든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죽음의 순간 자체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사했겠거니 하고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었다. 딱히 미련 많은 삶도 아니었고, 죽을 때 고통이 없었으면 운이 좋았던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다.

“악몽을 꾸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브란트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 악!”

아무렇지도 않지는 않았다. 클레어는 가슴에서도 쥐가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젯밤 내내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뒤늦게야 내 고통을 너도 겪으라고 항의를 터뜨렸다.

“남작님!”

문이 벌컥 열리고 로저와 브란트가 뛰어들어 왔다. 클레어는 침대를 기며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효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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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에리히가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는데. 침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고 해서.”

따끈따끈한 욕조 물에 입까지 잠긴 상태로 클레어는 뽀그르륵 숨을 내뿜었다.

머리카락이 물 위에 흐트러지자 붉은빛으로 보였다.

“아니, 그냥 쥐 난 건데 안 믿더라고요.”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근육이 긴장한 탓이겠지.”

에리히의 손이 물속으로 들어왔다. 어깨를 꽉 쥐는 악력에 클레어는 고통과 희열이 함께하는 신음을 흘렸다.

“진짜 아프긴 아팠다고요. 잠깐 심장마비인가 했을 정도니까.”

“너무 놀라게 하지 마.”

“음……. 거기 시원해요.”

발에 난 생채기가 따끔따끔 쓰려서, 클레어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용량을 넘은 일이었는지, 지금은 오히려 에리히가 발을 닦았던 일보다 아득히 먼 느낌이었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클레어는 도로 물속에 잠겨 들었지만, 거품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래 봤자였다.

“근데 왜 자연스럽게 남의 목욕 시간에 들어오고 있어요?”

“새삼스럽게.”

“그거랑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죠.”

“그럼 나갈까?”

손이 멀어졌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하얀 셔츠가 물에 젖어 있었다.

“그냥…… 있어요.”

클레어는 귓불까지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러는 게 자기답지 않은 것 같아 부끄럽다기보다 좀 쪽팔렸지만, 그래도 혼자 있기 싫었다.

“음.”

에리히가 미묘한 목소리를 냈다. 클레어는 어깨를 움츠렸다. 놀림이나 빈정거림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그는 그러지 않고 다시 클레어의 어깨로 팔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짓이 어깨와 쇄골을 쓰다듬으며 뒤에서부터 그녀를 끌어안았다.

클레어는 안심한 듯이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피곤하면 잠들어도 돼. 몸이 충분히 녹으면 꺼내 줄 테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좀, 악몽도 꿔서.”

아마 그 꿈의 끝에서 자신을 끌어안았던 팔은 에리히의 것일 터이다. 클레어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음.”

어깨와 목 언저리를 가볍게 지압하여 풀어 준 손이 턱선까지 힘을 주어 가볍게 쥐었다.

“힘 풀어. 어금니 물고 있지 말고.”

“아…….”

클레어는 애써서 턱에서도 힘을 뺐다.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에리히의 입술이 다가들었다.

“하.”

짤막한 신음과 한숨이 뒤섞여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혀에도 힘을 주고 있었던 거라고 클레어는 그제야 생각했다.

에리히가 거기서도 힘을 빼라는 듯이 건드렸다.

“음.”

거기까지 힘이 빠지자 상반신 전체에서 갑자기 긴장이 주르르 빠져나갔다. 에리히가 입술을 떼고 말했다.

“곤란하군.”

“뭐가요?”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 건 맞지만, 내 앞에서 거기까지 풀어지면 안 될 텐데.”

그가 다시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클레어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욕조 물이 뜨겁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몸 안쪽이 간지러울 정도의 열기가 치솟았다.

물에 젖은 에리히의 셔츠가 찰박거렸다. 클레어는 아예 팔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이상하네요.”

“뭐가?”

“지금 급한 일이 많을 거라는 거 알거든요. 근데 보낼 마음이 안 들어요.”

그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가까이 붙이며 클레어는 중얼거렸다.

값비싼 실크 옷이 망가지겠지만, 그것도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클레어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입술이 내려왔다. 그녀의 쇄골을 만지작거리던 에리히의 손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클레어는 문득 물었다.

“그런데 당신, 후유증 있던 거 아니었어요?”

“…….”

“그럴 줄 알았지, 내가. 이렇게 속고 산다니까.”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에리히가 웃음기조차 띠지 않은 채 대꾸했다.

“어차피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잖아?”

“몰랐거든요?”

“몰랐으면서 그렇게 졸랐.”

첨벙!

에리히가 말을 끝내기 전에 클레어가 그를 힘껏 잡아당겼다.

버티려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에리히의 상반신이 그녀의 힘에 끌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풍덩 욕조에 빠졌다.

“클레어.”

“진짜 얄미워.”

클레어가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짧게 입술을 한번 댔다 뗐다.

“내가 아무래도 진심인가 봐요. 욕조에 옷 입고 들어오는 사람을 허용하다니.”

“지금 그게 문젠가?”

“정체성의 문제라고요.”

“하.”

에리히가 어이없어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착실하게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출렁 넘쳤다.

젖은 머리카락이 흰 이마에 달라붙었다. 클레어가 그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웃었다.

“이번엔 내가 환자니까, 당신이 힘내 봐요.”

“황당하군. 지금 환자라서 힘드니까 봐 달라고 애원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아.”

다음 순간 클레어의 뒷덜미가 욕조 등에 부딪히며 꺾였다. 물이 또 한 번 출렁거리고 넘쳤다.

에리히의 손이 물에 빠지거나 부딪쳐 멍들지 않도록 그녀의 목과 머리를 받쳤다.

물보다 뜨거운 열 덩어리가 클레어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발이 물장구를 쳤다. 사고와 언어가 날아가는 데까지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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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집무실에 달콤한 것들의 향기가 났다.

클레어는 지나치게 긴 목욕으로 발갛게 된 뺨을 하고 테이블에 놓인 바닐라 에클레어와 고구마라테를 흡입했다.

막 일어났을 때는 배고픈 줄도 모르겠더니, 진짜로 긴장이 풀리고 체력까지 소모하자 탄수화물과 당이 미친 듯이 당겼다. 고구마와 우유를 같이 갈아 달라는 요청에 저택의 주방장은 이상한 얼굴을 했지만, 클레어는 알못을 무시했다.

“결국 문제가 생기긴 한 거네요. 하긴, 경시청과 소방서를 동원한 셈이니까.”

클레어에게는 경호팀과 경비대를 모아들인 것보다도 그게 더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물론 대귀족이 무장한 인원을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빌헬름이 말했다.

“노이만 의장에게서 어젯밤에 연락이 왔었습니다. 황실의 중재로, 내각에서 특별 조사단을 꾸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증거를 내놓으라는 이야기네요. 아직 조사단이 구성된 건 아니죠?”

“아직은 아니지. 하지만 손대기 애매해졌어.”

“보르얀스라는 놈은 잡았어요?”

에리히가 고개를 저었다.

토마스는 그 화재 와중에 무사히 달아났다. 핵심 인물을 놓친 셈이라 에리히는 크게 화를 냈지만, 황실과 내각의 견제가 들어온 이상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클레어는 퉁퉁 부은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요. 이거, 틀림없이 고위 귀족과 연결된 일이에요.”

“보안부에서 최선을 다할 거야.”

“이번에도 전부 증거 인멸이 된 셈이네요. 불을 지른 사람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하지만 장부가 남아 있지. 네가 그 와중에도 기어이 쥐고 나온.”

“그렇죠.”

클레어는 씩 웃었다.

잔챙이는 얼마든지 넘겨줘도 된다. 경시청도, 특별 조사단도 그런 놈들을 비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잡아야 할 것은 배후에 있는 귀족이다. 어제 잡혀 들어간 조직원들도 하나하나 살펴보면 낱낱이 답 없는 개새끼들이겠지만,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앉아 돈을 쓸어 모았을 두목들에 비하면 죗값도 피라미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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