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6/263)

67화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고 있죠?”

클레어가 물었다. 에리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진짜라면, 왜 슈나이더 백작가인가라는 것에 설명이 붙어요.”

“슈나이더 백작가는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가문이니까.”

“그리고 이리스 양의 이미지가 있죠. 사교계의 꽃, 성황청의 솔리스트,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 이리스 양은 아주 유명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파벌이나 갈등과 연관 짓지 않을 거예요.”

모든 일이 소개와 인맥으로 이뤄지는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름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신용을 갖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거기에 이리스의 이미지를 결합시키면, 대부분의 사람이 호감을 품을 것이다.

설령 로멜 귀족을 싫어하는 아렌인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리스의 명성은 슈나이더 백작 영애라서 생긴 것이 아니라 훌륭한 가수라는 점에서 생긴 것이니까.

지금 와 생각하면, 출생에 붙은 번잡한 소문이 깨끗하게 그녀 자신에게서 분리된 것도 놀랄 만한 일이다.

백작이 오페라 가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가 가수가 되었다. 얼마든지 추잡스러운 방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이리스에 대해서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분명히 황후가 손을 썼을 것이다. 사교계에 아무런 끈도 없었을 슈나이더 백작 부인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리스 양을 앞에 내세워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약을 거래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왜 이리스에게까지 불똥이 튈 거라고 토마스 보르얀스가 말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마약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이 시대라면, 이리스의 주변 사람이 내준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입에 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결국 슈나이더 백작 부인의 쓸모가 이리스에게 있다는 것도 틀린 생각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것만으로는 황후가 아렌을 파멸시키려고 하는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

“당연히 조사를 더 해야겠죠. 하지만 제게는 이제 논리가 맞는 느낌이 드네요. 어째서 황후가 슈나이더 백작 부인을 쓰는지 계속 의문이었거든요.”

이리스가 실제로 재능이 있어서 프리마 돈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 백작 부인이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다.

쓰고 버리려면, 이런 상대가 편리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에요. 스테판 하인즈도 황후의 사람이라면, 왜 토마스 보르얀스를 제거하려고 하죠? 내부 경쟁 때문에 이렇게까지 위협적인 정보를 저한테 넘기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마도 네가 거기서 살아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에리히가 말했다.

“거기서 죽었다면 내가 보르얀스를 그냥 두지 않았을 거야. 아무런 정보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페라 극장이 끝장났을 수도 있겠지.”

“그건 스테판 하인즈 자신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잖아요.”

“이 세상에 자기 행동의 결과물을 제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드물어.”

에리히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클레어는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테판 하인즈는 요한 크로지크와 동종 업계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없을 리 없었다.

그렇게 말하자 에리히가 혀를 찼다.

“그자가 정보요원이라고 누가 그래? 마약은 돈이 되는 일이야.”

“설마 황후가 단순히 돈 때문에 마약상을 휘하 조직으로 거두고 있다는 뜻이에요?”

“황후는 황후야. 황제 폐하를 제쳐 놓고 황실을 장악하고 있지만 정식 섭정도 아니고, 황실의 이름만으로 모든 일을 전부 처리할 수는 없어. 반드시 하원을 장악해야만 해.”

“정치에는 돈이 아주…… 많이 들죠.”

에른스트 공작가는 클라우제너 공작가처럼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방적으로 부를 쌓지는 못했다.

정책과 법률이 모두 지원한다고 해도 합법적으로 벌어들이는 돈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이 시대에는 시장에서 받아들여지는 기술을 독점적으로 손에 쥐거나, 원천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자만이 대성공을 거둘 수 있다.

품위를 생각하면, 타인의 성공을 강탈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에른스트 공작가는 부귀하지만, 사실 부라는 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윤택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자원과 거리가 멀어진다.

권력자는 부를 탐닉하고, 부자는 권력을 얻으려 하지만, 결국 그 핵심은 남을 지배하는 것에 있다.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그자는 그냥 눈앞의 적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 저를 이용하려고 했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그럴 가능성이 크지.”

“스테판 하인즈를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실제로 보면 당신과는 다른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에리히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클레어는 부연했다.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원래 관점은 위치에 따라 바뀌는 법이잖아요.”

“그렇지.”

에리히가 드물게도 대화를 끊으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역시 특별 조사단과 관계가 염려되는 건가요? 일단 내보냈는데 다시 불러오면 너무 눈에 띈다거나?”

“……아니.”

에리히는 조금 간격을 두고 대답했다.

포커페이스 위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클레어의 직감이 뭔가를 말했다.

“흐음.”

그녀는 책상을 돌아 에리히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가볍게 목을 그러안고 손가락 끝으로 더듬듯이 그의 턱선을 어루만졌다.

“솔직히 말해 봐요. 새삼스럽게 또 추문을 신경 쓰느라 그런 건 아닐 거고.”

“…….”

“이미 우리 둘 다 소문만으로 따지면 답 없는 문어발인데, 새삼.”

에리히가 혀를 찼다.

“아니면, 스테판 하인즈가 상상을 초월하는 미남이었다던가?”

“클레어.”

에리히가 엄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클레어에게는 그의 경고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얼굴을 밝히는 게 맞긴 한데.”

클레어가 그의 고개를 돌려서 백자를 조각한 듯한 이마와 뺨을 감정하듯 훑어보며 말했다.

인성과 성실성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 얼굴을 보고 있다 보면 영혼이 이성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지 않고 얼굴부터 찾은 건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에리히가 떨떠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스하고 싶으면 그냥 그렇다고 해.”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고, 이내 그의 손이 클레어의 목뒤를 쓸어 올려 머리칼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좀 놀려 볼 작정이었지만, 본전도 못 건진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혼 전부터 이런 생활, 과연 괜찮은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녀가 집중하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달은 듯 에리히가 경고했다.

사실 스테판 하인즈에 대해서 그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보안부 요원들이 초콜릿 같은 미남이라는 둥 어쩐다는 둥 소곤댔지만, 남자의 얼굴 따위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클레어가 막시밀리안을 반기는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이것저것 껄끄러워졌다.

막시밀리안은 중요한 위치였고,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이 중 하나였다. 클레어를 구하고 뒤에 남았으니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데도.

‘남자가 많긴 해.’

에리히는 이제 와서 루이자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루이자가 말할 때처럼 난잡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고, 순수하게 성별이 그렇다는 의미지만.

클레어의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스테판 하인즈는 귀족을 유혹하여 돈을 우려내는 자다. 딱히 중요한 요건도 아닌데, 그런 남자와 약혼녀를 굳이 만나게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호위를 여자로 새로 구해야겠다. 비서도. 찾아보면 추천할 만한 인재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매일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고 불평했으니, 추천하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18. 출생의 비밀

그날 사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밖으로 알려진 정보는, 마약상이 발각되었고, 특별 조사단이 편성되리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레비 순보의 나불거리는 펜대를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오너의 두둑한 지갑뿐이다.

기자는 귀가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곧바로 신문사로 달려갔다. 편집장이 잠옷 바지를 입은 채 달려오고, 막내가 인쇄소 사장의 잠을 깨우기 위해 밤새 뛰었다.

따로 지침을 내려 주지는 않았지만, 레비 순보는 알아서 낼 수 있는 기사와 그렇지 않은 것을 걸렀다.

윤전기가 과열로 작동을 멈출 만큼 돌린 결과, 뽑혀 나온 것은 모두가 흥분할 만한 추문이었다.

《단독 보도! 공작의 약혼녀를 해친 것은 슈나이더 백작 부인의 내연남이었다!?》

슈나이더 백작이 진실한 사랑으로 몰락 귀족 출신의 가수와 결혼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역풍이 17년 만에 불었다. 호외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오페라 극장에 정부가 있었던 거라면, 이거 새로 사귄 남자가 아닌 거 아냐?”

“그 남자도 중년이라며. 새로 만든 정부면 젊은 남자였겠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남자가 공작의 약혼녀를 왜 납치했다는 거야?”

“기사 봐요. 약혼녀를 납치해서 다른 귀족한테 팔아 치우려고 했다는데.”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냐고.”

“레비 순보가 자극적인 이야기만 갖고 와서 그렇지, 항상 알고 보면 사실만 쓰는 신문이잖아?”

행간을 읽는 것은 아주 쉬웠다. 신문을 읽는 호사가들은 이미 상당히 이전부터 슈나이더 백작가와 클라우제너 공작가의 이름을 함께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 뭐 괜히 공작의 약혼녀를 납치했겠어? 그 약혼녀만 없어지면, 레이디 이리스한테 이득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레이디 이리스가 천사 같다고 그렇게들 칭송하더라니. 결국 이거 봐봐. 나는 처음부터 쎄했어.”

“지난번에 약혼 파티 때의 소문도 들으셨죠? 보란 듯이 초라하게 입고 와서 공작님을 애절하게 바라봤다잖아요.”

“설령 예전에 비밀리에 교제했던 적이 있더라도, 그게 무슨 추태야?”

이날 오전에 레비 순보는 프리미엄이 붙어 중고 거래가 되었다.

오후가 되자 레비 순보의 기사를 받아쓰기한 신문이 나왔다. 어쨌든 레비 순보가 전부 찍어 내지 못한 물량이 수도 전체에 쫙 깔렸다.

이리스가 신문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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