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클레어가 말했다.
“하지만,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에리히가 희미하게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그럴 리가. 네가 가져온 장부 쪽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일부러 양보할 필요는 없지. 이미 사람을 보내기로 했어.”
“흐음.”
클레어는 약간 이상한 기분으로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까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어색했다.
“왜?”
“내가 타협 안 했으면 좋겠다는 건, 이쪽에 증거가 있다는 걸 들키지 않을 정도였으면 좋겠다…… 뭐 그런 이야기였거든요.”
“네 목숨이 위험할 뻔했어. 교수대에 끌려갈 수 있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걸로 충분해.”
“공작의 약혼녀를 건드린 죄는 무거우니까?”
에리히가 클레어를 노려보았다. 클레어는 붉어진 뺨으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미안해요. 어쩐지 확인하고 싶어져서.”
“사과는 할 줄 알아서 다행이군.”
“심약해진 상태잖아요. 좀 봐줘요.”
에리히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뭐 하나 잘못했다고 남들 앞에서 순순히 키스하러 가 줄 마음은 없었으므로 클레어는 화제를 돌렸다.
“아 참, 혹시 리나 양도 저쪽에 넘겨야 하나요?”
“리나……? 아, 하녀 말이군. 막시밀리안이 얼굴을 아니까 보호하도록 했어. 아마 경시청 쪽에서는 모를 테니까 굳이 알릴 필요 없겠지.”
“그래요.”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밀리안 경은 진짜로 괜찮은 거죠?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바로 일을 시켰어요?”
“막시밀리안은 너보다 멀쩡해.”
똑똑.
그때 마침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 노크 소리와 함께 당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시밀리안입니다, 각하.”
“들어오게.”
막시밀리안이 문을 열었다.
클레어는 컵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막시밀리안 경!”
그는 조금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클레어는 예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다친 곳은 없어요? 총소리를 들었었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남작님이야말로 별일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미안해요. 내가 좀 더 내 입장을 자각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남작님은 그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행동하셨습니다.”
막시밀리안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제 이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다정한 태도였다.
막시밀리안에게 징벌실에 갇혔던 것이나 뒤에 남았던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기껏해야 폭력배였다. 총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의외였지만, 제대로 쏴 본 적도 없는 놈들이었다.
그가 걱정한 것은 여주인의 안전을 과연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클레어가 겁에 질려 주저앉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면, 그로서도 난감했을 것이다. 비상시이니 그는 두 손을 모두 비워 둬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발로 서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을 막시밀리안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에리히가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그녀 자체로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화상 입은 곳도 없는 거죠?”
그를 뒤에 남겨 놓았던 일이 퍽 마음에 걸리는 듯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작님이 일찍 무사히 달아나주신 덕분에 오히려 저는 편하게 몸을 뺐습니다.”
“흠.”
에리히가 가볍게 소리를 냈다. 클레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에리히가 차가운 얼굴로 막시밀리안에게 물었다.
“잡담은 그만하지.”
막시밀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레비 순보의 기자는 연락처를 받고 일단 집으로 귀가시켰습니다. 경호원을 하나 붙였습니다.”
“리나 양은요?”
“리나 그레이스는 오페라 극장의 다른 하녀들과 함께 안전하게 있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고, 남작님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스테판 하인즈의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서, 객실을 내주었습니다.”
“고마워요.”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소파에 몸을 파묻고 물었다.
“스테판 하인즈라는 자는 어땠나요?”
에리히가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요?”
“넌 역시 일 중독이야. 그것부터 챙기다니.”
“아니, 지금을 놓쳐서 만나 보지 못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는 거잖아요. 특별 조사단 손으로 넘어갈 테니까.”
“굳이 만나 볼 필요 없어. 네 말처럼 특별 조사단 손으로 넘어갈 거라서,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
“아, 그런가……. 섣불리 심문하다가 오히려 이쪽이 뭘 의심하는지 들킬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고 다른 곳에 정보를 넘기지 않도록 감금할 수도 없고.”
클레어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역으로 이쪽의 사고를 읽힐 뿐이라면, 만나지 않는 게 낫다. 지금처럼 피곤한 상태에서는 실수할 가능성도 높았다.
“어쨌거나 모두 우연이라고 주장하더군. 마침 사람을 낚아챌 수 있는 장치가 있는 곳을 약속 장소로 삼은 것도 우연이고, 토마스 보르얀스가 널 알아볼지 어떨지, 납치할지 어떨지도 자기가 어떻게 알겠느냐는 거지.”
그자는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1층 휴게실로 안내인을 보내겠다고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오페라 극장이 안전한 장소라는 것에는 클레어도 동의했다는 것이다.
클레어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대꾸했다.
“보르얀스가 날 알아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을 시켜 살짝 알려 줬으면 그만인 일이잖아요. 내게 위험한 정보를 넘길 예정이라고 말하면 효과가 더 좋았겠죠.”
“하지만 특별 조사단은 그 변명을 받아들일 거야. 주사위 열 개를 던져서 모두 1이 나오는 경우의 수보다는 확률 높은 우연이지.”
“개연성이라는 게 있는데.”
특별 조사단이 일을 묻는 게 목적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조사단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보면, 그자의 진짜 위치를 알 수 있겠지.”
“황후의 생각도요.”
클레어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에리히가 담담하게 말했다.
“리나라는 하녀가 널 뒤따라간 건 진짜 우연인 것 같더군. 그 얘기를 듣자 스테판 하인즈는 당황하는 얼굴이었어.”
“글쎄요.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잖아요. 주업이 춤이라고 해서, 연기력이 없다고 볼 순 없을 텐데요.”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동향은 어때요?”
에리히가 미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빌헬름과 막시밀리안을 비롯해 보좌관들이 모두 물러났다. 클레어는 약간 의아하게 생각했다.
에리히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듣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슈나이더 백작가가 중요한 건가?
그렇다면 화가 날 것 같았다.
“보르얀스는 슈나이더 백작 부인의 애인이라는군요. 아마 노라 호프만을 살해한 것도 보르얀스일 거예요.”
“확실한가?”
“모든 대화를 명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애인 딸이면 내 딸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헷갈릴 수는 없죠. 게다가 레비 순보의 기자가 얼쩡거리고 있었잖아요.”
클레어는 레비 순보의 기자가 진짜 탐사보도 목적으로 오페라 극장에 있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참새는 방앗간을 못 지나치는 법이다. 레비 순보가 귀족을 뒷배로 둔 마약상과 사교계의 꽃에 대한 스캔들 중에 어느 쪽을 쫓았을지는 명백했다.
에리히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에게 힘든 시간이 찾아오겠군.”
머릿속에서 뭔가 생각이 빙빙 도는데, 명확하게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클레어는 일어서서 에리히의 책상 곁으로 다가갔다.
“장부를 보여 줘요.”
에리히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중요한 것이었기에 자신의 책상에 직접 보관한 것이다.
클레어는 장부를 펼쳤다. 그것은 연잎 궐련의 공급 장부였다. 대다수에 지명이 적혀 있었다. 이건 보르얀스의 조직이 중간 공급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지명은 모두 아렌 지역의 것이었다. 지명이 아닌 것은, 아렌식으로 작명된 극단의 이름이다. 이 극단들은 대부분 아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클레어가 느낀 위화감은 그것이었다.
“이게 장부의 전부일까요?”
“그건 내가 너한테 물어야 할 일이야.”
“서랍에 있는 장부는 모조리 훑어봤는데, 그러면서 왜 반쪽밖에 없을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보르얀스가 장부를 서로 다른 방에 나눠서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영특할 거 같진 않아요.”
클레어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빠르게 장부를 뒤집어 자신이 위화감을 느꼈던 두 번째 부분을 찾아냈다.
“모든 문서에 대부분 아렌 이름뿐이었지만, 굳이 이걸 택해서 가져온 건 이게 지역별로 요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에리히, 마약상이 마약을 특정 지역에만 공급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지역별로 공급량을 조절해 가면서?”
“더 위에 두목이 있고, 중간 공급상을 두 개로 분할해서 관리하고 있는 거겠지. 합리적인 운영 방식이야.”
“그런데 여기에는 로멜 지방도 일부 포함되어 있어요. 모두 결혼이나 상속 같은 것으로 아렌 혈통의 귀족이 로멜 땅에 영지를 얻은 곳이에요.”
여기에 이르자 에리히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결론을 부정하지 못했다.
지역을 분할하여 두 곳에 맡긴다면, 지리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분할이 아렌과 로멜로 나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 생각에 이건 보르얀스가 작성한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라는 명령서죠.”
그렇다면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