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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7/263)

68화

간밤의 일로 그녀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다가 새벽에 겨우 까무룩 곯아떨어졌다. 그 탓에 오후에서야 겨우 깨어났던 것이다.

“오늘 자 신문 가져다줘, 전부.”

다시 생각해도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이리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에리히가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한 것을 처음 보았다. 약혼 파티 때 자신을 외면하긴 했지만, 그때는 무심한 태도였을 뿐이다.

사실 그는 늘 무심했기 때문에, 이리스는 자신을 역성들어 주지 않는 것에 놀라고, 또 클레어와 다정한 모습을 보인 것에 상처받아 많이 울었지만, 그가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젯밤의 그는 완전히 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오페라 극장을 그 자리에서 때려 부수게 하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지배인이 그녀를 무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소곤대면서도 이리스를 피했다.

집에 돌아와 하소연하자 백작은 크게 놀라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아빠가 알아보마. 넌 이만 잠자리로 가려무나.]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무얼 해 주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신문부터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하녀들은 머뭇거리면서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리스는 화를 낸 끝에 겨우 신문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아가씨, 마음 단단히 하시고…….”

“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쓰레기 같은 신문사잖아요.”

“안 그래도 계속 어떻게든 아가씨를 비난해서 판매고를 올려 보려고 난리였던 곳이니까요.”

이리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여자는 미친 건가? 아무리 자신이 미워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엄마를 모함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제가 한 일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이리스는 오페라 극장의 뒤 통로를 이용하는 고객 중에 다수가 남몰래 가수나 무용수를 만나러 다니는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정부를 둔 건 본인이겠지!’

클라우제너 공작 대부인의 말이 맞았다. 남자한테 미친 여자인 게 분명했다.

‘불쌍한 에리히 님. 그것도 모르고, 그 여자가 둘러대는 말에 속으신 거야.’

그녀는 황급히 뛰어나가 백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사가 복도를 지키고 서서 이리스를 막았다.

이리스는 초조하게 말했다.

“엄마 보러 갈 거야.”

“마님께서는 오늘 아침부터 편찮으셔서요.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설령 면회 사절이라고 해도 딸인 이리스는 예외일 테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어서 집사는 곱게 돌려 말했다.

사실상 연금 상태라는 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에 이리스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아빠는?”

“주인님께서는 마님 곁에 계십니다.”

이리스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 이번에는 큰오빠 로베르트의 거처로 향했다.

이리스는 일단 응접실로 안내되었으나 좀처럼 로베르트가 나오지 않아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응접실로 안내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거실로 바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싸움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낯부끄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어요. 난 처음부터 반대였어요. 아버님이라면 좋은 가문과도 재혼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가수 출신의 천한 여자라니,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죠!”

“이리스를 입적하기 위해서였잖소. 당신도 그 일에는 동의해 주었고.”

“이리스를 입적한 게 불만인 게 아니에요. 배우자 동의가 필요해서 재혼하신 거면, 하다못해 집안이 좀 가난해도 좋은 집안에서 시녀나 가정교사로 일한 숙녀를 찾아도 됐었잖아요.”

로베르트의 아내가 격하게 말했다.

“어차피 친모도 아닌데!”

이리스는 저도 모르게 문을 손으로 밀었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이리스를 돌아보았다. 이리스가 눈을 크게 뜨고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물방울이 방울방울 푸른 눈동자에 맺혔다. 로베르트가 당황했다.

“이리스.”

“오빠,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오해다.”

“뭐가 오해야? 엄마가 아빠한테 얼마나 헌신적인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이리스, 그렇게 울지 말고. 오빠 말을 좀 들어 보렴.”

로베르트가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스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절대 널 무시해서 그런 거 아니야. 오해가 좀 있어서 그래. 저이가 널 미워해서 그럴 리가 없잖니.”

“새언니는 내가 아빠의 친딸로 받아들여진 게 싫은 거잖아. 나는 아빠 딸인데. 내가 미워서 엄마까지 싫어하는 거잖아.”

이리스가 흐느끼며 하소연했다. 로베르트가 얼른 그녀를 보듬어 안고 토닥거렸다.

“그럼, 넌 우리 집 딸이지. 아버지 딸이고, 내 동생이지.”

그 모습을 보며 그의 아내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진절머리 나네, 진짜.”

“그만해요, 여보. 이렇게 순진한 아이한테 오해할 만하게 말한 건 당신 아니오.”

“순진이요? 영악한 거겠지.”

로베르트의 아내는 코웃음만 쳤다.

이 집에서 이리스는 화가 났을 때 절대 상대방에게 직접 말하는 법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사람처럼 울면서 백작이나 오빠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면 아직도 그녀를 여섯 살 아이처럼 사랑하는 집안 남자들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꾸짖는 것이다.

그렇게 당한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감정이 풍부해서 잘 울고, 수줍어서 직접 말을 걸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물세 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런다면,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큰 소리를 내도 겁먹은 얼굴을 했지만, 자기편을 드는 남자들이 코앞에서 고함을 지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많이 달래고 많이 예뻐하며 잘 사세요. 나는 애들 데리고 친정에 좀 가 있겠어요.”

“뭐? 여보?”

“이런 집에 어떻게 남아 있어요? 아버님이 밖에서 낳은 자식을 입적하려고 만든 가짜 모친이 불륜을 저지른 탓에 클라우제너와 척을 지다니.”

“여보!”

“꼴사나워서, 진짜.”

로베르트가 언성을 높였지만, 그녀는 몸을 돌려 내실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리스는 한참 울었지만, 로베르트에게 평소처럼 맘껏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다.

로베르트가 그녀를 두고 가지는 않았지만, 계속 내실 쪽을 신경 쓰며 초조해했기 때문이다.

이리스는 결국 그에게 얼른 들어가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걱정되기도 했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평판이 이것 때문에 바닥까지 떨어질 수도 있단 말인가? 이런 거짓말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일을 해결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녀는 결심을 굳히고 외출 준비를 했다.

청초하고 고운 살구색 드레스를 걸치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말아 내렸다.

목에는 풀잎을 엮어 만든 듯한 녹색 보석 목걸이를 걸었다. 여리여리하고 우아한 자태였다.

하녀가 당황해서 물었다.

“어딜 가시려고요, 아가씨?”

“에리히 님을 만나러 갈 거야.”

“그러시면 안 돼요. 백작님이 근신하라고 하셨잖아요.”

“에리히 님도 상황을 아셔야 해. 이대로 있으면 우리 집이 엉망이 되어 버릴 거야. 에리히 님이 그걸 원하고 있을 리 없어.”

잘 이야기해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아빠도, 에리히도 이해해 줄 것이다.

‘내연남이라고 소문난 건 아마 엄마의 옛 친구일 거야. 엄마는 오페라 극장의 가수였으니까, 거기 아는 사람이 잔뜩 있는 게 당연하지.’

무엇보다도 에리히가 속고 있는 것이 너무 속상했다. 그 여자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그 여자를 걱정하고 보살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만 했다.

그녀는 각오를 단단히 세우고 클라우제너 공작저로 향했다.

그때 클레어는 리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던 중이었다. 리나가 중앙 정원의 분수대를 구경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제가, 폐를 끼치고 있는 건 아니지요?”

“폐라뇨. 리나 양이 먼저 요청해 준 일이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클레어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리나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정원에 나가도 된다고 듣긴 했지만, 혼자서 나갈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남작님께 부탁드리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인가 했는데.”

“우리는 같이 생사의 위험을 헤쳐 나온 사이잖아요?”

그 말에 리나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건 나죠. 지금도 하는 중이고요. 불편한 건 없죠?”

“이제 집에 어떻게 가나, 걱정하고 있어요.”

리나가 키들키들 웃었다.

처음 불려온 날에는 너무 긴장해서 거의 잠들지 못했다.

애꿎은 사람이 다치는 걸 볼 수 없어서 끼어들긴 했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옷궤를 열어 살짝 클레어를 꺼낸 다음, 비밀통로로 오페라 극장으로 되돌아오면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토마스 보르얀스의 아지트는 화재 뒤에 경관들이 포위 진압하여 완전히 박살 났고, 오페라 극장에서는 지금도 뒤 통로를 드러내기 위해 철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고용인은 대부분 경찰서로 끌려갔다. 누가 토마스의 조직원인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용의자는 대개 죄인 취급이었다.

그녀도 경관들이 찾을 때는 몹시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서가 아니라 공작저로 불려 왔다.

그게 더 무서웠다. 리나는 불안해서 소파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걸치고 있다가 결국 푹신한 카펫에 웅크리고 꾸벅꾸벅 졸았다.

얼굴을 아는 막시밀리안이 찾아와 사정을 설명해 준 다음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남작님께서 리나 양을 몹시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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