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69/263)

70화

경쾌할 정도의 소리에 저택 현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클레어는 맞아 놓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비상식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천천히 맞은 뺨에서부터 통증이 퍼졌다.

경악한 호위들이 순식간에 이리스의 팔을 잡아 제압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썼다.

“신문에 이상한 기사를 내게 한 거, 그쪽 맞죠? 제정신이에요?”

클레어는 그 말을 듣지도 않았다.

“어떻게 사람을 모함해도 이런 식으로 모함할 수 있어요? 그쪽도 같은 여자면서,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기사로 쓰게 하냐고요!”

짝!

이번에는 클레어의 손이 이리스의 뺨을 후려갈겼다.

“꺄악!”

이리스가 요란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냐니. 방금 이리스 양이 내게 한 짓이요.”

클레어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화가 나다 못해 머리끝까지 찬물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한기가 서렸다.

“이리스 양이 자기중심적인 줄은 알았지만, 정말 놀랍네요. 다짜고짜 찾아와 사람 뺨을 때려 놓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다니.”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그러면 나한테는 이런 짓을 해도 돼요? 아니면, 이리스 양은 해도 된다는 건가요?”

이리스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뺨을 때려 주셔서 영광입니다, 라고 인사라도 할까요? 아, 혹시 본인을 진짜 천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나는 천사한테 맞아도 마주 때릴 거지만.”

이리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람 함부로 모욕하지 마세요! 이게 다 그쪽이 이상한 음모를 꾸민 탓이잖아요!”

“음모라뇨? 내가 무슨 음모를 꾸며요?”

“우리 엄마가 아빠랑 얼마나 금슬이 좋은데, 엄마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거짓말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려고 해요?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이건 선 넘은 일이잖아요!”

클레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연기하나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진심처럼 보였다.

“아니, 세상에!”

그때 뒤에서 리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클레어가 들어가고 나자 괜히 혼자 외로워져서 분수대를 보고 있어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방으로 들어갈 작정으로 걸음을 서둘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남작님! 괜찮으세요?”

리나가 한달음에 달려와 클레어의 얼굴을 살폈다. 뺨에 빨갛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 레이디 이리스가…….”

리나는 숨이 멎을 듯이 놀라 헐떡거리며 이리스를 돌아보았다.

이리스가 숨을 삼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리나는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슈나이더 백작 부인 때문에 오신 거라면, 제가, 제가 증인이에요.”

심장이 떨렸다. 그녀는 귀족 앞에서 당당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이리스였다. 귀족이면서 프리마 돈나였고, 고귀한 성황청 솔리스트였다.

저승에서 올라온 여신처럼 고귀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오페라 극장에서 리나는 늘 이리스의 노래를 훔쳐 들었고, 후광에서 달아나듯 먼발치에서 동경했다.

그러니 이렇게 먼저 나서서 말하는 것이 무서웠다. 여기가 다른 곳이었다면 매질을 당했을 것이다.

이리스는 천사처럼 관대하게 웃으며 용서해 주겠지만, 그녀를 받드는 사람들이 무례한 하녀를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하지만 클레어가 터무니없는 말로 모욕당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분명히 들었어요. 토마스 보르얀스의 옛날 애인이 슈나이더 백작 부인이었고, 지금도 애인 딸을 자기 딸처럼 여겨서 레이디 이리스를 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이리스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들은 말을 옮겼을 뿐이지만, 귀족을 모욕한 꼴이 될 것 같아 리나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굽히지 않았다.

“신께 맹세해도 좋아요. 제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 벼락이 내리쳐서 죽을 거예요.”

“리나 양.”

클레어가 의외롭다는 얼굴로 리나를 바라보았다.

리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괜찮다. 클레어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 리나는 그녀만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페라 극장의 지배인도 알고 있을 거예요. 보르얀스 씨가 카탸 부인과 가까운 사이인 걸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 말에도 이리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레어는 호위에게 손을 풀어 주라고 눈짓했다.

털썩.

이리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리나에게 못 박힌 채였다.

“슈나이더 백작 영애?”

태도가 아무래도 너무 이상해서,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리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그 말은 리나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서서 마치 달아나듯이 저택을 빠져나갔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기어오르듯이 마차에 올라 문을 닫으며 이리스는 손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아가씨, 아가씨? 어디 편찮으십니까?”

마부가 놀라 마차 문을 두드렸다. 이리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냈다.

“집, 집으로.”

“예.”

마부는 당황한 채 대답하고 마부석에 올랐다.

곧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이리스는 겁에 질려 그 마차 안에서도 숨듯이 바닥에 앉았다.

‘그 얼굴, 그 얼굴! 알고 있어!’

백작이 서랍 깊은 곳에 숨겨 놓은 초상화 속에서 그 얼굴을 본 적 있었다. 이리스는 그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게 누구냐고 묻는 이리스의 질문에 슈나이더 백작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었다.

[아빠가 옛날에 팬이었던 여가수란다.]

[진짜요? 엄마한테 말해도 돼요?]

놀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슈나이더 백작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네 엄마도 안단다. 엄마의 친구이기도 하거든.]

이리스는 아빠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을 그때 처음 봤다.

[정말 아름답게 노래하는 사람이었지. 합창단의 일원이었을 때부터 뭔가 달랐어. 그 사람한테만 빛이 내리쬐는 것처럼 보였거든.]

[아빠.]

[오페라 극장이 아니라 성가대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런 말을 하다 말고 백작은 다정하게 웃으며 이리스를 끌어안고 뺨에 입 맞추었다.

[이젠 다르지. 이제 아빠에게 최고의 가수는 우리 이리스니까.]

슈나이더 백작은 두 번 다시 그 초상화 속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이리스는 나이 들면서 그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게 자신의 친모일 거라고.

그녀도 자기 출생에 대해 알고 있었다. 소문이 언젠가 그녀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알리는 게 낫겠다고 백작이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가 친엄마였든, 친엄마가 따로 있었든, 그녀가 남들과 달리 서로 사랑하는 진실한 연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주 특별한 아이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특별한 아이인 자신을 사랑하여 아빠와 결혼했고, 아빠도 자신이 엄마라고 부른다는 이유만으로 신분차를 감수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정이 깊어져 이제 세상에 둘도 없이 다정한 부부였다.

그녀의 세상은 그야말로 오로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가득한 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빠 딸이 아니면?’

직감과 의식 밑에 묻힌 기억들이 의혹을 들쑤셨다.

그녀는 오페라 극장에 가끔 자신을 유심히 보는 중년 남자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의 시선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라 굳이 책망하여 꾸짖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평민치고도 천해 보이는 남자인데, 왜 말을 건다고 자꾸 받아 주세요?]

[엄마의 옛 친구야.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가 아주 어려서 밖에서 살 때 귀여워해 주었단다.]

그 말은 다시 생각하면 이상한 이야기였다.

지금도 교류를 이어 가고 있는 사람을 카탸는 왜 굳이 ‘옛 친구’라고 했을까? 그 ‘옛’ 다음에 들어가야 할 단어는 다른 게 아니었을까?

그로부터 어렴풋하게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들불처럼 이리스를 휩쓸었다.

[이리스! 내일 또 놀러 와!]

그녀에게는 소꿉친구가 있었다. 엄마와 함께 손을 잡고 좋은 집에 놀러 가면, 늘 그 아이가 반가워하며 맞이해 주었다.

이리스는 그 아이가 미웠다. 항상 자기보다 좋은 옷을 입고, 예쁘게 머리를 빗고, 꽃병이 있는 깨끗한 자기 방을 갖고 있는 게 너무 미웠다.

잊어버린 지 오래된 일이다. 엄마가 잊어버리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중요하지 않아서 마음 밖으로 밀어 놓았던 것이지, 진짜로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섯 살 때까지 그녀는 백작가 밖에서 카탸가 키워 주었다. 그때도 이웃과 친구가 있었다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 초상화, 그 얼굴, 그 머리칼……!’

이제야 깨닫고 이리스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백작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초상화 속의 여자가 낳은 것이 백작의 딸이라면, 그것은 자신이 아니다.

그 순간,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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