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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68/263)

69화

[아, 그분은 괜찮으신가요? 다친 곳 없이 무사하시죠?]

[무사하십니다. 다만, 기진맥진해서 잠드신 터라 회복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막시밀리안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상황이 상황이라, 리나 양에게 공연한 불똥이 튈 수도 있을 것 같아 따로 모셨습니다. 남작님께서 일어나시면 리나 양을 보고 싶어 하실 테니, 한동안 여기서 푹 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다면, 리나도 안심하고 쉴 수 있었다.

당연히 사람으로서 했어야 하는 조그만 선행에 커다란 보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부족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객실은 호화로웠고, 아침저녁으로 큼직한 욕조에 뜨거운 목욕물이 준비되었다.

옷장에는 깔끔하고 잘 만들어진 데이 드레스가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삼시 세끼 정시에 새로 만든 따끈따끈한 식사가 방으로 날라졌고, 수시로 간식과 예쁘게 플레이팅 된 다과상도 들어왔다.

테라스로 나가면 아름다운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훌륭한 음악실도 빌릴 수 있었다.

리나는 사흘 만에 완전히 몸과 마음이 녹아 버리고 말았다. 클레어가 자부심을 가지고 준비한 대접이었다.

“사람을 사육해 주는 공짜 호화 럭셔리 리조트 휴가가 최고지.”

금수저 귀족 나리라면 모르겠지만, 밖에서 일을 해야 돈이 생기고, 그 돈을 가지고 집에서 또 일을 해야 밥이 생기고 인간다운 생활이 유지 가능한 사람에게 이 행복은 백 프로다.

“그런데, 전 언제까지 여기 있게 되나요?”

“나가고 싶어요? 내 대접이 모자란가?”

“그건 아니고요. 스테판의 참고인 조사가 끝나면 저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자기가 말하는 게 스테판을 내보내 달라는 청탁처럼 들릴까 봐 리나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나오면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하인즈 씨의 고용인들은 대부분 도망쳤다고 들었어요. 물론 많은 수가 다시 조사를 받게 되긴 했지만요.”

클레어는 리나가 겁먹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나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말씀하셔도 돼요. 다 잡혀갔나요?”

“음…….”

“어쩔 수 없죠. 저도 알아요. 스테판은 보르얀스 씨와 경쟁 관계였으니까.”

연잎 궐련의 문제만이 아니다. 리나도 알고 있었다.

스테판은 미모를 이용해 사람을 꾀어서 자기 좋을 대로 이용했다.

패가망신할 정도로 돈을 가져다 바친 자도 있고, 제 손을 더럽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하녀들에게 손을 올리기도 하고, 발레단원들에게 패악도 떨었다.

그래도 리나는 그를 걱정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스테판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벌을 받고 나왔을 때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리나 양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의리가 있어요?”

“스테판은 그렇게 생각 안 할지 몰라도, 저는 가족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봐요.”

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할머니가 절 업고 나쁜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 스테판의 어머니가 구해 줬거든요. 그때부터 한집에서 자랐어요.”

“그러면 다른 가족은 아예 없는 거예요?”

“아마 그럴 거예요. 할머니한테 여쭤본 적도 있는데, 알아봐야 좋을 게 없다면서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돌아가셨을 때도 스테판만 저랑 같이 장례를 치러 줬어요.”

“그랬군요…….”

클레어는 대답하면서 마음속으로 카드를 뒤집듯 여러 가지 생각을 꺼냈다가 내려놓았다.

긴장이 풀린 리나는 평화롭게 말했다.

“어렴풋이 엄마가 기억나긴 해요. 엄청 예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얼굴까지 기억나는 건 아니라서…….”

리나는 그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해 봤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무서운 얼굴로 잊어버리라고 리나를 꾸짖었다.

그런 다음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다. 불쌍한 아이라고.

리나는 자기가 객관적으로 불쌍한 처지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설령 할머니도 없이 완전히 고아였어도 그녀는 그곳에서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괴로움 같은 것은 어느새 전부 잊혔으니까.

클레어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님이 아름다우셨으리라는 건 알겠어요. 리나 양도 예쁘니까.”

“저, 저 같은 게 무슨…….”

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극단에서 오래 일했는데, 아무도 리나 양에게 무대에 서 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너무 이상해요.”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어요. 오디션을 보려고 했던 적은 있지만, 스테판이 저한테는 재능이 없다고…….”

리나가 쪼물거렸다.

클레어는 겉으로는 웃는 낯을 유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야차처럼 포효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 새끼는 최악의 경우 가스라이팅 하는 남사친 놈이고 최선의 경우 가스라이팅 하는 오빠 놈이다. 최악부터 최선까지 똑같은 수준이었지만.

자연스럽게 과거 이야기를 들어 내려고 했을 뿐인데, 진심으로 열이 받았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보답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니?

“리나 양, 데뷔하죠.”

“네?”

“아니, 안 그래도 이 이야기 하려고 했었거든요. 순서가 있다 싶어서 좀 꼬신 다음에 하려고 했는데.”

클레어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격하게 말했다.

“전속 계약해요. 다이아몬드 모델로. 의식주 전부 최상급으로 제공하고, 모델료로는 10년 4백만 골드를 줄게요.”

“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한 데다가 4백만 골드 같은 건 들어 본 적도 없는 숫자라 리나는 눈만 휘둥그레 굴렸다.

클레어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너무 후려친 가격을 불렀나요? 하지만 리나 양은 아직 신인이니까. 좋아요, 이쪽의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독신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20년 1천만.”

리나가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신 건 알겠어요. 듣기만 해도 좋네요. 1천만 골드가 있으면, 평생 늦잠 자면서 기분 좋은 일만 하고 살 거예요.”

“내가 농담으로 1천만 골드 같은 거액을 입에 담는 걸로 보여요? 저 위빙 상단의 상단주예요.”

흩어지는 분수대의 물소리 사이로 클레어의 목소리가 뾰족하게 솟았다.

리나의 뺨이 이유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괜스레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남작님은 정말 신기한 분이에요.”

“네?”

“다른 사람이 남작님 위치에 있었으면, 자신을 믿으라고 말할 때 상단주라는 신분을 제일 먼저 꺼내지 않을 거예요. 클라우제너 공작 부인이 되실 분이라고 말씀하셨겠죠.”

“아.”

클레어는 새삼스럽게 깨달은 듯한 목소리를 냈다.

“전 그래서 남작님이 좋아요.”

리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때 멀리 마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슈나이더 백작가의 마차였다.

클레어는 그 마차에 탄 것이 백작 본인이거나 장남이리라고 생각했다.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괜찮겠지요?”

“아, 그럼요. 같이 산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나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클레어는 빠른 걸음으로 돌아섰다. 슈나이더 백작가에서도 황실까지 나서서 중재하여 만들어지는 특별 조사단에 무슨 말을 하지는 못할 것이고, 레비 순보의 입이라도 다물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것일 터이다.

그런 이야기를 에리히가 하게 만드는 게 꺼려졌다. 안 그래도 슈나이더 백작 때문에 그가 마음 쓰고 있으니 말이다.

‘레비 순보가 도를 지나치긴 했지.’

맹세코 첫날 쏟아져 나온 호외에 그녀는 관여하지 않았다. 잠들어 있을 때 이미 발행되었으니까.

윤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갑자기 기사를 전부 눌러 없앨 방법이 없었다. 삭제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미 인쇄된 신문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적당한 때에 정론지부터 시작해서 본래 사건인 마약상 문제로 추문을 덮을 작정이었다.

‘사과도 해야 하나.’

그건 좀 싫다고 생각하면서 현관에 도착했는데, 마차에서 내린 것은 백작이나 백작의 장남 로베르트가 아니었다.

현관을 지키고 있던 호위가 난감하다는 듯 이리스를 몸으로 막아서며 말했다.

“각하께서는 오늘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접견 대기실에만 가 있겠다고 했잖아요. 거기는 개방 공간이잖아요. 이야기는 집사를 시켜 전하겠어요.”

“곤란합니다, 레이디 이리스.”

“전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클레어가 당도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

그녀는 조금 놀랐다. 설마 이리스가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호위가 안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귀한 숙녀와 몸으로 실랑이하는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죠?”

“당신……!”

이리스가 발끈하여 새빨간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클레어는 이리스가 이번엔 도대체 무슨 턱도 없는 소리를 할까 싶어 거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씩씩거리며 뺨따귀를 날렸다.

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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